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18일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 (마태11,28-30)
제1독서<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이사26,7-9.12.16-19)
7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8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9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16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17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18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19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 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화답송시편 102(101),13-14ㄱㄴ과 15.16-18.19-21(◎ 20ㄴ) ◎ 주님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라.
○ 주님, 당신은 영원히 다스리시니, 대대로 당신을 기억하나이다. 당신은 일어나 시온을 가엾이 여기시리이다. 시온에 자비를 베푸실 때, 당신 종들이 시온의 돌을 소중히 여기고, 그 흙을 가엾이 여기나이다. ◎
○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
○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
복음<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이사26,7~0.12.16~19)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8~9)
앞선 이사야서 26장 1절ㄴ에서 7절은 장차 구원의 도성에 입성하는 자들의 환희와 믿음의 선포를 소개하였다. 이제 이사야서 26장 8절 이하 15절까지는 구원의 도성에 입성하는 자들이 노래하는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에 대한 신앙 고백이 소개된다.
이러한 내용은 네가지 신앙 고백 형태로 제시되는데, 각각의 신앙 고백은 두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8절과 9절에서는 심판을 통하여 공의를 실현하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심정이 고백된다.
먼저 본문은 주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면서 그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확신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믿음은 그의 구원을 확신하게 하며, 나아가 악한 자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현재의 삶에 비록 고난이 많다 할지라도 그의 나타나심을 인내로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에 해당하는 '오하르 미쉬파테카'(ohar mishiphateka)는 문자적으로 '당신의 심판의 길'이라는 의미이다. 심판의 길에서 하느님을 기다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심판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하느님을 대망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의 판결에 따라'에 해당하는 '미쉬파테카'(mishiphateka)의 원형 '미쉬파트'(mishiphat)는 법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이나 심판을 의미한다.
신명기 4장 8절에서는 '법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하권 22장 23절에서는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열왕기 상권 6장 12절에서는 '규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역대기 상권 16장 12절에서는 '판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종합해 볼 때, 본문의 '미쉬파테카'(mishiphateka)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서 그 통치의 규례로 사용하시는 법칙, 또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판결(판단)의 기준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에 해당하는 '키우위누카'(qiwuynuka)의 원형 '카와'(qawa)는 참을성 있게 마땅히 바랄만한 것을 기다리고 대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사실상 하느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주님은 그들의 삶 속에서 눈으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손으로 확실히 느껴지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다. 나아가 그 하느님은 비록 악인들이 세상에서 불의를 행하여도 그것을 모른체 하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중도에 신앙을 버리고 악한 자들의 편과 자리에 서서 하느님을 적대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 제시된 참 하느님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참고 기다리는 자들이다(히브11,27).
하느님은 당신이 정하신 종말의 날에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며, 그 인내와 진실에 대해 성실하게 보상하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하심을 만천하게 드러내실 것이다(히브11,6).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당신 이름'(주의 이름)에 해당하는 '쉬므카'(shimka)는 주 하느님의 고유한 위격과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주 하느님은 거룩한 이름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 이름에 부합한 일을 행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의인들에게 인자를 베푸시고 교만한 악인들을 진노로 벌하시며, 자신을 의탁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필요한 때에 도움과 구원을 베푸신다.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는 것'에서 이 '기억'이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실 때 보이셨듯이, 하느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당신의 은혜로우심과 전능하심 등과 관련된 기억을 의미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이 영혼'에 해당하는 '나페쉬'(naphesh)는 단순히 '영혼'이라는 의미이며, '소원입니다'에 해당하는 '타아와트'(thaawath)는 '열망','소원','갈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영혼의 갈망'(the desire of the soul)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전존재를 다하여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도록 소망하고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순수하고 단순한 것이며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9)
이사야서 26장 9절의 상반절은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토로하는 이사야서 26장 8절의 내용이 연장되는 예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원문상으로 26장 8절의 마지막 단어가 26장 9절의 맨 처음에 또 다시 나온다는 사실이다. 즉 26장 8절과 9절 두 구절은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본래 '호흡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생명'(1사무19,11), '마음'(1사무18,1), '숨'(창세2,7), '마음'(에제36,5), '목숨'(창세12,13)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네페쉬'라는 단어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도 생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밤에'에 해당하는 '빨라울라'(ballaulla)는 매우 큰 어려움을 당하는 때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 밤은 주님의 광명이 비추지 않는 때이며, 주님의 의로운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이다.
또한 그 밤은 악인이 횡행하고 궁핍한 자가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는 때이다. 그 밤은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이며, 의(義)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때이다. 그러한 때에도 하느님의 백성들은 생명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당신을 열망하며'에 해당하는 '이우위티카'(yuithika)의 원형 '아와'(awa)는 '바라다','희망하다','열망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신명14,26; 시편106,15; 잠언13,4; 23,3).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사랑의 열정이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본문에서 '저의 넋'에 해당하는 '루히'(ruhi)는 본절 상반절에 있는 '저의 영혼'에 해당하는 '나프쉬'(naphsh)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 단어의 원형 '루아흐'(ruah)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심령(영; spirit)을 지칭하며,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영적 교제를 나누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저의 영혼'이라는 표현과 병행하여 사용되었으므로,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그리고 생명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당신을 갈망합니다'에 해당하는 '아샤하레카'(ashahareka)의 원형 '샤하르'(shahar)는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하며(판관19,25),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모두 12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하느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욥기8,5; 시편63,2; 78,34 ; 잠언1,28; 8,17; 호세5,15).
어원적인 의미와 연결시켜 보면, 이 단어는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깊이 사무쳐서 잠을 설치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하느님을 찾는 당신 백성의 열렬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동시에 미완료 시제로 쓰여 그토록 하느님을 찾는 것을 물론,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하느님과 만나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의인들의 진정한 희망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시편78,23).
특히 현실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악과 불의와 억울함이 자행되기에 인간의 한계를 너무가 잘 알고 있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찬란한 태양처럼 임하시면, 죄악과 불의의 깊은 밤이 사리지고 세력이 약화될 것이기에 주 하느님을 간절히 희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녹]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향하여,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무거운 짐”은 율법과 관련됩니다(마태 23,4 참조).
당시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만드는 일에는 열중하면서도 정작 그 규정을 마주한 이들의 어려움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부 규정들 앞에서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신심 있는 태도로 여겼나 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마주하는 이들의 힘겨움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성당 입구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말씀이 좋아 보였는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걱정 없이 쉬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직장이나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그런 것과 다른 세상을 경험하라고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무거운 짐’은 힘든 의무들이고, ‘안식’은 단절을 통한 일시적 편안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라는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단순히 짐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 밀착시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사랑은 율법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일, 나와 우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진정한 안식, 곧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배워야 산다.
(마태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멍에,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배우면 안식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에 안식(安息)이다. 십자가의 복음, 곧 그분의 피로 죄가 없어져 마음이 편하고 가벼운, 그 안식을 얻는 새 계약을 배우라는 말씀이다.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에페1,7. 2,13)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2,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히브9,14. 10,22)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10,22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배운 대로 삽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의로움을 위한 율법, 계명으로 지키려 열심히, 혹은 억지로 드리는 제사(자기 열심)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안식이 없는 그 헛된 신앙, 헛된 삶, 길에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율법과 제사와 계명은 예수님의 대속, 그 단 한 번의 제사로 새 계약이 다 이루어졌음을. (히브10참조)
(히브8,12-13)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율법))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로마3,20-21.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제사와 윤리)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새 계약, 예수)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도덕과 윤리, 사람의 교리와 규정으로 지켜 자기 의(義), 명예, 재물을 위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 그 세상의 힘의 원리로는 절대 안식을 얻지 못하니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새 계약으로 주셨으니 하늘의 용서, 생명으로 안식을, 곧 그동안 법, 규정으로 짊어졌던 근심, 죄 의식을 주님의 십자가에 버리고 가벼운 마음, 편안함, 그 자유, 안식을 누리라는 말씀이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 그래서 마태복음서 다음 12장에서 예수님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신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올바른 신앙이란 바쁘게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해 놓으신 구원의 진리, 새 계약을 배워 하늘의 용서, 생명,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의 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 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을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는 '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는 '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은 '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리서3~4장).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는 '카이'(kai; and)와 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한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 (prays; gentle meek)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마태5,5). 그리고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 '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 (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셨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는 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다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다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다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2024년 07월 18일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님 말씀에서 두 가지 표현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옵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께 ‘와서(가서)’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삶’, 이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안식’을 뜻하는 그리스 말은 일차적으로 ‘쉬다’의 뜻도 있지만, ‘되살아나게 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단순히 ‘쉼’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삶이 무겁고 힘들수록, 여러 이유로 신앙을 지키기 어려울수록, 예수님께 다가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우리가 다시 살아나도록 주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을 얻읍시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는 신앙인이 많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믿음을 지키는 길이 매우 무겁게 느껴져도 예수님께 다가가지 않습니다.
일상을 멈추고, 평소에 하지 못하였던 것들을 실컷 하며, 그동안 ‘억눌린 욕구들을 채우는 시간’을 ‘안식’으로 착각하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참된 안식을 얻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신앙인이 참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성체 앞입니다.
어디에서 또 누구에게 위로받습니까? 성체 앞에 머물며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는 오늘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0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안식은 인간의 죄의 뿌리가 해결 됐을 때 비로서 얻는다.
복음(마태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무거운 짐 같은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그 율법의 사람의 의(義)로 얻는 안식(安息)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고생하며- 세상의 힘, 돈, 명예, 건강을 지키려 애쓰지만, 그것들로 얻는 안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쉼, 안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우리의 모든 죄(罪)를 넘겨 받으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흘리신 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 거저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흙인, 죄인(罪人)인 우리가 하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었을 때, 안식(安息)이다.
흙, 그 없음이 더러운 양심의 죄가 대속(代贖)의 십자가(十字架)로 해결되어 얻는 쉼, 안식(安息)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당신의 제자라 하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무거운 짐 같은 신앙, 고생(苦生)인 세상의 것으로 안식을 누리려 했던, 그 자신을 버리고 참 안식(安息)을 주는 ‘그리스도의 멍에,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다.
(루가14,27)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내 죄(罪)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신, 흘리신 피,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곧 구원의 새 계약으로 지고 따르는 것, 그리스도인이여 그분의 제자다.
(히브8,7-10) 7 첫째 계약(율법)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10 그 시대(옛 계약)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새 계약)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구약(舊約 율법, 옛 계약)을 신약(新約 십자가, 새 계약)으로 결론 짖지 않으면 결함, 곧 ‘죽음의 법(法’)일 뿐이다.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미사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사 제물이 아닌 그 제사를 “다 이루었다” 하신 새 계약의 말씀으로 먹는 것이 자유(自由), 안식(安息)이다. 곧 내 뜻(소원)을 이루기 위해, 내 의(義)를 쌓기 위해 ‘제사(祭祀) 제물(祭物)인 살과 피’로 먹는다면, 피의 새 계약이 주시는 하늘의 용서, 자유, 평화, 쉼, 안식은 얻지 못한다. 모두 ‘고생하는 무거움 짐’일 뿐이다.
(창세2,2)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쉼, 안식, 하느님께서 창조를 엿새 동안 하셨다. 그런데 이렛날에 ‘다 이루었다’ 하신다. 왜? 첫날부터 엿 째날 까지 하신 모든 창조(創造) 안에 구원의 뜻, 의미를 깨닫게 되면 쉼, 안식이라는 것이다.
(갈라6,15) 5 사실 할례(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코린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십자가, 피의 새 계약)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사람)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 마음 안에 충만 하소서. 새로운 피조물(사람)로 새 창조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말씀 안에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