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20일 금요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단식(斷食) (마태9,14-15)
제1독서<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이사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화답송시편51,3-4.5-6ㄱㄴ.18-19(◎19ㄴㄷ) ◎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이사58,1~9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6-9)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단식은 1년에 1회였다. 유다력으로 7월 1일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로서 모든 백성이 화제(火祭)를 드리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단식함으로써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날이었다(레위23,26-3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율법의 규정 외에도 그들 스스로가 필요에 따라 자주 단식일을 정하여 단식하곤 하였다(판관20,26; 1사무7,6; 31,13; 즈가8,18-19; 에스4,16). 더욱이 예루살렘 성(城)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이래로 그들은 무려 칠십년 동안이나 오월과 칠월에 날짜를 정해놓고 특별 단식을 했다(즈카7,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형식적인 단식은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시는 단식은 유다 백성이 전멸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테르를 위시하여 전 유다 백성이 행했던 단식(에스4,16), 이방 니느웨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의 선고를 듣고 했던 단식(요나3,5-10), 그리고 역시 하느님의 심판의 선고를 들은 아합이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했던 단식(1열왕21,27-29)등과 같은 회개가 동반된 진실한 단식이었다.
반면에 이사야 58장 3절에 제시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단식은 마치 이방인들이 자신의 자녀를 불살라드려 우상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조종하려 했듯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여 하느님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 의식적 행위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심령으로 통회하며 회개에 부합된 자세를 취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사57,15)을 깨닫지 못하였다.
죄에 대한 쓰라린 뉘우침과 진실한 삶의 변화를 지향함이 없이 하느님의 축복을 끌어내기 위한 단식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책망하셨다.
이사야 58장 6~7절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단식에 대한 세부사항을 살펴보면, 밥을 굶거나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이것은 혹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죄일에 하는 단식의 영원한 규정 (레위16,31; 23,26-32)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단식의 외적 규정을 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밥을 굶어 자신의 육체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본문에 제시된 것처럼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사랑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단식을 하는 목적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고 그의 자비를 구하기 위함인데, 자신은 정작 자신의 자비를 기대하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학대한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모습이며 그런 삶을 사는 자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사야 58장 6~7절에는 바른 단식을 하는 자가 지켜야 할 규범이 각각 네가지씩 나열되어 있다.
이사야서 58장 6절의 네가지는 한 마디로 '자유'이며 이사야서 58장 7절의 네 가지는'실천적 자비'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경험한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탈출20,2; 신명8,2~4; 예레29,10; 이사53,1~12; 55,1~7).
이사야서 58장 6절의 '불의한 결박'이란 주인 혹은 권세자가 종이나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채운 족쇄나 결박을 지칭한다. 그리고 '멍에'(mota; 모타)는 소나 나귀의 목에 지운 멍에 혹은 소의 코뚜레 같은 것으로서 사람이 힘있는 짐승을 몰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이사야는 이러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힘을 지닌 자가 힘 없는 자들, 곧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하는 비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다 생생하게 전한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르는 자들과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하는자들 사이에 서서 그것을 중단시키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억압받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레추침'(retsutsim)의 원형 '라차츠'(ratsats)는 원래 강한 타격을 가하여 산산조각으로 박살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권세자에게 압제와 학대를 당하고 삶의 모든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말한다(판관10,8; 2역대16,10; 아모4,1).
'자유롭게'에 해당하는 '호프쉼'(hopshim)이란 표현은 '펼치다','해방하다'등의 의미를 지닌 '하파쉬'(hapashi)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일반적으로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된 상태를 의미한다(탈출21,2).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구조적, 제도적 부조리로 얼룩져 있었고, 기득권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로 착취를 합리화하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부조리한 멍에를 벗겨내며 육체적 자유뿐 아니라 경제적 자유를 부여하는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라 지적하고 있다.
이사야서 58절 7절에서는 단식의 참된 정신 가운데서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열거법을 사용해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의식주라는 인간 생존을 위한 3대 필수 조건과 혈육(골육)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열거되고 있다.
'굶주린 이'는 영적인 의미 보다는 문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굶주인 이'에 해당하는 '라라에브'(laraeb)의 기본형 '라에브'(laeb)는 단지 한두끼 굶어 배고픈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여러 끼니를 걸러 배가 고파 쓰릴 정도가 되었음을 나타낸다(야고2,16).
'떠도는 이들'은 단순히 집이 없어 떠도는 가난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국가와 집을 잃고 떠돌며 방황하는 가난한 사람들 또는 부당한 채권 독촉 따위로 집을 전당잡혀 빼앗기고 쫓겨나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밤낮의 일교차가 심하고 간혹 사막의 모래 바람이 부는 집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일이므로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건져준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라는 말이 나온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돈이 없어서 옷을 사 입지 못하거나 또는 입고 있는 옷마저 빚을 갚지 못한 이유로 빼앗기는 일이 흔히 있었다(탈출22,26).
겉옷을 이불삼아 사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기는 날에는 잠을 잘 때 살을 에는 견딜 수 없는 추위를 근동 지방에서는 맞이해야 한다.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7)
본문은 가족 및 친척이 어려움을 당했을 경우 그것을 모른체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이 하느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일은 인간됨 자체를 포기한 것으로 당시에 흔히 자행되고 있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8)
마치 새벽의 태양빛이 온 땅에 자욱한 흑암을 순식간에 몰아내듯이 하느님의 축복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어둡고 고통스런 삶의 형편들을 뒤바꾸어주며 그야말로 광명한 삶, 복되고 은혜로운 충족한 삶이 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8)
여기서의 상처는 파괴된 인간관계나 무너진 성읍, 실제적인 질병을 의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신속히 그 모든 것을 권능으로 치유하시고 회복해 주신다.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8)
진실하게 단식을 행하는 자의 영적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행진할 때에 하느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을 호위해 주셨듯이 주님의 종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서 얻어진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이사53,11; 54,17) 어떠한 영적인 적들의 공격도 안전하게 막아낼 수 있는 영적 갑옷과 방패를 말한다.
'주님의 영광'이란 하느님의 위대함과 장엄하심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참된 단식을 실천하는 자들을 약탈자의 공격으로부터 막으시고 안전하게 지켜 준다는 의미로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9)
'네가 부르면'에 해당하는 단어 '레샤우아으'의 원형 '슈아으'(shuah)는 구약성경에서 21회 사용된 단어로서 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그 어려움을 탈피하기 위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부르짖는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나 여기 있다'에 해당하는 '힌네니'(hineni)는 '보라! 나를' 이라는 의미인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백성이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에 자신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자신을 내 보이시며 그에게 도움과 소망과 위로를 베푸신다는 뜻이다.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속죄의 날에 지키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공적으로 집단에서 지키거나 개인이 따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식은 의도하지 않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어긴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단식은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단식을 권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단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시지 않습니다(마태 6,16-1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3,2 참조).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혼인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라고 보셨습니다(이사 62,5 참조).
단식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치의 초대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삶은 비이성적인(irrational) 것이 아니라 이성에 지배되지 않는(nonrational)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한창현 모세 신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말씀을 주는 것이 하늘의 용서, 생명, 구원을 주는 것이다.
(이사58,1-9ㄴ)
1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 하느님의 백성(야곱 집안), 곧 믿는다는 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나? 그리고 그들의 악행, 죄악을 알리라 하신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깨달아라 하신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하여 망설이지 말고 소리내라. 하신다.
2ㄱ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 열심한 신앙의 모습이다. 매일미사, 매일 기도하는 모습이다.
2ㄴ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 아무리 열심한 신앙인이라도 하느님의 의로운 법규를 모르고 한다면 모두 헛된 것이다.
하느님의 의로운 법~
(탈출15,25)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쓴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에덴의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를 하나로 받는 것, 곧 선이 악(죄)을 대속해 생명을 주는 나무로, 그 구원의 나무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나무다. 그 십자가로 죄인이 거저 의로움이 되는 것, 하느님의 의로운 법규다.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그런데 야곱 집안, 믿는다는 이들, 그 하느님의 뜻을 갈망하는 이들이 정작 하느님의 의로운 법규, 계명, 곧 예수님의 대속 그 의로움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름, 명예,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악이다.
(아모5,14) 14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복음환호송>
= 구원을 위한 하늘의 의로움이 善이다. 그 십자가의 의로움을 헛되게 하는 것이 악행, 죄악이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렇게 헛된 열성을 부리면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 일꾼들, 곧 다른 신자들까지 힘들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 단식은 자신의 목숨을 위한 양식을 끊는 것이니,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곧 자신의 뜻, 욕망을 죽이는(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죽기로(버리기로)한 그 자신이 다른 이를 죽이려(이기려) 한다면 그것은 단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단식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이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형식, 행위의 단식은 싫다고 하신다.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 너희의 욕망, 의로움을 위한 단식이 아닌, 더러운 양심까지 모든 죄를 대속하신, 그래서 의로움을 거저 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라는 말씀이다. 그분이 죄인들의 생명,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요한6,38-39.51.63) 38 예수님께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말씀이 영이며 생명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 맞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아는)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잘 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은 육의 양식, 육의 옷을 주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영의 양식, 영의 옷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곧 양식은 말씀이 되어야 하고 집(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입혀)주어야 한다. 영의 옷- 말씀이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13,14)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으로 불의 한 결박, 멍에가 풀리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주는 것이 하늘의 생명, 구원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빛과 의로움의 삶이다.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마태6,33) 33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善)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오늘복음에서 (마태9,15)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신랑이 죽으면 단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에 죄가 드러날 뿐이다.(로마3,20)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대속,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이 그 율법을 끊는, 제사와 윤리의 그 인간의 의로움을 버리는 단식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로움을 거저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새 계약이다.
(히브10,9-10)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아멘)
= 첫 번째 것, 율법을 치우시고 두 번째 것, 새 계약을 세우신 것이다.
☨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선, 새 계약을 갈망하게 해 주소서, 저희 모두가 의탁합니다.~아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마태9,14~15)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5ㄴ~ㄹ)
혼인 잔치 집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그래서 혼인 잔치 집 손님들이 상징하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신랑으로 오신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지 슬퍼하며 단식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새 한글 성경이 '혼인 잔치 손님들'로 번역한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hoi hyoi tou nymphonos; the guests ot the bridgegroom)은 직역하면 '신부 집의 아들들'(the sons of the bride room)인데, 다른 사본은 '신부 집의 아이들'(the children of the bride chamber) 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이들이 잠시 왔다 돌아가는 손님들이 아니라, 혼인 집, 즉 하느님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신랑이 있는 동안에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혼인 잔치 집의 아이들로 비유하신 것이다.
혼인은 기쁜 일이기 때문에 슬픔과 애곡을 나타내는 단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단식일인 월요일이나 목요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날이 혼인 예식 기간 중이면 단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혼인의 기쁨이 단식으로 말미암아 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신랑이 빼앗길 날'에는 제자들도 단식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신랑이 빼앗길 날'에 해당하는 '헤메라이 호탄 아파르테 아프 아우톤 호 뉨피오스' (hemerai hotan aparthe ap' auton ho nymphios; when the bridegroom will be taken from them)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여기 '빼앗길'에 해당하는 '아파르테'(aparthe; will be taken)는 '~로 부터'(from)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아포'(apo)와 '들어 올리다', '가져 가다'는 뜻이 있는 '아이로'(airo)의 합성어인 '아파이로'(apairo)의 가정법 부정 과거이다. 여기서 부정 과거(aorist)가 쓰인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을 읽었던 초대 교회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였으므로, 이 단어의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A.D. 100년경에 쓰인 '12사도의 가르침', 즉 '디다케'(didache)를 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사이들이 단식했던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의 가르침대로 단식이 시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자신의 스승이 감옥에 갇히고 죽은 인간적인 슬픔으로 말미암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했던 단식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단식은 단지 예수님을 잃은 인간적인 슬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는 단식 이라는 점에서 다른 것이다.
2026년 02월 20일 금요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오늘 화답송은 참된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실 회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뜻밖에도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 죄송해서 고해성사조차 볼 수 없다.”라는 말 속에는, 참된 뉘우침보다는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녀가 죄책감과 당혹감에 휩싸여 집을 뛰쳐나갔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돌아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부모님이 나를 받아 주실 리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가로막지만, 정작 부모는 마음이 상하였을지언정 자녀를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사랑하고 기다립니다.
이런 끝없는 자책이 과연 부모에 대한 참된 미안함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자책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으로 상황을 통제하려는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책을 속죄로 착각하지만, 사랑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해명이나 보상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전하는 단식(斷食)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단식은 그저 ‘보여 주기 위한’ 행위도 아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이 정도 뉘우치면 되겠지.” 하는 식의 거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단식하여 남겨 둔 것을 기꺼이 필요한 이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랑의 실천, 곧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여러 결심에 앞서, 오늘 복음 환호송을 마음에 깊이 새겨 봅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날마다 죄(罪)짓는 착한신앙(信仰)?
복음(마태9,13-15)
13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희생제물, 곧 죄의 용서를 위한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그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그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이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율법의 제사는 하느님의 외아들(獨生子) 예수께서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그들의 죄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시고, 죄의 용서가 “다 이루어졌다” 하신 그 새 계약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죄인인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가 없어져 구원 받은 것이기에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 은혜, 자비다. 그러니 자신이 의인이라 생각하는 이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갈라5,4)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율법의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율법의 단식을 고집’하며 따지는 모습이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길 날, 곧 예수님께서 *손님들(제자들)의 죄로 십자가에서 죽는 그 새 계약이 이루어지는 날, 그때에 율법의 단식, 그 옛 계약의 행위를 단식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히브10,14-18 참조)
독서(이사58,1-9)
야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 날마다, 열심한 신자의 모습이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 소원을 위해 날마다 하느님을 찾으며 단식, 고행을 하며 갈망하는 그 속셈을, 악이라 하시는 것이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 다른 이와 싸워 이기려는, 곧 자기를 높이려고 다른 이를 판단, 단죄하는 일이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 육(肉)의 단식, 육적행위의 단식을 말한다.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 율법으로 죄에 묶여 자유를 누려야 할 신앙이, 오히려 ‘무거운 짐으로 옭아매는 멍에’가 되는 것이다.
(1코린15,56) 56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 그 율법의 계약의 행위를 단식(끊게)하게 하는 하늘의 대속(代贖), 그 새 계약으로 율법의 행위를 부수고 자유롭게 하는 것, 단식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새 계약은 구약에서 부터 이미 약속된 것이다.(예레31,31~) 곧 하늘의 용서, 구원을 주는 그 이웃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마음)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영적 양식인 말씀과 함께 육적 양식도 나누는 형제애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사랑을 아는, 믿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형제애라는 것이다.
(2베드1,7)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내 죄의 용서, 자유, 이기적 신앙에서 이웃의 죄의 용서, 자유도 돌볼줄 아는 신앙인이 되게하소서.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구원의 완성인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의(義)”의 살믈 날마다 살게 하소서. 힘을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