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29주일 (마태22,15-21 : 1데살로니카1,1-5 :이사45,4-6 1016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있나?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 숨을 쉬게 하셨으며 우주만물을 부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창세1-2장).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무엇을 돌려 드려야 할지 묵상하는 가운데 기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사랑만이 존재 합니다. 돈 같은 것은 한낱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남자는 그 편지를 받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편지 끝에 ‘추신’이 있었습니다. “오늘 겉치레가 다 떨어졌음.”
사랑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돈을 달라는 얘깁니까? 각자 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오늘 비로소 돈과 물질에 대한 애착이 다 떨어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았다면, 그 소유와 지배의 겉치레가 떨어졌다면 환영할 일인데, 속마음이‘야! 돈 떨어졌는데 돈 좀 주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소유와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2,21)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또 몸에다 무엇을 걸칠까’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12,31)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것을 앞세우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바르게살기를 촉구하시는 것이 늘 마음에 가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올가미를 씌워 코를 납작하게 할까 궁리했습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속마음을 감춘 채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마태22,16-17)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시고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태22,21)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이 말한 대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는 분”임을 참으로 믿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엉뚱한 질문을 하는 헛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유다인들은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는데 이는 일종의 주민세입니다. 그런데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이지 어떤지에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뽑힌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경멸하는 이민족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치욕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친일파가 있고 독립군도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아주 현실적이어서 엄연한 정치적 현실을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항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몹시 분개해 하면서도 마지못해서 세금을 냈습니다. 반면 혁명당원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절대로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현실파, 눈치파, 소신파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파일까요? 소신파가 되어야겠습니다. 파 종류 많죠? 대파, 실파, 양파, 쪽파.....본당신부파, 회장님파, 수녀님파..등등 파를 나누지 마십시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받으셨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께서 함정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요, 예수님의 측에서는 그 함정을 이용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것에서도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요한 2,25)이십니다. 만약,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라’ 고만 했다면 하느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열성파의 반대에 부딪치고,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찍히는 것입니다.‘세금을 바치지 마라’ 했으면 로마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되 황제에게 돌리고 있는 너는 도대체 누구의 것이냐? 너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피조물이 아니더냐?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을 얻은 네가 아니더냐?’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너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너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라. 황제에게는 그저 돈만 바치면 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관건이 되는 것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너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손희송)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아무리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해도 황제의 권리는 하느님의 권리 밑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일진대 내 것인 양 아귀다툼합니다. 먼저 황제에게 돌릴 것은 황제에게 돌려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릴 수 있으니 결국 육은 육이고, 영은 영입니다. 육적인 것을 떨쳐 버려야 영적인 것으로 가득 차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8,5-6). 이렇게 내 중심의 삶과 하느님 중심의 삶의 결과는 너무도 확연한데 그것을 알면서도 황제의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린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세상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능력도 재물도 다 하느님의 것이니 그분 마음에 꼭 들도록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오기에, 저희가 당신 손에서 받아 당신께 바쳤을 뿐입니다.”(1역대29,14).
우리가 바친 기도시간, 교무금, 봉헌금, 이웃사랑의 실천을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길 기대합니다. 나의 시간, 소유물, 재능, 능력, 힘, 탈란트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돌려드리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분의 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사용하는 가운데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연중 제29주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서공석 신부 강론- 10월 16일] 마태 22, 15-21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려라.'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세상의 정권이 하는 일과 종교가 하는 일의 영역이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헤로데파 사람들과 의논하여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울 계획이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대 유대아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조국과 동족을 배반하는 반역자로 비난받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로마 정권의 통치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정치범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모호한 말씀으로써 그들이 만든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지혜로웠다는 사실만 알아들으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지혜로운 분이고,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지극히 지혜로운 분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과 무관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 지혜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면서도 젊은 나이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말합니다. ‘진실하고 하느님의 일을 참되게 가르치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영특한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에 열중하였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재물로써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일신의 영광을 위해 권력을 지향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제사 의례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질곡(桎梏)에서 해방시켜,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수고하고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11, 28)가 전하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으로만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 나올 여지가 없는 질문입니다. 세금을 내어야 하느냐 혹은 내지 말아야 하느냐? 한 개를 선택하여 답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 앞에서도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여건에서도 하느님을 가까이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이’(2디모 4, 2)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길에서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며 접근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10, 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선은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준수와 성전 의례라는 좁은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 선함이라는 넓은 삶의 이야기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계십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수난사에 보면, 죽음을 앞두고도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당신을 죽이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루가 23, 34)라고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를 지배하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물러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 예수님의 이 행복 선언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된 우리의 마음,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로워진 우리의 마음, 기쁨과 쾌락의 추구에서 한 걸음 물러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의 일을 부족하게 누리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나빠서도 아니고, 먹고 마시는 일이 죄가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람으로 삼을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주신 생명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고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물질세계에 속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천 안에서만 체험되는 분입니다. 우리의 헌신적 봉사가 있는 곳에, 우리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이웃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는 우리의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런 나눔과 봉사가 삶의 보람으로 느껴질 때,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십니다. 이웃을 위해 기쁨이 되고,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과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이 베푸셨고, 그 삶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이 살아 있게 살아서 그분의 삶이 되게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 그리고 성당의 전례 안에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헌신하는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은 출가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苦行) 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자기 힘이 닿는 대로 자기 이웃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이해하고 봉사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런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서공석(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