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15일 고건 국무총리가 위원장이고 대표적 빨갱이 박원순이 리더로 주도한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가 작성하여 발간한 정부의 공식보고서가 규정한 4.3사건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2001년 당시의 국무총리 고건은 제주4.3사건조사위원장을 역임하며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그 서문에서 제주4.3사건의 전체적인 성격과 역사적 평가는 후세 역사가들의 몫이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별대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2008년 12월10일자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행한 '화해와 상생 제주4.3위원회 백서'의 설립 배경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도민들은 1948년 미군정 시절 실시된 남한단독선거에 대하여 '한반도를 영구히 분단시키는 선거'라고 반대하고 나섰다가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군정이 남한의 단독정부(단정)의 건국과 단독선거(단선)를 시행하게 된 이유는
1945년 8월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남과 동시에 미.소 양국은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3.8도선을 중심으로 남측은 미국 북측은 소련이 각각 군정 통치하기로 이미 결정을 한 상태였고 그를 위해 남측은 미군이 북측은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으며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상태에서 군정이 시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 소련군은 미군보다 먼저 북쪽 지역을 장악하여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화 통치를 시작했으며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무상분배를 끝냈고 인민해방군이란 군대도 창설했다. 또한 남측보다 약간 늦은 1948년 9월9일에 조선인민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창건했는데 그처럼 공산주의국가 수립의 기반구축은 남측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남측이 늦은 것은 해방과 동시 건준(건국준비위원회) 등 국내 좌익세력과 우파세력의 등장으로 사회가 몹씨 혼탁한데다 미.소 신탁통치의 찬.반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유엔의 결의에 의하여 한반도의 정부수립을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남북단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으나 3.8도선 이북을 장악한 소련군이 유엔감시위원단을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유엔이 결의한 남북단일정부수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선거가 가능한 남측에서만 5.10총선거를 실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4.3백서에 기록된 그대로 '제주도민들은 남한 단독선거는 남과 북으로 영구히 분단시키는 선거'라며 반대했다는데 그렇다면 김일성의 조선인민민주공화국 건설에 제주도민들이 피 흘려 희생하면서 적극 동조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주도민들은 한반도에 대한민국 건국을 막고 김일성의 조선인민민주공화국 하나의 국가만을 위해 국군과 싸우다가 피 흘리며 죽고 다친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막으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며 무장투쟁하다 희생당한 역적들인데 대한민국에 무슨 공헌을 했다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보상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과 싸우다가 희생된 군경들의 명예와 유가족들 입장은 어찌 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