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14일 토요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일곱 개의 빵 (마르8,1-10)
제1독서<예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1열왕12,26-32; 13,33-34)
26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27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28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29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30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31 임금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의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32 예로보암은 여덟째 달 열닷샛날을 유다에서 지내는 축제처럼 축제일로 정하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렇게 그는 베텔에서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기가 만든 산당의 사제들을 베텔에 세웠다.
13,33 예로보암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또다시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산당의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직무를 맡겨 산당의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34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화답송>시편106,6-7ㄱ.19-20.21-22(◎4ㄱ) ◎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 조상들처럼 저희도 죄를 지었나이다. 불의를 저지르고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저희 조상들은 이집트에서 당신의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
○ 그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붙이로 만든 우상에 경배하였네.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그들의 영광을 맞바꾸었네. ◎
○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
복음<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1열왕12,26-32; 13,33-34)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27)
오늘 독서 본문은 북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예로보암의 불신앙적 생각을 보여준다.
"내가 너를 데려다가 네가 원하는 모든 지역을 다스리게 하리니,너는 이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다. 네가 만일 나의 종 다윗이 한 것처럼 내가 명령하는 바를 모두 귀담아듣고,나의 길을 걸으며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고 내 규정과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또한 내가 다윗에게 세워 준 것처럼 너에게도 굳건한 집안을 세워 주고, 이스라엘을 너에게 주겠다."(1열왕 11, 37-38)
여기서 "다윗 집안" 의 '집'은 '왕조'(2사무7,11)를 지칭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예로보암에게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에게도 다윗과 같이 견고한 집을 세워주실 거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예로보암은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후 자신을 배반하고, 다시 다윗 왕조의 계승자인 르하브암을 왕으로 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자신이 왕이 된 모든 과정을 철저히 인간적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세우심을 통해 왕이 되고도 하느님을 거부했던 예로보암의 집안은 결국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 그 아들대에 이르러 몰락하고, 왕위는 다른 가문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14,10-18) 예로보암은 자신이 현재 다스리고 있는 북부 이스라엘 왕국에 속한 백성들의 행보에 대단히 초조해 했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 갔다가" (27)
여기서 '제사', '제물' (창세31,54 ; 에제39,17)을 의미하는 '제바흐' (zebah)의 복수형은 각종 절기에 드려지는 모든 종류의 제사와 제물을 아우르는 단어이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세 번, 즉 무교절, 수확절(추수감사절,오순절,맥추절 ; 가나안 땅에 이주하여 첫 농사를 짓고 수확한 것을 감사의 제물로 봉헌), 추수절(장막절, 초막절 ; 40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을 지켜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탈출 23,14-17), 오직 하느님께서 택하신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했다.(신명12,11.13.14)
즉 예로보암은 이렇게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면, 결국 그들의 마음이 다윗 왕조로 기울어 질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이다. 예배의 장소 예루살렘은, 남부 유다 왕국의 수도일 뿐 아니라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예로보암은 이러한 장소에 자신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하러 일년에 세 번씩 가다보면, 분명 마음이 르하브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로보암의 판단은 인각적인 생각이요, 일종의 열등감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는 하느님의 약속(11,38)을 받은 자로서, 그 약속을 신뢰함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는, 그의 생각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의 집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왕조의 견고함을 보장하는 축복의 통로였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대한 그의 태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의 왕조에 대한 축복을 판가름 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로보암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를 막는 잘못된 종교정책을 수행하여 그의 불신앙을 드러냄으로 하느님의 축복과 멀어지게 되었고, 그의 왕조 역시 제대로 세워지지도 못한 채, 그 아들대에서 피비린내 나는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예루살렘 성전이 북부 이스라엘에 비해 남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다'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지리적 여건에 의한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예루살렘이 비록 남쪽에 있었지만, 대략 해발 700m 에 해당하는 고지대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루카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실 때, 예루살렘보다 예리코가 북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리로 내려갔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고지대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보다 예루살렘의 수위성을 드러내는 표현에 더 가깝다.
즉 당시 예루살렘에는 신앙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이 다른 도시들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27)
여기서 '자기들의 주군'이라는 표현은, 아직도 북부 이스라엘 백성의 통치자가 르하브암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아직도 예로보암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느님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왕이라는 생각을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예로보암은 자신이 왕이 된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북부 이스라엘 지파들이 본래 자기들의 주권자였던 르하브암에 대하여 반감을 가져 생겨난 결과라고 생각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처럼 예로보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상황을, 오로지 인간적 측면에서만 이해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왕권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해 불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유다 임금 르하브암" 이란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북부 이스라엘 왕 예로보암이 남부 유다 왕 르하브암을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 역사의 주관자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바라볼 경우 늘 분안함에 떨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계약(언약)을 굳게 붙잡는 자는 흔들리는 불안한 현실 앞에서도,변함없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히브11,1-38참조)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28-30)
12장 28절에서 33절까지는, 예로보암이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즉 민심의 이반을 막고 왕국의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하여, 악한 종교정책을 시행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임금은 궁리끝에' 라는 말은 예로보암 자신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예로보암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도모하는데, 이는 결국 그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인본주의적 인물임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
It is too much for you to go up to Jerusalem.
사실 예루살렘은 북부 이스라엘로부터 매우 멀었고, 높은 산악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율법이 정한대로 일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탈출23,14-17)은 매우 고되고 힘겨울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예로보암의 제안은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북부 지파 사람들에게는충분한 공감을 얻을만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행위라는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장소, 즉 중앙 성소에서만 제사를 드릴 것을 명하셨다.(신명12,11.13.14)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29)
출애굽 당시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대로 금으로 된 송아지 형상을 만든 후, 그들에게 했던 말과 동일한 말이 나온다.(탈출32,4) 이처럼 송아지 형상을 보고 하느님이라 말한 이유는, 이교도처럼 송아지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송아지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탈출20,4)
예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둔 장소를 소개하고 있다.
'베텔'(bethel)은 '집'(1사무1,7)이란 뜻을 가진 '빠이트'(bait)에 '하느님'(창세14,18)을 뜻하는 '엘'(El)이 결합된 헝태로,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북부 이스라엘의 최남단 즉 남부 유다와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
베텔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단을 쌓았던 유서 깊은 곳이며(창세12,8 ; 38,11.19), 판관시대에는 계약궤가 머물기도 했고(판관20,26), 사무엘 시대에는 사무엘이 해마다 순회하는 장소 중 하나로 종교의 중심지를 이루기도 했다.(1사무7,16 ; 10,3)
또한 '단' (dan)은 '심판하다'(창세47,16), '다스리다'(즈카3,7)라는 뜻을 가진 '띤'(din)에서 유래했다. 이곳은 북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던 성읍으로, 초기에는 '레셈'(여호19,47), 혹은 '라이스'(판관18,29)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단은 판관시대에는 그 자체의 신당과 사제를 소유했던 곳으로서, 사제직이 모세의 후손들에 의해 이어져 가고 있었다.(판관19,30.31) 즉 단은 과거로부터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도시였다.
이처럼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을 북부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로 특별히 택한 이유는 이곳이 종교적으로 유래가 깊은 성읍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두 곳을 예배의 장소로 지정하여, 백성들이 편리한 대로 선택하여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했는데, 이것은 예로보암이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 효율성과 편리성만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이 일이 죄가 되었다." (30)
'이 일'은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아닌 그곳에서 제사드리게 한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탈출20,4)과 택하신 장소에서만 제사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2,5)을 정면으로 어긴 대단히 중대한 범죄였다.
'죄가'로 번역된 '레핫타트'(lehatath)는 '표적을 빗맞추다', '길을 잃다' 라는 뜻을 지닌 '하타'(hata)에서 유래된 명사로, '죄'(예레4,3), '죄악'(이사5,18)이라는 뜻을 가진 '핫티아'(hatah)에 '~에게'라는 뜻을 가진 불분리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단어는, 아벨을 죽인 카인의 행위(창세4,7), 소돔과 고모라에 범람한 죄악인 음란(창세8,22)과 일반적으로 책임이 따르는 사회에서의 제반 악한 행위들을 가리킬 때에도(민수5,6)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문처럼 우상 숭배와 연계되어 사용되면, 이는 하느님의 강한 분노와 질투를 유발시키는 강렬한 죄악, 심지어 하느님께서 이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멸하기로 결심하실 정도로 가장 크게 노하시는 죄악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탈출32,32)
"임금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의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예로보암은 여덟째 달 열닷새날을 유다에서 지내는 축제처럼 축제일로 정하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쳤다."(32)
예로보암의 죄악들이 계속 기술된다. 예로보암이 지은 것으로 기술되는 '산당'(bait bama ; 바이트 바마)에서, '빠마'는 높은 곳(아모4,13)이란 뜻을 가지므로,문자적으로는 '높은 곳에 있는 집'이다.
이것은 예배를 위해 야외에 마련된 성소로서, 산 위에(11,7 ; 2열왕16,4) 뿐만 아니라 성읍들(13,32)과 골짜기에도(예레7,31 ; 에제6,3)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산당은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중앙 성소의 원리를 훼손시킬 뿐 아니라(신명12,1-14), 종교 혼합주의의 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를 금하셨다. (신명12,2-4)
또한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함으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사제제도까지 짓밟았다. 율법에서는 오로지 레위지파의 아론 자손만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탈출28,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로보함은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제로 받아 주었다.
예로보암은 정통성을 지닌 레위지파 사제들을 모두 그 직분에서 해임하고(2역대11,13.14), 하느님의 율법에 무지하고 자기의 종교정책에 동조하는 자들로 그 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이러한 예로보암의 종교정책에 따라,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더욱 우민화되어, 계속해서 잘못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축제'로 번역된 '하그'(hag)는 '절기'(탈출10,9 ; 신명16,10 ; 2역대5,3)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보다 특수하게는 순례자들이 지키는 절기를 지칭한다. 그런데 예로보암은 '유다에서 지내는 축제처럼 축제일'로 정한다.
'하그'란 말은 무교절(신명16,16)이나 주간절(신명16,10 ; 수확절, 추수감사절, 맥추절, 초실절)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되지만, 여기서 '유다의 절기'란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축제 절기인 장막절(초막절, 추수절 ; 8,2 ; 레위23,23-26)을 가리킨다.
율법에는 장막절은 그 정해진 날짜를 따라 7월 15일에 지켜야 했다. 그러나 예로보암은 이를 무시하고, 그로부터 한달 후인 8월 15일(여덟째 달 열다샛날)로 정했다. 예로보암이 다른 절기에 비해,장막절의 날짜를 이처럼 연기했던 이유는 종교적인 제의는 모방하면서, 백성들의 현실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7월 15일부터 시작되는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추수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 끝나갈 무렵 다시 장막절이 시작됨으로 인해 적잖은 부담이 있었다.
예로보암은 하느님의 율법에 따른 전통적인 장막절의 시기를 한달 늦춤으로써, 남부 유다의 종교와 차별성을 보이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함으로, 백성들의 시각에는 더 나아 보일만한 나름대로의 완벽한 종교 체계를 갖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이같은 예로보암의 결정 자체가, 인간적 편의가 아닌 하느님에 의해서 제정되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이라는 신적 기원과 거룩함을 무시하는망령된 처사로 평가되는 것이다.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빵을 먹이시는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에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마르코 복음 6장 30-44절에, 다른 한 번은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 8장 1-10절에 나옵니다.
거의 동일한 구성의 이야기지만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빵을 먹은 군중은 유다인들이고, 두 번째 이야기의 군중은 이방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셨던 은혜로운 기적을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비는 어느 특정한 이들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신학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입니다.
보통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기적을 베푸시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 먼저 무엇인가를 해 주시고자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의 험난한 신앙 여정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크십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걷는 길에서 겪게 될 유혹들 때문에 지치지는 않을까, 혹여나 그 길에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영적 음식을 마련하시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입니다.
스스로 빵이 되시어 이를 먹는 모든 이의 여정에 함께하시며 힘이 되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천국 식당에서 땅의 음식을 찾지는 않는지요?
(마르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 앞 7장 36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늘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그 귀먹고 말 더듬는 그 헛된 신앙을 사는 이의 구원의 치유를~ 육의 치유, 기적의 예수님으로 말하지 말라 하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치유, 기적의 소문으로 널리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기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왔으니, 그들의 입(뜻)에 맞는 양식도 또 구원을 위한 하늘의 양식도 먹지 못하는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 사흘- 숫자 3은 하늘을 뜻합니다. 그 하늘을 살면서 땅의 것만 찾으니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 광야는 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신명8,3참조) 제자들 역시 영을 위한 말씀 양식이 아닌 육을 위한 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 6장에서 경험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그 의미, 표징(기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임을 보라 하십니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6장에서는 보리빵 다섯 개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리빵은 부정한 빵이었습니다.(민수5,15 에제4,12 참조) 그 부정한 빵을 예수께서 받으시고 대신 깨끗한 새로운 빵(말씀)으로 바꾸어 주셔서 오천명을 살리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목숨과 바꾸셨던 것입니다.
그 새로운 빵, 성찬례에서 내 몸이라 하셨던 예수님의 몸, 구원의 새 계약의 빵입니다.(루카22,20참조)
부정한 빵 그 부정함을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부정한 자가 되시어 대신 죽으시고 깨끗한 빵, 새 생명의 빵, 그리스도의 몸으로 내주신 새 계약의 빵입니다. 새롭고 완전한 빵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충만 그 안식(7)의 빵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이미 그 안식의 빵, 그 일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일곱의 의미, 그 보물, 안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그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도 안식을 깨닫지 못해 그 쉼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도 굶고 있었던 군중이나 제자들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 면서도~ 예수님의 대속, 그 진리가 주는 용서를 믿지 못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그 쉼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자신들이 땅의 본질임을 깨닫고 하늘의 것을 받을 준비를 하라. 입니다. 땅은 하늘을 받아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새 계약의 빵, 그 하늘의 빵-일곱(7)을 다시 주십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7) 바구니나 되었다.
= 다시 받은 일곱-안식입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 사천(4000= 4ⅹ1000)- 사(4)- 동서남북. 춘하추동, 그 사각, 땅의 숫자입니다. 다시 받은 일곱으로 사각의 완성, 땅의 완성- 구원입니다.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 달마누타- 과부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마가단(탑)으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그 대속을 믿지 못해 용서, 그 쉼(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그 안식이신 예수님(신랑)과 짝하지 못하는 과부, 그래서 자신의 힘(빵)으로 헛된 신앙의 탑을 쌓는 그곳에 쉼, 안식(7)의 빵(말씀)을 다시 주시러 가십니다.
예수님으로 신앙을 산다 하면서 죄의 용서 그 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 나를 찾아오십니다.
♡ 아멘 -*^ㅇ^*-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복음(마르8,1~10)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6)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7)
제자들이 제시한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많고 적다'는 식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사천 명가량의 군중을 먹이실 준비를 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시므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기에 양(量)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앉으라고'로 번역된 '아나페세인'(anapesein; to sit down)의 원형 '아나핍토'(anapipto)는 상체를 뒤로 젖혀 기대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요한13,25).
이 동사는 유대인들이 식사하는 몸의 자세를 기술하는 전문 용어이다. 유대인들은 보통 한쪽 팔을 바닥에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땅'에 해당하는 '테스 게스'(tes ges; the ground)라는 것은 풀이 돋지 않은 황량한 지대임을 나타내며,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에서 솟은 물을 먹이신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감사를 드리신'에 해당하는 '유카리스테사스'(euchasristesas; gave thanks)의 원형 '유카리스테오'(euchasristeo)는 '좋은', '잘'을 의미하는 접두어 '유'(eu)와 '~에게 은혜를 베풀다'는 뜻을 지닌 동사 '카리조마이'(charizomai)의 합성어로서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감사하다'는 뜻이다(요한11,41).
이 동사는 유대인들이 절기 음식을 먹을 때나 일반 식사 자리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행위를 묘사하는 단어로 쓰인다.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 8장 6절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음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장면이다.
한편,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물고기는 정확히 '두 마리'였다(마르6,41).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 들려진 생선의 숫자는 몇 마리인지 정확하지 않고, 크기도 작다.
여기서 '작은 물고기'로 번역된 '익튀디아'(ichthydia; small fish)의 원형 '익튀디온'(ichthydion)은 본문과 마태오 복음 15장 34절의 병행 구절에만 나온다.
이것은 '물고기'(fish)를 뜻하는 명사 '익튀스'(ichthys; 마르6,41)의 지극히 작은 것을 표기하는 단어로서,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크기가 작은 물고기를 뜻한다.
그리고 '몇 마리'로 번역된 '올리가'(oliga; a few)의 기본형 '올리고스'(oligos)는 수나 규모가 '작은', 혹은 양이 '적은', 정도가 '약간이거나 사소한' 등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본문에서 셀 수 있는 수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여서 적어도 두 마리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본다.
마르코 복음 8장 7절의 '축복하신'에 해당하는 '율로게사스'(eulogesas; be blessed)의 원형 '율로게오'(eulogeo)는 '좋은', '잘' 이란 뜻이 있는 접두어 '유'(eu)와 '말하다'는 뜻이 있는 '레고'(lego)의 합성어로서 '좋게 말하다'는 뜻이 있지만, '찬송하다', '찬미(찬양)하다' (마태23,39; 마르11,9; 루카2,28)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6절에 나오는 '감사를 드리신'에 해당하는 '유카리스테오'(euchasriteo)가 주로 '감사하다'는 뜻을 갖는 것과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이것은 감사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양까지 드렸음을 보여 준다.
2026년 02월 14일 토요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가량을 먹이신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거침없는 능력에 놀라고, 다시 한번 그 능력에 기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복음 이야기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와 능력 자체를 크게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또한 그분께서는 신이셔서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수긍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지금의 ‘나’에게도 미친다는 사실, 곧 나도 그 사천 명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먼저 군중의 배고픔을 알아채시지만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 8,4)라고 대답합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반응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태도에서 믿음의 문턱이 생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현실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총은 곱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어놓을 때만, 주님의 은총이 곱해져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 눈에 하찮아 보이는 작은 노력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무시하시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다시 말하여 0에는 무엇을 곱해도 결과가 0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결심해 봅니다. 단 한 가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기도 한 번, 용서 한 번, 감사 한 번, 작지만 끈기 있는 그 시도들이 결국 일곱 바구니의 결실로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이미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생명의 빵
*히브리어에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숫자가 있다. 그래서 셔성경의 숫자는 어떤 뜻을 말한다. 오늘 복음의 이해를 위해 숫자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야한다.
숫자3(사흘)은, 성부 성자 성령, 그 하늘을 뜻한다, 또한 창조 사흗날(3)의 땅을 위해, 곧 흙인 인간들을 위한 씨의 희생, 죽음을 말하고(창세1,11) 그 씨는 모든 죄인(땅)들의 구원을 위한 사흗날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을 모형한 것이다.(마태20,28) 그래서 사흗날(3)을 3의 죽음, 씨의 죽음, 신의 죽음 이라고도 한다.
그 씨(신)의 죽음, 그 희생의 사랑으로 땅(4)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고, 그 하늘의 대속, 그 영원한 사랑으로 땅의 존재들이 하느님의 쉼(자유,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식의 숫자가 7이다.(창세2,2참조)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 십자가(十字架)다. 그 십자가의 예수님과 짝하여 하나, 한 몸이 되어 받는 구원이다. 곧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옜 계약을 대속으로 십자가에서 완성하시고 하늘의 영원한 용서, 생명을 주시는 새 계약으로 받는다.
성경(聖經)에는 그 새 계약의 예수 그리스도만 기록되어있다.(루가24,27.44-45 등) 그리고 그 새계약은 인간의 지각으로 알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큰 하느님의 지혜, 능력, 힘이다. 길이(長)와 높이(高)와 넓이(廣)를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 하늘 양식, 곧 생명인 말씀을 먹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약속)으로 산다” 하신 것이다.(신명8,1-3 마태4,4 참조)
앞 7장 마지막 절에서 그 하늘의 양식을 먹지 못한, 곧 ‘영(靈)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그저 육(肉)을 치유하는 큰 분으로 놀라워하는 헛된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영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깨닫지(믿지) 못해 자신의 생명 주인으로 짝하지 못한 그들(과부)이 다시 모인 것이다.
복음(마르8,1-10)
1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다시 내려주려 하신다. 가여워서....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 문자대로 보면 말씀이 좀 어색하다. “사흘 동안이나 머물렀으니 그들이 사가지고 온 음식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해야 맞다. 문자 안에 예수님의 숨은 뜻을 찾자면 ”사흘 동안, 사흘의 양식을 위해 주님 곁에 머물렀는데 그 사흘의 양식 곧 하늘의 대속, 그 새 계약의 말씀을 구원의 양식으로 먹지 못하고 있구나!“ 하신 말씀이다.
성당을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代贖), 그리스도의 피의 새 계약으로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해지는, 그래서 죄에서 자유, 쉼, 안식을 누리는가?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육(肉)의 양식인 빵 걱정이다. 모두 광야에 있다. 그 광야에서는 신명기(8,1~)에서 말씀 하셨듯이 하느님의 말씀만이 필요한 것이며,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요한1,14 1코린1,24참조)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앞6장 오병이어(五餠二魚)에서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기득 찼었다. 숫자5는 모세오경(율법)을, 숫자2는 선(善)과 악(惡), 인간의 두마음을, 그 모두 죽음을 부르는 불완전, 부정한 숫자다.(로마3,20참조)
그 죽음의 음식을 예수님께서 다 받으시고(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을 양식으로 바꾸어 먹이심으로 열둘(12), 곧 하늘의 백성으로 살리셨다. 숫자 12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뜻하는데, 구약(舊約)의 12아들, 12지파. 신약(新約)의 12사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겨 용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을 때 죄에서 자유, 쉼, 안식(7)이 오는 것이고, 그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이미 받아 갖고 있었던 7개의 빵(안식), 곧 완성된 안식(7)을 이미 받아 갖고는 있었지만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완성된 빵은 6장의 오병이어 때에 이미 받은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라 하신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4)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곱 바구니나 되었다.
= 완성의 일곱(7, 안식)으로 시작하셔서 완성의 일곱(7, 안식)으로 마치신다. 앞 6장에서는 숫자 5. 2. 곧 죽음으로 시작 하셔서 숫자 12. 곧 완성된 구원으로 마치셨다. 무엇이 다른가? 오늘 8장은 앞 6장‘오병이어’에서 완성된 빵(안식)을 받아 갖고 있었음을 깨달아 그 안식을 누리도록 다시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6장에서 푸른 풀밭에 앉게 하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새 계약이신 예수님으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생기를 잃지 않고 쉼(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희망으로 주시기 위한 것이었고(시편23,1-4참조),
본문 8장에 땅에 앉게 하신 것은 땅(흙)의 그 없음의 존재인 너희들이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새 계약인 예수님으로 이미 있음의 존재, 하늘이 되었음을, 하늘의 안식이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9 사람들은 사천(4,000)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사천(4,000)은 4. 40. 400.과 함께 땅을 뜻한다. 그라니까 땅(흙)인 사람이 하늘의 대속(새 계약)으로 하늘의 안식(쉼,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 ‘달마누타’는 과부(寡婦)라는 뜻이다. 영(靈)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육(肉)을 치유하시는 큰 분으로 놀라워하는, 그래서 예수님을 안식(7)을 주시는 영혼의 구원자로 깨닫지(믿지) 못해, 그분을 짝으로 남편으로 하나 되지 못한 그 과부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6장의 오병이어의 표징은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을 위한 말씀이고, 본 8장의 표징은 이방인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같은 표징, 사건으로만 보면 이미 받은 용서, 자유, 쉼, 안식(7)을 놓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어지는 말씀의 맥락, 흐름을 봐야 하느님(예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알 수 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말씀을 당신의 이끄심, 지혜없이 어찌 깨닫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 귀와 마음을 열어 당신의 귀와 마음을 주소서 저희 모든 이들이 간절히 기도,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