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01일 월요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마태8,18-22)
제1독서<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았다.>(아모2,6-10.13-16)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7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8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
9 그런데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인들을 없애 주었다. 그 아모리인들은 향백나무처럼 키가 크고 참나무처럼 강하였지만 위로는 그 열매를, 아래로는 그 뿌리를 없애 주었다.
10 그리고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13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14 날랜 자도 달아날 길 없고 강한 자도 힘을 쓰지 못하며 용사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5 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 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6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화답송>시편50,16ㄴㄷ-17.18-19.20-21.22-23(◎22ㄱ) ◎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너는 도둑을 보면 함께 어울리고, 간음하는 자들과 한패가 된다. 너의 입은 악행을 저지르고, 너의 혀는 간계를 꾸며 낸다. ◎
○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헐뜯고, 네 친형제에게 모욕을 준다.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
○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내가 잡아 찢어도 구해 줄 자 없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복음<나를 따라라.>(마태8,18-22)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아모2,6-10.13-16)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6)
아모스서 2장 6절부터 16절까지는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아모스서 2장 6절 하반부부터 8절까지에서 북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고발된 내용은 자국 내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란 특징이 있다.
그리고 남부 유다에 대해서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점에 대해 지적했지만, 북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사회의 불의에 대한 지적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 역시 북부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는 잘하였고, 도덕적으로만 잘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북부 이스라엘은 왕국 분열 초기 여로보암 왕 때부터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이래로 우상 숭배를 근절하지 못하고 끝내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서 2장 6절 하반부부터 8절까지의 내용은 북부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우상 숭배를 전제로 한것으로 그것이 사회적, 윤리적 타락으로 귀결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모스서 2장 6절은 이러한 사회적 고발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서 북부 이스라엘 사회가 자신의 경제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인신 매매를 하는 매우 부패한 사회였음을 잘 보여준다.
원문으로 볼 때에 본문은 '그들이 팔아넘겼기 때문에'로 직역되는 '알 미크람'(al mikram)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미크람'의 원형은 '팔았다'의 의미의 동사 '마카르'(makar)이다.
'마카르'는 정상적 상거래를 나타내는 용례보다는 사람을 사고 팔거나 진리를 팔아 넘기는 부정적 상행위를 지적하는 용례에서 더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 파는 비도덕적 행위를 묘사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일례로, 이 단어는 레아와 라헬이 라반에게 불평을 토로하면서 아버지가 돈을 받고 자신들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음을 진술하는데 사용되었다(창세31,15).
또한 이 단어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파는 것, 즉 인신 매매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창세37,28).
한편 '알 미크람'에 이어지는 내용은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신매매를 하는 이유를 대구 형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신 매매의 대가로 은과 신발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은'에 해당하는 '케세프'(keseph)는 일차적으로 '은'이란 의미를 지니지만 '돈'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서는 은이 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창세17,13.23).
또한 '신발'에 해당하는 '나알라임'(naallaim)은 당시 여러 신발의 종류에서 가장 싼 샌들 모양의 신발을 지칭한다.
이같은 표현들은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온 천하와 우주보다도 더 귀중하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을 단 몇 푼에 또는 신발 한 짝에 팔아 넘길 정도로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것을 부각시켜준다.
그리고 본문에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기록되었다. 한 부류는 '무죄한 이'(의인) 이었고, 다른 부류는 '빈곤한 이'(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무죄한 이'(의인)에 해당하는 '찻디크'(tsadiq)는 '공의로운' 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창세기 6장 9절에서 홍수의 심판 속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에 대해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찾으려고 했던 의인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북부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의인을 핍박하고 노예로 팔아 넘겼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불의한 사회인지를 역설해 주는 것임과 동시에 스스로 정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부각시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빈곤한 이'에 해당하는 '예브욘'(yebyon)은 탈출기 23장 6절, 신명기 15장 7절 등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돌보고 보살펴야 할 존재로 규정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에서는 의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돌보기는 커녕 착취와 핍박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은 북부 이스라엘이 본래 구현해야 할 하느님의 자비와 동정(연민)과 상관없는 곳이 되었고, 무자비하고 냉혹하여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었음을 함축하고 있다.
북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첫번째 내용에서 의인과 가난한 자에 대한 인신매매가 지적된 것을 통해 볼 때, 북부 이스라엘에서 주된 심판의 대상이 될 사람들은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반대 부류의 사람들인 불의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배우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표현은,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던 예수님의 일상을 떠오르게 합니다(마태 4,23; 9,35 참조).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주님’이십니다.
그런 그에게 당장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라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인륜대사의 중요한 의무마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집’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구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주님이시며 또한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죽음과 삶은 오직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으며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스승’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4년 07월 01일 월요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아버지의 장례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따르라는 이 말씀이 너무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자녀에게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믿음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가치들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가치와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부딪치게 될 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여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보다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정치적인 의견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 더욱 앞섭니다.
체면과 자존심, 다른 이들의 평가가 더욱 앞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신앙을 먼저 선택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과 타협하면 안 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함께 계시고, 그 길의 마지막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이 모든 이에게 소중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건너야하는 신앙(信仰)
(마태8,18-22)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 건너편으로 가라(파스카) 앞절에서 보았던 선이 악을 대속하고 생명을 주시는 그 하나. 그 진리의 한 말씀(법, 계명)을 뱀(악)의 유혹으로 선과 악, 도덕과 윤리, 그 둘의 법으로, 인간의 계명으로 말하는 그 거짓말, 거짓 가르침으로 열병을 앓아 누워있는, 죽어있는 그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 곧 인간의 법, 계명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길(진리)로 건너가라(파스카)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군중이 아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놓치면 안된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선택한 이들, 곧 교회(聖徒)에게 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요한15,16)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 그러니 교회(우리)가 반드시 그 파스카의 길을 가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는 가려 하지 않기에, 아니 갈 수 없기에 하느님처럼(탈출3,7-8) 예수님께서 건너가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덕과 윤리, 그 사람의 길이 아닌 선이 악을 대속하고 생명을 주는 그 진리의 길로 반드시 파스카(건너게) 시키시겠다는 의지이신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께서 ‘나’라고 하심은 죄를 대속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善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시다. 그 파스카의 신앙이 안되면? 곧 말씀을 문자 그대로 도덕과 윤리로 보면, 예수님을 박해하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갈라1,11-14)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티토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어디든지?, 자신의 뜻,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 인간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또 자신의 의로움,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는 절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이다.(코헬7,20 시편14,1- 로마3,10- 참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신의 뜻, 명예를 부인하는 길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23,1-4) 1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대부분 이 부분만을 기억하고 좋다고, 간다고 한다) 4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 *주님의 막대와 지팡이- 곧 주님의 말씀으로만 아쉬울 것이 없고, 말씀으로만 생기(힘)와 위안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재앙(시련, 고난)의 길도 있을 터인데 주님의 말씀으로 그 시련,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것이다.
사실은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3절 까지만 보면서 주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헛된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이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 주님을 나의 주인, 머리로 곧 그분의 말씀을 위안으로, 생기로, 진리로 의지하는 이들이 없다는 말씀이시다.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 생각으로 받아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한 그 각자가 머리로 살아가기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그들의 머리로 계실 곳이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 생명, 빛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그분의 지체가 되지 않는 모든 사람, 세상을 성경은 죽어야 할 惡이라고 하신다. (1요한5,19) 그 죽음으로 장사(葬事) 지내야할 아버지, 그 세상적 생각, 그 죽음의 길을 따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신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그래서 각자가 자기 생각으로, 머리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그 머리 노릇으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시려 머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지체들의 교만, 그 죄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교만의 죄 값을 다 치루시고 죽으신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그런데도 그 예수님을 믿는다(따른다)는 많은 이들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 그 사람의 가르침을 옳은 말, 길로 고집하기에 다음절이 그 죽음을 부르는 호수(세상)의 물(말)이 배(교회)에 가득 찼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사람의 생각, 계명, 길에서, 하느님의 뜻인 진리의 길로 건너가는(파스카) 신앙으로 현세에서부터 하늘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빕니다. 아멘!!!
신앙의 삶에 어중간은 없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느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의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나 편안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녀의 결혼, 출산 문제, 재물이나 교육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어중간이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출산과 교육에 대한 관심도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너감’ 곧 새로운 파스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죽은 이’가 아니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
매 순간 살아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8,21) 따르겠다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8,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은 한 인간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하고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중심과 순위가 뒤바뀌는 순간 인생은 하느님과 무관한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행하는 것을 인간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할 때 우리는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을 품고 행하고 만나야 하며,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였던 장례 의무까지도 무시하시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유일무이한 시간에로 초대받았으며 그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또한 예수님에게나 제자들 모두에게 급박한 까닭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은 무덤을 파주는 사람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 생명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말로써 험담과 거짓과 중상모략을 하고, 죽음의 문화에 동참하는 행동을 하며,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 온갖 탐욕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지니면서 역설적으로 반생명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면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내는 죽은 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과거를 현재화(아남네시스)하고 미래를 현재화(프로렙시스) 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은 바리사이나 루카복음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사사건건 ‘왜?’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고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과거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미래에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을 내 삶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이나 베드로처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은총과 뜻을 헤아리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안일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안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해야겠습니다. 이 절박한 은총의 때를 뒤로 제쳐두고 나를 위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오늘도 과거의 추억이나 상처에 파묻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사’를 치르는 ‘죽은 이’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