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16일 화요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회개하지 않았다.(마태11,20-24)
제1독서<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7,1-9)
1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3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그에게 말하여라.
4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5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6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7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화답송>시편48,2-3ㄱㄴ.3ㄷㄹ-4.5-6.7-8(◎9ㅁ) ◎ 하느님이 그 도성을 영원히 굳히셨네.
○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우리 하느님의 도성,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아름답게 솟아오른 그 산은, 온 누리의 기쁨이라네. ◎
○ 북녘 끝 시온산은, 위대한 임금의 도읍이라네. 하느님은 그 궁궐 안에 계시며, 당신을 요새로 드러내신다. ◎
○ 보라, 임금들이 몰려와, 함께 들이쳤으나, 보자마자 질겁하고, 허둥지둥 달아났네. ◎
○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처럼, 공포가 그들을 덮쳤네, 타르시스의 배들을 들부수는 샛바람처럼. ◎
복음<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7,1-9)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커스요, 다마스커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7~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문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의 구원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야심에 차 있지만, 주 하느님은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사야는 남부 유다 임금 아하즈가 그 두 임금의 말이 아닌, 주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서언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 the Lord)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이루시는 주(主)이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내주는 칭호이다. 아람 임금 '르친'과 북부 이스라엘 임금 '페카'는 결코 '아도나이'가 아니다. 그들은 두 왕국의 임금으로서 교만하게 자신들의 야욕에 찬 계획을 선언하였지만, 만군의 주님, 모든 주권을 틀어쥐고 계신 주 하느님은 자신의 계획을 선언하신다.
아무리 종들이 이런 저런 계획을 도모한다 해도, 주인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 인간 왕국의 어좌보다 더 높은 하늘의 어좌가 없다면, 인간들은 인간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오만한 자들, 악한 자들의 횡포에 휘둘릴 수 밖에 없지만(이사40,27), 그 위에 진정한 주권자이신 '아도나이'가 계신다.
잠시 잠깐 인간 권력자들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자기 계획들을 도모하려고 광분하고, 그것이 실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바로 '아도나이' 이시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본문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어 '로'(lo)가 두 번이나 사용된 문장으로서 두 임금의 도모가 결코 또한 영원히 성취되지 못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정황으로 판단할 때, 아하즈에게는 그들의 계획과 시도가 당장이라도 성취될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역시 동일한 정황의 한 복판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을 주관하고 계시는 주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그 시도가 사산(死産)된 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시각에 그 두 왕국의 침공을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8ㄱ)
앞선 이사야서 7장 3절~7절은 주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남부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 나아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침공이 실패할것을 예언하라고 명한 내용이었다. 이제 이사야서 7장 8절과 9절은 북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멸망을 예언하며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먼저, 주님은 남부 유다를 침범한 주역인 아람 임금 '르친'의 위치를 밝힌다. 여기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로쉬'(rosh)는 지배적 도시, 즉 '도성'이란 의미와 더불어 '지배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아람의 도성은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에서 아람 국을 통치하는 자는 르친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북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함이다. 즉 여기서 하느님께서 관심을 갖는 대상은 르친이 아닌, 르친과 군사 동맹을 맺은 북부 이스라엘이요, 그 왕국을 다스리는 르말야의 아들이다.
이것은 본문에 뒤이어 곧바로 북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사야서 7장 8절과 9절에서 하느님께서 '우두머리'란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람이나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사실 신정(神政)왕국 남부 유다의 우두머리는 하느님 임재와 현존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이고, 이곳의 우두머리는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남부 유다는 신정 왕국인 반면에, 남부 유다를 침략한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은 허무한 인간, 임금이 그 우두머리이며,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임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제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8ㄴ)
본문은 이사야서 7장에 등장하는 난해한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예언을 주고 있던 때는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남부 유다를 공격한 B.C.734년경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65년후는 B.C.669년 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는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패망한 B.C.722년과 53년의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B.C.669년은 앗시리아의 통치자 예잘하똔을 승계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제국의 통치자의 반열에 올라서 북부 이스라엘에서 마지막으로 인구 이동 정책을 시행한 첫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 이사야 예언자는 그떄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것이며, 그 미래에 있을 역사적 사실을 알 수도 없다.
이사야 예언자는 65년 이후에 있을 아슈르바니팔의 북부 이스라엘 인구 이동 정책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예언으로서 직접 화법이 사용되고 있다.
본문은 65년 이후에 있을 인구 이동 정책으로 인해 북부 이스라엘은 이제 정치적 주권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혈통적 측면에서까지, 예전의 이스라엘 민족이 구성하던 나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B.C.722년에 있었던 무력에 의한 패망 뿐만 아니라 B.C.667년까지 계속되었던 민족의 강제 이주 정책까지 포함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 뿐 아니라 그 예언을 듣고 있던 아하즈 임금에게도 그 생전에 일어날 예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를 전달해 준다.
즉 비록 생애 동안이 아닌 먼 훗날 일어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의 말씀을 믿으며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자신의 예언서에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즉 이사야가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먼 훗날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을 때에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굳게 설 수 있다.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특별한 호의를 받은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저주받은 고을에나 어울릴 법한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복음에 따르면 그들이 불행해지고 심판 날에 무거운 벌을 받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을의 이름을 정확히 지칭하시며 그 잘못을 지적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라면 그 정도까지 호의를 못 알아보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불행한 이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고, 심지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고을과, 이미 멸망한 고을에까지 비교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주민들이 지녔을 분노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고을들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서 통쾌와 분노 가운데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
때때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 이름에 가톨릭 교회, 우리 본당, 우리 구역,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겹쳐 보이는 것은 죄책감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말씀과 성체라는 기적, 전례와 성사, 그리고 거룩한 전통들을 통하여 기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이 ‘기적’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데서 이미 회개는 시작되었습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으면 카파르나움이 된다
(마태11,5. 20-24)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 위에 여섯(육체-땅)의 질병은 하늘(영)의 복음을 들음으로 치유(용서)되는 것임을 예고하신 것.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기적으로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니 회개도 못하는 것.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
(요한2,23-24)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 그들의 속마음, 속셈을 아시는 것,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위해, 자신의 원함을 위해 말씀을 믿는 그 속셈을 아신 것.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ㄱ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 성전). 그래서 자신이 드리는 제사, 곧 자신의 열심, 희생 그 의로움의 성전(신앙)
그 자기 의로움으로 하늘에 오르려는 이는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
하느님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의로움으로 들어가는 곳.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느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곳이며(마태4,13~)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병자가 없었는데 말씀으로 병자를 치유한 곳이며(마태8,5~) 더러운 영을 예수님 당신의 말씀으로 쫓아내신 곳이며(마르1,26)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시며 그 용서의 권한(말씀)이 당신께 있음을 보여주신 곳이다.(마르2,9)
그런데도 믿지 않으니~
23ㄴ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오늘 독서
아람(아시리아)과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를 침공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과 백성들의 마음이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 듯 떨자.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사7,4-9) 4 ‘진정하고 안심 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나무가 흔들릴 만큼 큰 두려움에 쌓인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 전지전능의 말씀이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 그들의 우두머리는 인간이요 우상일 뿐이나 남 유다의 우두머리는 전능하신 약속의 하느님이시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것.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내가 드리는 제사, 매일 드리는 기도의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약속)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히브11,1)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인 것,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인 것. 내가 원하는 것, 곧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신앙이 아닌 것이다.
(로마8,24-26)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 *인내(휘포모네)- 경험이라는 뜻이 포함된 *견딤. 그 인내, 견딤을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하는 것,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들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아멘.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1,20-24)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24)
카파르나움(Gapernaum)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마태4,13), 특히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푼 곳이었다(마태8,5~12; 14~17; 9,1~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체험하고도 완고하고 사악하여 그들의 교만이 하늘에 닿았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기서 '아니'(not)라는 뜻을 지닌 부정(否定) 불변사 '메'(me)는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질문에 쓰인다.
이런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 해석하면,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그러나 결코 높아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즉 카파르나움이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주는 것이다.
특히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서 14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겠다.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산 위에 좌정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 구절은 역사상 바빌론을 가리키며,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을 나타낸다.
당시 카파르나움의 교만함이 역사상 대제국 바빌론의 교만과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에까지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의 후반부 역시 하늘까지 교만했다가 저승으로 떨어졌던 사탄의 세력에 대한 이사야서 14장 12~13절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저승'에 해당하는 '하두'(hadou; hell; the depths)의 원형 '하데스'(hades)는 '보다'(to see)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에 부정 접두어 '아'(a)가 붙어 보이지 않는(not to be seen) '지하의 깊은 세계'라는 뜻을 가진다.
신약에서 '저승'은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마태오 복음 11장 23절과 24절의 문맥을 볼 때, '저승'은 '소돔'(Sodom)에 비유된다.
성경은 소돔(Sodom)이 하늘의 유황불이 내려 멸망했다고 말한다(창세19,1).
그런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소돔 부근의 아스팔트(역청) 구덩이(창세14,10)이 있어 지진에 의해 땅이 함몰했고, 석유와 가스의 폭발 때문에 불바다가 되어 사해 속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마치 땅이 입을 벌려 코라에게 딸리 모든 사람과 모든 재산을 삼켜 버렸으므로 그들이 저승에 빠졌던 것처럼(민수16,31~33), 소돔도 땅속으로 꺼져들어가 멸망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돔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 저지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중해보다 해발 392m가 더 낮은 지중해의 해수면 아래에 잠기게 된 소돔은 지구상의 저승과 같은 곳이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사악한 죄를 저지른 카파르나움이야말로 지상의 저승인 소돔보다 더 깊은 저승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엄정한 심판의 선언이 담겨져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11장 24절의 '견디다'는 뜻으로 번역된 '아네크토테론'(anektoteron; more tolarable; more bearable)은 '지속할 수 있는', '참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아네크토스'(anektos)의 비교급이다.
이러한 비교급의 뉘앙스를 가지고 다시 번역하면, '소돔 땅의 사람들이 카파르나움 사람들보다 심판을 더 잘 견디고, 더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심판에도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본문은 심판의 차별성에 강조점이 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죄가 참으로 크며, 심판 날에는 반드시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07월 16일 화요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저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셨습니다. 어느 날 사제관에 오셨다가 미사 참례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 성체를 모셔 드리면서 굳은살이 곳곳에 박인 어머니의 손바닥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실 때마다 칼등에 손을 올려 힘주어 자르시다 보니 세월과 함께 생긴 굳은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오랜 시간을 손바닥이 찢기는 고통을 이겨 내시며 그토록 저를 사랑으로 키워 오셨는데, 무심한 아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늘 제 옆에 계시고 가까이 계시다 보니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어머니의 손바닥에 성체를 올려 놓으면서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쏟을 뻔한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익숙한 관계일수록 더욱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일수록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은 보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보게 되고, 깨달아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고해성사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시며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내 罪로 하늘이 대신 죽어 내가 살아나는 기적보다 더 큰 奇蹟이 있는가?
복음(마태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기적(奇蹟)을 믿지 않아서 가 아니라 회개(悔改)하지 않아서 꾸짖으신 것이다. 기적의 의미, 곧 더러운 영(마귀, 악령)들의 거짓말, 거짓 가르침 때문이다.
죽은 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치시고(용서), 살리시기(구원)위해 그들의 모든 죄악(罪惡)을 짊어지시고 없애신 그 하느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기적을 일으키신 능력(能力)의 예수님을 따르며 자신들의 뜻, 소원을 이루려 한다면 죄(罪)다. *죄(罪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다)
그 속셈으로 기적(奇蹟), 능력(能力)의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죄(罪)다. 그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잘못 된 길,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그 길에서 돌아 서서 하느님의 뜻, 길(예수)을 믿고 따르는 것, 회개다. *회개(悔改 메타노아-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
(이사53,6)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마태8,16-17)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이보다 더 큰 기적(奇蹟)이 어디 있겠는가?
21ㄱ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 이곳 말고 성경(聖經) 어디에도 ‘코라진’과 ‘벳사이다’에 대해서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왜? ‘코라진, 벳사이다’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께 짊어지게 하심으로 용서(容恕), 구원(救援)하신 그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모르는 우리 모든 죄인(罪人)을 모형(模型)한 것이기 때문이다.
21ㄴ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티로와 시돈의 잘못은 무엇인가?
(요엘4,5-6) 5 너희는 나의 은과 금을 앗아 가고 나의 값진 보물들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다. 6 너희는 유다의 자손들과 예루살렘의 자손들을 그리스인(세상)들에게 팔아넘겨 제고장에서 멀리 끌려가게 하였다.
= 하느님의 값진 보물, 곧 십자나무를 통한 구원의 계명 말씀 대신,(탈출15,25-26 골로2,3 참조) 인간들의 말, 도덕과 윤리의 법으로 전(傳)해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세상의 종(從)이 되게 한 죄(罪)다.
(필리3,18-19)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피의 새 계약)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카파르나움의 뜻을 다시 기억하자. *카파르나움- 나를 위한 고을, 집. 곧 나를 위한 성전(聖殿)이다. 카파르나움은 하느님의 뜻, 말씀대신 인간의 힘, 지혜(知慧)로 하늘에 오르겠다고 열심을 부렸던, 그래서 하느님께서 흩으셨던 바벨탑이다. 그 인간의 열심, 의(義)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창세11,3-4)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 주님의 뜻, 이름 대신 인간의 이름으로 하늘에 이르겠다는 것이 죽음으로 이끄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카파르나움이다.
소돔 땅-
(창세13,10)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 하느님의 눈(뜻)이 아닌, 인간의 눈(뜻)으로 보았기에 가장 힘이 세었던 이집트(세상)를 하느님의 나라와 같다고 잘못 생각한 롯의 소돔이다.
그러니까 기적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구원의 새 계약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아온, 그 자신의 길을 버리고, 부인(否認)하고 돌아와 그리스도와 짝하지 않으면 심판(審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기적(奇蹟) 안에 숨겨진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돌아와야 하는 이유(理由)’다. *오늘 복음(福音)의 핵심(核心)이다.
* 카파르나움, 곧 자신의 이름(뜻)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다면 티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의 심판(審判)을 받는다는 것이다. 제사(祭祀) 열심히 드리며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로 착하게 산, 그 자기의 의(義), 이름이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예수님의 의(義), 이름을 모독(冒瀆)한 죄(罪)로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이름’이라는 것이다.(로마10,1-3참조)
(요한14,14. 16,24) 14,14 “너희가 내 이름(뜻)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6,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뜻)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은혜이신 천주의 성령님!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마음이 완고(完固)해질 뿐,(마르6,52) 용서, 구원인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니 저희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듣는 마음을 주시어 보이는 현상들 안에 하느님의 뜻이 믿음으로 자라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