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영적 독서 및 묵상

2016. 10. 31. 오후 1: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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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 영적 독서 및 묵상자료 ☆☆

 

“부활 논쟁”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 27~38).

 

묵             상

 

 

레위기의 시대 배경은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왕정 아래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던 시대입니다. 당시 유다 땅을 다스리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왕은 유다 땅에 그리스인들의 사상과 풍습을 그대로 들여왔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마카베오 2서에 나오는 어머니와 일곱 명의 아들들은 돼지고기를 먹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고기는 하느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는 고기 중의 하나이며 (레위기 11), 돼지고기는 우상을 모시는 이방인의 제사에 제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목숨을 건지기보다는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함으로써 비록 지상에서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넷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 7,14). 부활에 대한 희망,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기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경에 형성된 유다교의 한 분파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인 귀족적인 사제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에 부활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내세보다는 현세에서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땅을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로마제국에 아부하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일곱 형제와 같이 산 여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헛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이 지상에서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주장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라고 선언하십니다. 시간상으로 부활의 삶은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삶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창조하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적 순서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죽음이라는 것 역시 영원하시며 지상과 천상 모두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적 공간적 개념으로는 이미 죽어서 사라진 이들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삶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투신과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배교냐, 순교냐 하는 결단의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하느님을 선택했고, 그분만을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부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마주한 고통 앞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당신만을 따르려 노력하는 나를 모른 채 하지 않으시고 부활의 삶을 허락해 주시리라는 믿음은 갖가지 고통으로 약해지려는 우리를 강하게 지켜주고 어려움에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삶을 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고 견디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 물도 먹을 것도 부족한 고통스러운 광야에서 40년을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주셨듯이, 어렵고 힘든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고통과 실패 속에서 절망하거나 세속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우리의 참된 이상이신 하느님께만 항상 희망을 두고 살아 갈 때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고재경 레오 신부 (광주대교구 꾸르실료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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