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나는 무얼 원했을까?
참된 것을 쫓는다고 공부를 한다지만
결국 부수적이고 현실적인 걱정을 해오는 우리의 지금...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갔을 당시
그의 출현에 입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비록 죄인이나 서울에서 벼슬자리에 있던 사람이니 찾아감은 당연할 터였다
그의 제자들로 인해 500여권의 책도 나올 수 있었으니
정약용 입장에서도 연구하고 좋았을 터였다
허나 그 젊은이들이 왜 그를 찾았을까?
살던 시골을 벗어나 입신양명을 꿈꾸었다
신분을 바꾸고 벼슬할 절호의 찬스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다산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원하는 것을 움켜쥐려고...
하지만 거기까지가 그들의 한계였다
다산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 현실상 벼슬하고 출세를 하려면
윗 사람에게 청탁을 해야했고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했다
당연히 귀양 간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리 만무했으며
들어준다 한들,
부탁받은 제자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았을 터였다
이에 대한 자괴감을 겪은 제자들은
우물에 몸을 던지기도 했고, 결국 그 제자들은 흩어졌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기도하며 매일 감사한 날을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의 안락을 바랄까?
언뜻 둘은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한끝차이가 있다
현실 속에서 ‘욕심’을 내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맘 같지 않아도 ‘감사’ 하며 지내는가?
감사할 때 현실에서 안정감을 찾고 해야 할 바를 하며
매일을 거룩하게 살 수 있을 터인데
우린 ‘나의 만족’ ‘나의 바람’ 이 채워지는 데 늘 굶주려 있다
내가 하고 있고, 사는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단순함이 필요하다
순수함이 필요하다
학생이면서 직장인이면서 학교나 직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교인이면서 교회를 사랑하기보다 이용하는 이가 있듯
우리가 이곳에 왜 있는 지부터 살펴야 내 삶이 편치 않을까?
정작 나는 무얼 원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