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17일 수요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다 (마태11,25-27)
제1독서<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이사10,5-7.13-1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화답송>시편94,5-6.7-8.9-10.14-15(◎14ㄱ)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 주님, 그들이 당신 백성을 짓밟고, 당신 소유를 괴롭히나이다. 과부와 이방인을 살해하고, 고아들을 학살하나이다. ◎
○ 그들은 말하나이다. “주님은 보지 않는다. 야곱의 하느님은 모른다.” 미욱한 백성들아, 깨달아라. 미련한 자들아, 언제 깨치려느냐? ◎
○ 귀를 심으신 분이 듣지 못하신단 말이냐? 눈을 빚으신 분이 보지 못하신단 말이냐? 민족들을 징계하시는 분이 벌하지 못하신단 말이냐?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분이 알지 못하신단 말이냐? ◎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
복음<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마태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10,5~7.13~16)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5~6.7ㄱ)
앞선 이사야서 9장 8절에서 10장 4절은 주님을 거부한 북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엄정한 심판으로 장차 멸망하게 될 것을 네번이나 예언한 내용이다. 이제 이사야서 10장 5절이하 19절은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아시리아가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함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을 배제하고 인간 역사를 고찰하면, 북부 이스라엘을 패망시키고 아람을 패망시키며, 남부 유다를 함락 직전의 위기까지 몰고간 아시리아가 근동에서 오랜 세월동안 절대 주권을 휘두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를 향한 하느님의 예언은 역사는 주권자 하느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며, 아시리아는 단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시리아는 자신의 위치와 분수, 즉 하느님의 심판 도구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을 자랑함으로써, 주님께로부터 북부 이스라엘처럼 심판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를 통해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또 바빌론을 통해 그 아시리아를 심판하심으로써, 역사를 운행하는 자는 강력한 전제 군주나 제국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다른 각도에서 아시리아는 당시 히브리 민족의 관점에서 볼 때 불경건하고 사악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사악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북부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더 불경건하고 더 사악한 자들이었다는 데 해답이 있다. 또한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의 깊이까지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러한 내용은 아시리아 사람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불행하여라' 에 해당하는 '호이'(hoy)는 이사야서 10장 1절의 맨앞에서도 쓰여 북부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냈었다.
이제 바로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신 아시리아에 대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그들이 비록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되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임박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그들에게 화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자만심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강해져 근동의 패자가 되었다고 자만하여 정복 과정에서 온갖 비인륜적인 만행을 저지르며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7).
심지어 아시리아는 이 과정에서 주변 열강의 신들, 북부 이스라엘의 우상들과 북부 이스라엘의 전능자이신 하느님을 동격으로 취급하고,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아시리아의 교만을 단죄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이사야서 10장 5절이하 6절에서는 아시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택하신 주님의 주권과 의도를 밝힌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함을 선언하신다. 여기서 '내 진노'에 해당하는 '압피'(apphi)의 원형 '아프'(aph)는 '코'(창세2,7)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 단어는 코에서 뜨거운 김이 품어져 나올 정도로 감정이 격앙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극도의 분노를 나타낸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주님의 활활 타오르는 진노를 의미한다. 그 진노의 방향은 북부 이스라엘에게로 맞추어져 있으며, 그 진노를 대행하도록 선택된 자가 바로 아시리아 사람들이었다.
'막대'에 해당하는 '셰베트'(shebet)는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나 '규'를 의미하기도 한다(창세49,10 ; 민수24,17 ; 판관5,14). 그러나 뒷 문장과의 대등관계를 고려할 때 징계하는 데 사용되는 매, 혹은 막대기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고려하여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몽둥이는 나의 격노의 표현이다'가 된다. 여기에서 '그의 손에'에 해당하는 '베야담'(beyadam)은 '손'을 의미하는 명사 '야르'(yar)에 3인칭 복수 소유격 접미어와 '~안에'란 뜻의 전치사 '뻬'(be)가 붙어 '그들의 손 안에'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의 분노이다'에 해당하는 '자으미'(zahmi)의 원형 '자암'(zaam)은 본래 입에 거품이 뿜어져 나올 정도의 격노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죄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얼마나 격렬한 것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이사30,27; 38,4;시편102,11).
이러한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달리 죄의 속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의노(義怒; 의분; 義忿)이며, 잘못된 것을 심판하여 의(義)를 이루시는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아름답고 은은하지만 그 내용은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기도! 오래간만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을 아는 이들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과 “철부지들”을 비교하시며 후자가 ‘아버지를 아는 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이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을 가리킵니다.
종교 권력을 틀어쥔 그들은 자기들만큼 하느님을 아는 이가 없다고 자부하며,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에 대해서 정통한 이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을 포함한 ‘철부지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들이 하느님을 아는 영역에 속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 본 사람들, 곧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이들은 모르는 이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오히려 아는 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제 생활에서 하느님과 신앙,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복음이 소개하는 ‘철부지들’을 만나지 않을 때입니다.
비록 전문적인 신학과 성경의 지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삶을 거쳐 나오는 신자들의 깊은 고백은 제 교만의 해독제입니다.
그 만남은 오늘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로 저의 두 손을 모으게 합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느님을 알고 의지하십니까?
(마태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 그때에- 앞 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해 제사와 윤리로 받아 열심히 살았던, 그리고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지켰던 그 자기 의로움으로 하늘에 오르려 했던 이들은 하늘이 아니라 저승으로 떨어질 것이라 말씀하신 그때이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1코린2,9) 그 하느님의 뜻, 말씀이다. 그러니 사람의 지혜, 슬기로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사람의 지혜로 이해되어지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1코린1,19.21)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 지혜로 들으면(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알아듣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께서 알아듣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철부지 같은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이 예수님께서 감사드릴 일인가?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일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늘 나와 하나, 한 몸이신 내편 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영원히, 보호자로 함께 하신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 하늘과 땅의 주인, 주님이신 하느님의 선한 뜻, 곧 세상 창조 이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안다.
(이사46,9-10) 9 먼 옛날의 (창조) 일들을 기억해 보아라. 내가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내가 하느님, 나 같은 이가 없다. 10 나는 처음부터 장래 일들을 알려 주고 예전부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알려 주며 “내 계획은 성사되고 나는 내 뜻을 모두 이룬다.”고 말하는 이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신 하느님이시다.
=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그분의 피, 새 계약으로 얻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거룩이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해 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지, 정말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신 그 하느님을 알고 있는지.
그래서 (2티모1,9)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세상)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내주시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 사랑의 하느님을 의지하는지.
(히브10,17)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다“ 하신 그 ‘하느님으로 사는가’ 말이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사도신경)로 시작한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전한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다. 그런데 그렇게 말은 하면서 믿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온 우주만물이 창조가 아닌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처 어류에서 양서류로, 파충류 조류 포유류로 진화했다는(진화론) 그 세상 사람들의 말을 더 믿는다.
그 진화론이 틀렸다고 하면 당장 학교 시험에서 점수도 못 받는다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수십억년 동안 진화가 된 것이라면 그 수십억년 동안 진화해 왔다는 증거, 곧 수많은 화석이 있어야 하는데, (반드시 연속적인 중간단계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것이다. (김명헌 교수의 창조 과학 중에서) 검증되지 않은 학설일 뿐인 진화론이 창조론을 먹어버린 것이다.
곧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제 종류별로 창조하셨다.
(창세1,11.21.24-25)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 성경은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강조한다. 진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 치의 오차(誤差)없이 우주 만물을 완벽하게 제 역할에 따라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곧 우리 구원에 필요한 역할이라는 것이다.
(묵시5,13)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우리는 (히브11,3)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히브1,3)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런데 그 우주만물은 사라질 것들이다.
(2베드3,7) 7 지금의 하늘과 땅도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같은 말씀으로 보존됩니다. 불경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날까지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 그 사라질 것을 왜 창조하셨는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소품들인 것이다.
(지혜16,24) 24 피조물은 자기를 만드신 당신을 시중들며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는 데에는 그 힘이 팽팽해지고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에게는 득이 되도록 그 힘이 느슨해집니다.
= 하느님의 창조 목적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 노고, 열심, 그 진화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으로 새 창조, 새 피조물, 새 사람으로 완전해 지는 것임을 보여 주심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우리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것이다.
(묵시21,1.22-23) 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시련의 풍랑)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2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 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 계획, 그 말씀으로 새 창조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시다.
☨천주의 성령님! 모든 피조물들이 하늘만을 바라보며 살듯이 저희도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1,25~27)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5~26)
원문은 '아버지'와 '하늘과 땅의 주님'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호격이다.
사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 11장 27절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친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마태26,39.42).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이고자 했다(요한5,18).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성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용어였지만, 무지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하느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신성모독적 언행으로 비쳐진 것이다.
한편,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사도17,24). 그리고 창세기 14장 19절에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이라는 표현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Maker of heaven and earth)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4장 19절에서 이 말을 했던 사람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영원한 대사제였다(히브6,20).
멜키체덱보다 이천여 년 뒤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인 멜키체덱과 같은 말로써 하느님을 호칭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되심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던 것이다.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이 가지는 창조물에 대한 주권(이사64,8)을 높여 표현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호칭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 '이것'은 무엇인가?
원문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타우타'; tauta; '아우타'; auta; them)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이나 가르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건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앞의 마태오 복음 11장 20~24절의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 경고의 주된 이유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와 '철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슬기롭다는'에 해당하는 '쉬네톤'(syneton)은 '이해력을 가진', '신중한', '학식이 있는', '지성을 갖춘'이란 뜻이다.
보통 자칭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마태23,24). 그러나 단지 그들만이 아니고, 마태오 복음 11장 16절에 나오는 '이 세대', 즉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든 불신자들을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철부지들'로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는 '젖먹이','경험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의 제자들' 혹은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본문은 많이 배워서 자기 스스로 사리분별에 신중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젖먹이처럼 경험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아이러니같은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얻어 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끝으로, '그렇습니다,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에서 '아버지'로 직역된 '호 파테르'(ho pater)에서 정관사 '호'(ho)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일반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라 유일하고 특이한 부자(父子)관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요한10,14.15). 더군다나 '뜻'으로 번역된 '유도키아'(eudokia)는 '좋다', '잘되다'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도키아'(dokia)의 합성어로서 원래 '선의'(good will), '기쁘신 뜻'(good pleasure), '은혜로운 뜻'(gracious will)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고 자비로운 뜻을 알고 있는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격적인 표현이 잘 담겨져 있다. 즉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든지 감추지 않는지는 순전히 하느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전적인 동의가 나타나고 있다.
2024년 07월 17일 수요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같은 하느님 말씀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고해성사인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진실한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은총을 얻습니다.
같은 기도인데 어떤 이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살이로 얻은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에 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가치와 이득을 쫓게 만들고, 합리와 효용을 찾게 만들기에 하느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인문학과 심리학 강의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도, 필요하거나 바라는 것이 생기기 전까지는 의미 없는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기도보다는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이 말만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다음에요, 주님.”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나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봅시다. 어린아이가 무조건적인 신뢰로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혜와 슬기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나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여기지 말고, ‘하느님 말씀이니까 오늘 꼭 실천하여 보겠다.’는 단순함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대하여 봅시다.
그리고 성체 앞에 자주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시다.
철부지가 부모 곁에 늘 머물러 있으려는 것처럼,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아무 이유가 없어도 성체 앞에 자주 머무릅시다. 하느님의 신비는 이러한 단순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0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본기도>
독서(이사10,5-6)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세상)!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 자비(慈悲)의 하느님께서 왜? 믿음의 길을 가지 않고 행위의 길을 가는 당신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서다.
복음(마태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 하느님이 감추신 ‘이것’, 앞23절 이하에서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 성전), 곧 하느님의 뜻, 새 계약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하늘의 의(義)를 구원의 진리로 밎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제사와 윤리, 그 인간들의 행위의 열심, 계명을 잘 지킨, 그 인간의 의(義)로 자신의 뜻을 이루며 또 하늘에 까지 이르려는 이들은 소돔, 고모라처럼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신 ‘이것’이다.
(예레23,14) 14 나는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망측한 일을 보았다. 그들은 간음을 하고 거짓 속을 걷는다. 또 악을 저지르는 자(세상)들의 손을 거든다. 그리하여 *아무도 제 악에서 돌아서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소돔처럼 되고 그 주민들은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들(세상)의 법(法), 계명(誡命)으로 가르치는 것이 하느님과 분리, 이혼시키는 간음(姦淫), 악(惡), 거짓, 곧 죽음의 길이다.
‘신학(神學)이 믿음의 신앙을 망쳤다’는 말이 있듯이 본문 25절은 하느님의 말씀은 학위(學位)받는 박사(博士)들 보다 철부지들이 더 잘 받아들인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사29,14) 14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그리하여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는 자취를 감추리라.”
(1코린3,19)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7ㄱ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 하느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세상의 권한을 넘겨주셨다.(창세1,28 2,15-19참조) 그러나 자신의 욕망 때문에 뱀(악)의 유혹에 넘어가 그 세상의 권한을 빼앗기고, 넘겨주고 말았다.(창세3,1-8 루가4,6참조) 그래서 모든 인간들(세상)은 악마(죄)의 지배(거짓 가르침)를 받다가 끝내는 영원한 죽음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그냥 계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 자녀들을 구(求)하시기 위해그들의 모든 죄(罪)를 예수님께 넘겨주셨고, 그 넘겨받으신 우리 죄(罪)의 목숨 값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신(代身) 죽으심으로 믿는 우리가 새 생명, 구원을 넘겨받게 된 것이다.
(1코린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갈라3,22)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7ㄴ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요한6,37)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選擇), 정(定)하신 이들을 넘겨주심이다.
(에페1,11)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 한 몫, 믿음으로 얻는다.
(1베드1,2) 2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선택하신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룩해져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고, 또 그분의 피가 뿌려져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 성령(聖靈)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 깨끗해진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하느님께서 의롭게, 영광스럽게 만들어 가신다. 그때 필요한 것이 우리의 살이 되어버린 세상의 힘들을 떼어내는 자기 버림, 부인(否認)의 고통, 시련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구원(救援)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의 뜻을 위한 행위의 길을 가는 자식 들에게 사랑(생명)의 매(枚)를 드시는 아버지시다.
(히브12,7)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탄(마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않된다.(마태24,24) 그러나 하느님의 고집이 더 세시다.
그러니까 하늘의 의(義), 생명을 위한 믿음의 신앙이 아닌, 세상의 명예, 의(義), 재물(才物) 등을 내는 것으로 ‘쌓기 위한’ 결함있는 옛 계약(히브8,7) 그 율법(제사와 윤리)의 행위신앙(行爲信仰)을 고집하면 할수록 힘들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