국사편찬 위원회가 정의한 4.3시건의 성격
1948년 2월7일을 기해 공산주의자들은 살인, 방화, 폭력, 파업, 시워, 뇌물증여, 폭동 및 혁명 사주, 협박 및 선전을 포함하여 어떤 수단으로든지 5월10일 총선거를 교란시키고 방해하며 유엔임시위원단을 한국에서 떠나게 하려는 강력하고 포괄적인 공작을 시작했다.
이 공세 전체가 평양에서 계획되고 보레시노프(소련 동아시아 군사본부)와 모스크바로부터 지시받고 있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 관계문서 1)
대검찰청 수사국의 '좌익사건실록' 이 규정한 제주4.3사건의 성격
얼핏 보기에는 쓸 데 없는 유혈인 듯한 제주폭동은 '모스크바' 의 눈으로 보면 크게 의미가 있고 이익이 있는 것이다. 제주폭동의 목표는 결코 제주도를 점령한다거나 그들의 말하는 소위 '단선단정'을 좌절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임을 모스크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유혈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었는가?
첫째는 선전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보라! 조선인민은 죽음으로써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 소련의 프라우다 지의 논평과 모스크바 방송의 하룻밤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공산주의에 현혹되었던 제주도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이해해 주다가 죽은 것이다.
둘째는 남조선의 민심을 선동하여 될 수 있으면 남조선 각지에도 제2 제3의 인민봉기를 획책해 보려는 것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규정한 4.3사건의 성격
194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이른바 4.3폭동사건은 해방 후의 사회 혼란기를 이용하여 소수의 공산분자들이 순박하고 가난한 섬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제주도를 공산화하려고 획책한 무장폭동사건이다. (비정규전사 1948, 5 ~1950, 6까지의 제주4,3폭동 공비소탕작전)
정부기관의 제주4.3사건 성격 규정에 대한 결론
대한민국의 모든 공식 기록이 4.3사건을 반미 ㅡ 반국가 ㅡ 친북 ㅡ 반단정단선 ㅡ 적화통일을 위한 폭동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도 남한의 좌익들은 김대중, 노무현 시대의 좌경화된 사회 분위기를 이용하여 이 모든 기록들을 뒤집었거나 지금도 왜곡하느라고 바쁘다.
저들은 4.3사건을 순수하고 정덩한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에 북한과 연계되지 않았고 남로당 상위조직으로부터도 아무런 지시를 받은 일 없으며 멀리 떨어져 고립되고 낙후된 제주도민을 미군정이 학대하는 데 반발하여 일어선 의로운 항쟁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장유격대와 그들 편에서 토벌대와 싸운 항쟁세력은 절대로 일반 민간인들을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당시 제주도에서 살해된 모든 여성은 군정토벌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장공비들이 전투훈련장소로 이용했던 제주시 동부 봉개동의 12만 평에 '제주4.3평화공원'을 조성했고 그 안에 '제주4.3평화기념관'을 건립하여 친북 ㅡ 반미 ㅡ 반대한민국 사상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들은 또 화북리에서 마을 유지들을 살해하고 제주 동북부지역 유격대장을 하다가 유격대사령관 김달삼(이덕구)과 함께 북으로 간 유격대 지역 사령관 김주탁과 경찰에 사살된 김주탁의 동생 김주영도 토벌대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으로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4.3사건은 1946년 9월 전국적인 파업과 파괴와 10월1일에 발생한 대구폭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소련의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소련은 그 두 사건을 지령하면서 일화 500만엔이라는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제주도 4.3사건 역시 이러한 선상에서 있었던 무장반란폭동인 것이다. 정부가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해 있던 14연대와 1개 대대를 제주 공비토벌부대로 파견했을 때 2개 대대가 즉각 총을 꺼꾸로 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 것이며 이때 북한은 6.25남침을 위한 대남역량을 조성하기 위해 오대산에 10차에 걸쳐 인민유격대 2,300명을 투입했다. (고재우의 6.25전쟁 전 공비 및 인민유격대 소탕작전)
기타 참고사항
2003년 12월15일 4.3특위 위원장인 고건 총리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578쪽에는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7년7개월의 무장폭동 기간 동안 신고된 희생자 수가 14,028 명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1948~50년까지 3년 동안 7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진상보고서에는 14,028명 중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78,1%(10,855명), 무장유격대에 의한 희생자 수는 12,6%(1,764명)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희생자가 9%(,266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북한의 박설영이 쓴 논문 169쪽에는 제주4.3봉기를 "전체 도민 30만명 중에서 24만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항쟁이었다" 고 기술돼 있다. 제주도민의 80%가 좌익이거나 그들 편이었다는 것이다.
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정석균이 쓴 "제주4.3시건의 진상" 중에 '사건이 일어난 배경' 에도 해방 직후 제주도민의 80%가 좌익이었다는 내용이 있는 데 그것이 사실인 듯 하다.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제주인민군으로 불리던 인민유격대는 불과 500명 미만이었으며 이들이 각 동네 좌익들의 지원을 받아 무려 7년7개월이나 공비로 활동하면서 경찰과 군인, 서북청년단원과 그들의 가족까지 무참하게 죽인 것이다. 북한이 남파한 소수정예의 유격대와 그들을 도운 이른바 동네 빨갱이들의 테러행위가 얼마나 과격하고 거셌으면 군과 경찰을 제주도에 대거 투입하여 토벌해야 했겠는가.
그리고 토벌대가 빨갱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일부 무고한 주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희생시키기도 했겠지만 인민유격대 즉, 북한이 남파한 제주빨치산들 역시 무고한 양민들을 반동분자라 하여 무자비하게 살해한 일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억울하게 죽었고 또 죽어야 할 자가 정당하게 죽었는지 밝히는 일은 그 사실을 증거하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 당시 정부는 신뢰할 수 있는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사건보고서를 작성했지만 훗날 고건과 박원순의 주도로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제주도 희생자 가족들의 말을 사실로 인정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부실할 수밖에 없어 무장유격대로 황동한 자들까지 억울하게 죽은 민간 희생자로 둔갑한 일도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내가 알고 있는 제주4.3사건 관련한 내용이 많이 있으나 이 정도만 해도 대략 어떤 사건이고 왜 일어났는지 또 우리 사회의 좌익들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므로 나머지는 생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