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월요일]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 (마르8,11-13)

2026. 2. 14. 오후 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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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6일 월요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 (마르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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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1,1-11)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9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10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화답송>시편119,67.68.71.72.75.76(77) 주님, 당신 자비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

고통을 겪기 전에는 제가 잘못했으나, 이제는 당신 말씀을 따르나이다.

당신은 좋으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고통을 겪은 것, 제게는 좋은 일, 당신 법령을 배웠나이다.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주님, 당신 법규가 의로움을 저는 아나이다. 고통을 겪어도 저는 마땅하옵니다.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자애를 베푸시어 저를 위로하소서.

 

복음<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8,11-13)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야고1,1~11)

 

4세기초 에우세비우스는 바오로 서간에 이어지는 서간 일곱개, 곧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1,2,3서, 그리고 유다서 가톨릭 서간이라 불렀다. 

여기서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서간들이 어느 특정한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에 보내졌다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전형적인 권고서한에 속한다. 명령형 동사가 자주 쓰인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서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이신득의 ; 以信得義)와 달리 행동(실천)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에 M. Luther는 이 서간을 다른 신약성경 책들과 비교하면서 "복음적 특성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지푸라기 같은 서간" 이라고 깎아 내렸고,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 개신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질이 낮은 경전으로 평가하였다.

 

19세기의 역사 비평가들 이 서간을 초대 교회 안에서 서로 대립하던 두 경향,  바오로적인 경향과 유다교적인 경향 사이의 절충을 시도한 문헌으로 보았다.

가톨릭에서는 주로 병자성사의 근거를 제시하고(5,14-15),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2,14-26) 이 서간을 이용하였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야고보서의 집필 목적을 연구하면서부터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야고보서가 집필되던 당시 교회 상황이 사도 바오로가 믿음을 통해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이 교회내에 편만한 상태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개신교 성도들이 그 '믿음으로서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복음을 관념론으로 변질시켜 믿음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신앙 행위와 분리시켜 버렸다고 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출이다.

사람이 운동을 많이 하면 땀을 흘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앙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본다.

 

특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동'(행함, 실천)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 '에르곤'(ergon)이 바오로 서간 중 테살로니카 전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행위' 표현할 때도 쓰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거기에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당연히 그 믿음으로부터 '에르곤'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따라서 '이신득의'를 말하는 바오로의 사상과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칭의' ; 야고 2,24)을 말하는 야고보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야고보의 사상이 그 뿌리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어쨌든 야고보서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과  내용을 지닌 만큼 독립적으로 다루는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야고보서의 내용은 결코 가볍거나 진부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만큼 사회의식 뚜렷한 경전도 없을 것이다. 이 서간이 초대교회에서 정경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도 사도적 기원의 취약성 때문이지 결코 그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1,1)

 

여기서 야고보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인 제배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 <장(長)야고보 ; 마르1,19>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차(次)야고보 ; 마르3,13>인가? 그도 아니면 나중에 교회 전승에서 밝힌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원로단의 대표가 된 야고보(사도12,17 ; 15,13 ; 1코린15,7 ; 갈라1,19 ; 2,9.12)인가?

 

야고보서가 저자로 내세운 이 이물은 마지막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는 A.D.44년에 순교하였고(사도12,1-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세번째로 거론하는 야고보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다(마르6,3 ; 마태13,55).

 

고대의 테르풀리아누스는 신약 성경의 기록만 가지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마리아와 요셉이 첫 아들 예수님 다음에 낳은 아들들, 곧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성모님과 성요셉의 (평생)동정을 부정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야고보를 주님의 사촌으로 여겼던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 견해에 따라 그들을 예수님의 사촌 육촌 팔촌등 가까운 친척으로 본다.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열두 사도단과 구별되었다(사도1,13-14 ; 1코린15,5.7).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열두 사도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도로 통한다(1코린15,7 ; 갈라1,19).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동반하지 않고 다른 친척들과 함께 나자렛에서 머물러 있었다(마르3,21.31-32 ; 6,1-4).

 

그러나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만큼 그분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고(1코린15,7), 그 뒤 예루살렘 모교회가 창립될 때 원로단의 대표가 되었다(갈라2,9 ; 사도12,17 ; 15,13-22 ; 21,18).

 

야고보는 A.D. 60년대 초에 순교하였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 총독이 없는 틈을 타 대사제 아나누스 2세가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메시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율법 위반자로 몰아붙여 돌로 쳐 죽였다(유다 고대사 20,9.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야고보서는 저자가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서간이다. 

그리고 이 서간에 인용된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이다. 아마도 저자는 야고보의 제자이거나 추종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후대에 알리고자 했던 인물일 것이다.

 

그 다음 이 서간의 인사말에서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는 누구를 말하는가?

본문에서 '흩어져'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 '~을 통해 널리', '쪼개고 들어가는', '관통하는' 이라는 의미의 전치사 '디아'(dia)와 '흩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페리오'(sperio)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분산', '흩어진 자'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신약성경에서는 세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요한7,35 ; 1베드1,1).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 뒤에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신앙을 지키며 흩어져 살아왔던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본문에서 팔레스티나 밖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유다인들이라는 의미보다는 초대 교회 당시에 신앙의 박해로 인해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교인들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사실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 밖으로 흩어졌으며(사도8,1),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고보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로마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본 서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4)

 

'시련'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스모이스'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heirasmos)는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중에서 '시험'이란 표현 '시련'과 '유혹' 모두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유혹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켜야만 하기에 거기에 따르는 시련이라는 의미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내적인 욕심으로 인한 시험이라기 보다는 외적인 고난으로서의 시험이란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여기서 '갖가지 시련'에서 '갖가지'라는 표현은 종류가 다양하다의 의미의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삶의 모든 영역 어디에서건 뜻하지 않은 갖가지 종류의 위협적인 시험에 직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0,19 ; 2코린11,23-28).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2)

 

'빠지게 되면'으로 번역된 '페리페세테'(pheripesete)는 '~주위에'란 뜻의 전치사 '페리'(pheri) '빠지다'(마태15,14), '넘어지다'(마태17,15)란 의미의 동사 '핍토'(phipto)의 합성어로서 '~에 에워 싸이도록 빠지다', '~에 빠져 에워 싸이다' 란 뜻을 가진 '페리핍토'(pheripipto) 가정법 동사이다.

 

이 동사는 성도들이 시련들을 일부러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련들이 느닷없이 예기치 않게 닥쳐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가정법 동사 '페리페세테'는 여기서 시간을 나타내는 불변사 '호탄'(hotan; '~할 그때에는')과 함께 쓰였다.

 

여기서 '호탄' 여러 번의 반복적 동작이 일어나는 때를 묘사하므로 시련의 닥침이 일회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자꾸 반복적으로 닥쳐왔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할 때 왜 그것을 전적으로 기쁘게 생각해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은 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본문과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본문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 (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고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면',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확고부동함은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성취되는 것이다.

 

'생겨난다', '만들어 낸다'는 뜻의 '카테르가제타이'(katergazetai)가 '카테르가조마이'(katergazomai)동사의 현재형이란 사실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희랍어 동사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8)

 

간구하는 자의 마음 상태가 간구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의심하지 않는 것'(6)이다. 의심없는 태도만이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를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이것이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믿음일 것이다.

 

'의심하다'라는 '디아크리노'(diakrino)동사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다', '주저하다', '망설이다'라는 뜻이 있는데,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두번씩이나 연속 사용함으로써 의심이란 주제를 강조했다.

특히 '의심하는 자'의 모습을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비유를 통해 시각화시켰으며,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의심의 위험성과 더불어 의심의 성격이 액체와 같이 불안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잔잔하다가도  이내 요동치며 험상궂게 변모해 버리는 바다의 물결은 참으로 그 잔잔함을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 물결의 비유는 의심의 규모가 바다처럼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단 하나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의심이 지니는 여러가지  부정적 면모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6절의 이러한 '의심하는 자'가 바로 야고보서 1장 8절의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안정을 찾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은'으로 번역된 '딥쉬코스'(dipsichos)는 '두 번'이란 뜻의 '디스'(dis) '마음', '영혼'이란 뜻의 '프쉬케'(psche)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두번의 마음' 이나 '망설이는', '동요하는', '의심하는' 또는 '시련의 때에 특히 더 필요한 믿음의 일관성과 결의가 부족한' 이란 뜻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마음으로서 일관성있는 태도를 기대하기 힘들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 그 두번 다 야고보서에서만 나타나고 있다(야고4,8).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9-10)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당당하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권면의 내용이다.

야고보서 1장 9-11절은 앞의 단락과 내용상 연결되는 것으로서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높여 주신다는 믿음으로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부자는 그의 부요함이 영원 무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믿음의 시련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자신이 가난하고 상황이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결코 기가 꺾이거나 주눅이 들어서는 안된다.

현실의 환경과 세상적 평가에 의하면 이들은 한없이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영광스럽고 존귀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6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가 인내임을 통찰합니다.

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명확한 답을 바로 얻고 싶은 무신론자들의 성급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바로 인내로 견뎌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오묘함과 우리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내로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명백한 곳에서는 신앙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곳에서 요구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차갑고 어두운 밤불확실한 삶 안에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과 희망은 바로 불분명한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입니다.

1독서에서 야고보는 삶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시련을 잘 받아들이면그 안에서 인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는 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인내심 없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무신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인내심 없이 명확함을 바라는 성급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지 않으시고 인내와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성모님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인간의 생각뜻으로 가는 것신앙 아닙니다.

 

 (마르8,11-13)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 앞10절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에서 이어지는 오늘 말씀입니다.

= 달마누타- 과부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그 대속을 믿지 못해 용서, 그 쉼(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그 안식이신 예수님(신랑)과 짝하지 못하는 과부, 그 과부 홀로 인간의 법, 지혜로 신앙을 하려는 쉼이 없는 그곳에 안식(쉼)의 말씀을 주시려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십자가)의 말씀을 진리로 받으려 하지 않고 논쟁을 벌입니다. 자신들의 말, 곧 도덕과 윤리-율법이 더 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하려 표징까지 요구합니다.

 

(요한1,4-5.9.11)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 예수님의 사람들의 생명, 빛이 표징입니다. 성경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아들으라.’고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표징~

(루가2,12)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구유-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짐승, 죄인들의 생명(구원)의 양식, 그 표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 구원의 표징인 예수님 앞에서 다른 표징을 찾으면~ 당연히 그들은 영원히 표징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씨를, 짐승들에게는 풀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창세1,28~참조) 씨(제라)-아들,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후손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갈라3,16)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깨닫는 것(먹는 것) 사람입니다. 깨달음이 아닌 자신의 義, 명예를 위한- 홀로 열심 한 그 과부의 행위-풀을 먹는 짐승입니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예수님은 또 다른 고장으로 건너가십니다. 자기 말을 고집하는 사람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머무르실 수가 없습니다.

 

(집회15,14-20)

집회15, 14 한 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15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와 다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그래야 인간의 길 그 계명(말)을 버리고 하느님의 길 그분의 계명(말씀)이 나의 원함이 될 수 있습니다.

 

16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17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 물, 불- 우리의 생명에 꼭 필요한 물과 빛입니다. 하늘의 물, 불(말씀)로 받으면 생명입니다. 땅의 물, 불(말)로 받으면 죽음입니다.

다시~ 십자나무-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탈출15,25) 그 구원의 계명 그 하느님의 계명을 진리로 받으면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하늘의 새 생명을 얻지만~ 사람의 계명 도덕과 윤리로 받으면 선악의 법이 되어 심판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흠도 티도 없는 그 완전한 善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야고2,10참조) 그래서 하늘의 흠도 티도 없는 사람의 아들(씨)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생명과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오늘~~~

 

18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 세상(인간)은 깨닫지 못하는 지혜라 하셨습니다.(1코린2,8)

 

19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20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 죄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경(不敬) 그 죄가 드러나도록 허락하심 입니다. 왜?

 

(로마3,25-26)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창조 목적이~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 우리 창조의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을, 십자가의 의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에페1,5-6참조) 하느님은 인간의 善, 義 - 그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대속, 그 선, 의- 주님의 영광만 받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영광으로 그분의 지체로 한 몸이 되어 달려 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3,15-16)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 하느님의 지혜(말씀)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아멘 -*^ㅇ^*-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마르8,11~13)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구한 '표징'에 해당하는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어떠한 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 주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세메이온'(semeion) '표' '신호'(마태26,48)라는 뜻 외에 '표징', '표적', '기적', '징조' 등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능력' 뜻하는 단어인 '뒤나미스'(dynamis; act of power) 비교된다.

 

'뒤나미스'(dynamis)는 다분히 초자연적인 능력이라는 뜻이 있는 데 비해서, '세메에온'(semeion) 그것을 행하는 자가 모든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는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뜻이 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과연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증명해 달라는 뜻이고, 그러한 호기심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신다.

'깊이 탄식하며'에 해당하는 '아나스테낙사스'(anastenaksas; he sighed deeply) 원형 '아나스테나조'(anastenazo)는 '위쪽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아나'(ana) '탄식하며 신음하다'는 뜻의 동사 '스테나조'(stenazo)가 결합된 단어인데, 가슴 밑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숨을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하여 고소하려는 비열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아들의 깊은 실망과 비애 및 탄식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 8장 12절의 후반절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이 세대에 표징을 주시는 일만큼은 결코 하지 않으실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4절에는 '이 세대'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표현되고 있으며,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답변이 나온다.

 

'요나의 표징'이란 바리사이들이 구하는 표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영광의 표징만이 이 시대에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어두움에 속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신비한 표징만을 구하며,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는 결코 하느님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자연인의 지혜와 이성으로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십자가의 신비(1코린1,18.21)를 믿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신 진정한 표징으로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20260216일 월요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다면, 저희한테 직접 보여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시고 탄식하시며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들의 태도는 하느님이시기에 믿겠다.’가 아니라, ‘내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믿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먼저, 믿음은 나중이라는 잘못된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표징을 본 뒤에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기 때문에 삶 안에서 표징을 발견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믿음의 길에 지혜를 더합니다.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3).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십니다]”(1,5).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저 고난을 피하는 요령이나 세상의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 믿음을 두며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의 눈을 가리킵니다.

온갖 균과 바이러스가 가득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균을 없앤 무균실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면역력을 키워서 이겨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가 신앙으로 받는 은총은 후자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악과 시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 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으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자비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지혜신학(知慧神學)이 신앙을 망친다.

 

복음(마르8,10-13)

10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과부지방으로 가셨다.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 표징(標徵)의 실체이신 예수님이시다.

 

(루가2,11-12)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짐승 먹이통)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죄인(짐승)들에게 하늘의 용서, 쉼, 안식을 주시기 위해 대속의 속죄 제물로 죽으러 오신 예수님께, 곧 자신들의 구원의 양식으로 하늘에서 인간의 육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지 못해, 받아들이지 않아 한 몸이 되지 못한 과부(寡婦), 율법자들이 다른 표징(標徵)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과부)들을 구(求)하시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들의 짝, 남편으로 찾아 오셨는데 시험, 논쟁까지 하면서 다른 남편, 곧 헛된 표징을 청(請)하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이 세대가 원하는 표징은 자신들의 뜻, 소원을 만족 시켜 줄, 곧 땅의 복(영광, 명예, 의, 건강)을 줄 남편이다.

 

(1티모6,17) 17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율법(제사, 윤리)을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으로 땅의 것, 현세의 것을 위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를 버려두신 채 다른 과부들을 찾아 가신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믿는 예수님이,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하늘의 복인 거룩, 의로움을 거저 주시는 새롭고 살아있는 구원의 길인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 진리의 영으로 계시는지, 믿는지, 오늘 생각해 보자!

 

(로마8,10) 10 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 가르침의 결론 부분을 보고자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인의 단죄가 아니라 회개, 즉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 선행, 극기, 봉사, 단식을 통해,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으면 우리 영혼은 맑아지고,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이 잘 드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더 잘 보일 것입니다.’ -이상 발췌-

=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곧 그분의 뜻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는그 하느님의 지혜의 용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그 피의 새 계약을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하는 기도선행극기봉사단식고해성사로 양심까지 완전히 깨끗해지는 용서가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총이 더 잘 보일까?

생각해 보자!

나는 불가능했다. 열심히 다 해봤다. 나의 온 삶, 온 시간을 기도 등을 다해 열심한 신앙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믿음은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짐이 되어 나를 속박했다.

말씀을 깨닫고, 곧 성경 말씀 안에 머무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 새롭고, 살아있는 구원의 길임을, 자유하게하는 진리임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모든 죄, 죄 의식에서 풀려 안식을 살게 되었다.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서도 자유하게 되었다.

 

(1코린2,5-7)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 인간의 지혜(知慧)는 믿음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창조 이전부터 미리 정하신 지혜(智慧), “예수 그리스도”시다. (에페1,4 1코린1,24)

*99가지 좋은 일좋은 말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하나를 빼 버리면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헛 것이 된다곧 새 계명,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길을 진리의 말씀으로 결론 짖지 않으면 엉뚱한 길, 영원한 죽음의 골짜기로 가게 된다.

인간의 열심, 열성을 의지하면 절대로,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 신앙 행위를 의지하는 것,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도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닌 불의, 불법이기 때문이다.

 

(마태7,21-23) 21 “나에게 주님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주님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내게서 물러들 가라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에페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은총과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말씀을 당신의 이끄심지혜 없이 어찌 깨닫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저희 귀와 마음을 열어 당신의 귀와 마음을 주소서 저희 모든 이들의 생각을 의탁합니다그리스도의 대속그 피의 새 계약의 말씀을 진리로남편으로 받아들여 한 몸이 되게 하소서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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