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무장폭동에 대한 북한의 논문과 노동신문 기사
아래는 북한의 논문에 실려 있는 내용
1948년 4월3일 새벽 행동개시 시각이 다가왔다. 이 시각 각 면단위로 편성된 인민자위대는 산, 들, 동굴, 밀림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고 행동개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 2시 한나산의 령봉을 비롯한 각지에서 신호총소리와 홰불이 일제히 타오르자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은 손에 무장을 들고 원쑤 격멸에로 총궐기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 지' '상'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 제주도지방 소식을 알리는 소식지의 상 중 하 중에 상을 뜻함)
"사건 하루 전인 1948년 4월2일 각 읍, 면 단위로 마을 가까운 동굴과 야산에 집결, 무기를 지급받았던 무장자위대라는 이름의 재산폭도들은....4월3일 새벽 2시 한나산 정상을 비롯한 진도의 산악고지에서 일제히 봉화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력봉기를 했다."
노동신문은 4월3일 무력봉기에 대하여
"1948년 4월3일 절해의 고도 제주도에서 정의의 홰불은 올랐다. 새벽 2시를 기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뼈에 사무친 원한을 폭발시켜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반동의 거점인 도내 경찰지서를 일제히 습격하였다." (1949,4,3)
"무장대들은 은밀하고 대담한 기습작전으로 적들에게 무리죽음(주:집단사살)을 주었다. 봉기자들은 수십 개의 무장습격조를 편성한 후 한 개 습격조에 한 개 습격 대상을 담당시키는 원칙에 기초하여 동일한 시간에 일제히 통일적 행동을 개시하여 적을 치고 신속히 퇴각하는 전술을 적용하였다. 이것은 적을 분산된 상태에서 각개 격파함으로서 적이 다른 곳에 있는 력량을 집중하며 기동반격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남원면 남원경찰지서에 돌입한 90여 명의 무장대는 총과 도끼, 몽둥이 등을 가지고 2명의 악질 경찰을 처단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여러 정의 무기를 탈취한 후 지서 건물을 완전히 불태워버리었다.
애월면 구엄경찰지서를 습격한 100여 명의 대부대는 4~5개 조로 나누어 반역자들의 집을 습격하며 놈들을 처단하고 집에 불을 질러 인민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한림면 한림려관에 '서북청년회' 테로단원 7명이 숙박하고 있는 것을 안 한 애국청년은 단신 칼을 품고 기습하여 15분내에 7명 전부를 살해하였다. (노동신문, 1949,4,3)
무장자위대는 조천, 함덕, 삼양, 외도, 한림, 저지, 고산, 애월, 성산, 안덕, 중문, 대청, 무릉 등 14개 경찰지서, 출장
소와 제주, 서귀경찰서를 비롯한 경찰, '서청(서북청년단)'의 숙사와 교형리들의 앞잡이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국민회, '독촉 국민회', '대동청년단'의 반동무리들과 악질관공리의 집, 행정기관들을 기습파괴하였으며 많은 경찰, 관공리 등 반동들을 체포하여 현지 인민재판에서 처단하였다. 그들은 이날 전투에서 경찰지서 2개소를 불태웠으며 경관 11명, 테로단 11명, 악질반동 10여 명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경관 4명, 반동분자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미국제 카빙총과 많은 탄약을 로획하였다. (노동신문,1948,8,29) 이것은 첫 무장봉기에서 철저히 무장한 적과 싸워서 얻은 제주도 인민들의 거대한 승리였다.
이 첫 봉기에는 500여 명의 인민무장자위대를 선두로 하고 로동자, 농민. 사무원, 어민, 해녀, 목동들과 학생 등 3,000
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칠순의 백발로인과 애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인 죤 메릴은 자기의 저서 "제주도 반란"에서 "4월3일 반란군의 주력은 500명 정도... 게릴라들이 하산하자 약 3,000명의 주민들이 가세했다."고 썼다. (사회와 사상, 서울한길사, 1989년 10월호, 366페이지)
원쑤들을 일시에 족쳐버린 제주도의 거리와 마을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들끓었으며 승리자들의 기세는 승천하였다. 각지에서 "매국단선단정을 절대 반대한다."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미제의 주구를 타도하라." "조선통일 만세!" 등의 구호를 들고 원쑤들의 죄행을 규탄하는 성토대회와 군중시위를 벌리었으며 인민대회들에서는 군중심판에 회부된 악질반동들을 처벌하였다. (주: 매국단선단정이란 매국적인 남한의 단일 정부와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라는 뜻)
이날 놈들이 받은 타격에 대해서 제주도 경무부장이란 자는 다음과 같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 피해상황을 찾아보면 경찰지서 습격 11개소, 테로 11건, 경찰관 피습 2건,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7명, 행방불명 4명, 경찰관 가족사망 1명, 관공리 사망 1명, 부상 2명, 량민(주:앞잡이) 사망 8명, 부상 30명, 전화절단 4개소, 방화 경찰관서 3개소, 량민가옥 6개소, 도로교통 파괴 9개소 등이다. (동아일보, 1948, 4,7)
봉기자들은 원쑤들에 대한 공격에서 얻은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4월4일에 다시 폭동을 일으켜 11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여러 명의 경찰과 반동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하여 재남조선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략칭 G-2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월3일에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경찰 사망 4, 부상 5, 행불 3, 우익 사망 4, 부상 16, 행불 4, 미국제 카빙총 6정, 일본
제 소총 1정, 탄약 119발 로획 당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