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바오로가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자, 사람들은 바오로를 헤르메스 신으로, 바르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여겼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은 한낱 인간일 따름이며 모든 힘은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유다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오해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1-26)
저의 부모님은 식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식당에서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손님이 한창 붐빌 때에는 텔레비전도 맘 편히 보지 못한 채 나가서 그릇을 치우고, 콩나물을 다듬거나 마늘을 빻아야 했습니다. 저희 집이 식당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데다가 친구들이 노는 시간에 일을 하려니 억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일한 것이 아니면서도 철없던 그때 저의 마음은 그러하였습니다.
철이 들면서 조금씩 나아지다가 특히 군대에 가서는 부모님의 처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입고 싶고 쉬고 싶은 것 다 참아 가며 매일 식당 일에 매달리며 고생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더 이상 부모님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식당 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한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뒤로는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신학생이 되어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부모님은 제게 일을 잘 시키지도 않았지만, 저는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일을 도와 드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아니, 부모님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지 못한 데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자연스럽게 지켜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명을 잘 지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에 얽매인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습니다
내 말을 지켜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