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15일 월요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마태10,34-11,1)
제1독서<너희 자신을 씻어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17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화답송>시편50,8-9.16ㄴㄷ-17.21과 23(◎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복음<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11,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또는, 보나벤투라 기념일 독서(에페 3,14-19)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독서 (이사1,10-17)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1)
고대 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아무리 격렬하게 분노할지라도 제사만 드리면 얼마든지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지극한 정성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제사, 곧 값 비싸고 가치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 신의 분노를 달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범죄를 저지르고서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당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그 눈을 가리고자 바치는 그러한 제사를 받지도 원치도 않으신다. 그분은 철저히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성품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제사만을 합당한 것으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당신이 스스로 대답하신다. 이 대답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무수한 제물이 하느님께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 물렸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굳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eb)는 제사를 드릴 때 동물의 뱃속 내장 부분에서 떼어내 불태워 드리는 지방 성분을 가리킨다(레위3,9). 제사드릴 때 다른 부분을 먹는 것을 허락되었지만, 피와 굳기름 만큼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성별되었으며,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레위3,17).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먹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는 그 기름마저도 원치 않으셨다. 이는 다름아닌,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마음과 삶, 제사가 도리어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과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기 떄문이다.
한편, '살진 짐승'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건강하고 품질이 좋은 짐승을 잡아 드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시대 말기에 병든 것과 저는 것 등 값이 떨어지고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제물로 드렸던 것(말라1,8)에 비하여, 매우 많은 정성을 드린 제사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삶이 그들의 값비싼 제물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아니 하느님 대전에 역겨운 것으로 비쳐지도록 만들고 말았다.
또한 '나는 ~ 물렸다'에 해당하는 '사밧티'(sabathi)의 원형 '사바으'(sabah)는 배부르게 먹어 완전히 만족한 상태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물릴 정도로 싫증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무언가를 물릴 정도로 먹으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거북하고 그 자체가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이 된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제사드리는 자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드리는 굳기름을 받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도리어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여기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는 말씀으로 형식적 제사가 당신께 아무 유익이 없음을 밝히신데 이어, 이제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고 보다 직접적인 말씀으로 형식적 제사의 무용성을 밝힌다.
여기에서 '싫다'가 원문에서는 '기뻐하지 아니한다' 로 되어 있는데,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하파쳇티'(haphatsethi)의 원형 '하페츠'(haphets)는 본래 관심있는 어떤 대상을 향해 몸을 기울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파생되었는데, 여기서는 강한 의미의 부정어 '로'(lo)와 함께 쓰여, 주님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피에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으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본래 제사를 명하는 율법의 기록에 의하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 그리고 그중 피는 가장 거룩한 것으로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으로 묘사된다(민수18,17). 율법이 명하는 것과 똑같은 짐승, 살지고 좋은 제물을 잡아 바치는 피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님의 반응이 다른 것은, 하느님께 제물을 잡아 바치는 그들 자신들의 손에 무죄한 희생자들, 약자들의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이사1,15-17).
히브리 사회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피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이것은 피가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을 물러내는 속전의 개념으로 드리는 피는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의 일부였다. 더욱이 이방 여러 종교들은 그들의 신들이 피에 굶주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피를 제물로 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드린 것은 이방 사람들과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레위17,11), 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만은 동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소중한 제물이었던 피를 하느님께 드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바른 인식도, 그분께 대한 바른 삶도 갖추지 못한 채, 제물인 피에만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도 않으면서 피만 드리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들의 이같은 행태는 그들 스스로 그들의 제사 자체를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성품과 뜻을 올바로 인식하지도 않고,그에 부합한 삶과도 거리가 먼 그들의 제사는, 그야말로 무능하고 무가치하고 헛된 이방신을 향한 제사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그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따라야 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칼’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삶’을 자르고, ‘자기 십자가를 피하는 삶’을 베어 내며,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삶’을 잘라 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께 충실한 데서 비롯하는 단호함이라는 ‘칼’을 필요로 합니다.
어설픈 제자에게 들린 ‘칼’이 떠오릅니다. 자기 실속을 위협하는 복음의 요구를 잘라 내고, 주님의 일을 베어 내며, 복음의 가치들을 쳐 내는 칼, 자신을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칼’은 누구의 칼인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 삶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평화의 중심에 그분 대신 ‘나 자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보여 준 제자의 삶이 우리 안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내(뜻)을 위해서 아니라 하느님(뜻)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
독서(이사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 하느님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제사 행위가 잘못 되었다는 말씀이신 것.
제사 행위가 아니라 그 제사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는 말씀.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 그 제사 행위는 하느님의 뜻을 짓밟는 헛된 것이라는 말씀.
(히브10,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 하느님은 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희생, 그 하늘의 의로움으로 죄인들이 살아나는 곧 십자나무의 대속, 그 사랑을 깨달아 그 십자가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이 이르라고 주신 제사인데, 그 제사의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온갖 종교행위와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자신들의 선행으로 복 받겠다 하니~~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 대속의 죽음 그 사랑의 제사 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미사)를 드려야 할 것을~
그 감사와 찬양이 아닌 자신의 선행을 위한, 뜻을 위해 어린양을 계속 죽이는 그 제사를 드리는 그 제사의 피로 가득하니 어떻게 용서(치유), 구원이 이뤄지겠는가,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구원의 제사는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완성하셨으니 더 이상 제사는 없는 것.(히브10,28참조)
제사의 제물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도 아닌 것. 우리의 영심, 희생, 온갖 종교행위로 준비한 예물(제물)은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에페2,9참조)
제물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이시며 그 속죄의 제물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것.
(창세3,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 어린양의 가죽 옷을 준비하신 하느님, 가죽(오르)은 빛을 의미한다. 빛이신 예수님이시다(요한1,4)
(창세22,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 이사악을 살리기 위해 번제물 어린양을 예비하신 하느님,
성경은 그 하느님을 사랑 의로움이라 하고, 그 구원의 사랑, 의로움은 하느님에게서만 있는 것(이사64,5 시편48,11참조)
그래서~
(로마3,25-26)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 왜~! 당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세요? 우리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에~(이사43,3)
십자가 대속의 죽음 그 사랑 의로움을 깨달아야, 받아야 하느님께 감사로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것.
(에페1,5-6)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토브)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거저)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 믿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이지요.
(히브10,12. 22) 12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이미 완성된 제사를 계속해서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악한 행실인 것.
그것은 십자가의 완성된 제사를 믿지 못하고 나의 열심을 더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다.
17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하늘의 의로움을 배우고 깨달아 믿는 것, 그리고 하늘의 의로움을 전해주어 이웃이 죄에서 깨끗해 지도록 도와 주는 것. 그 모두가 선행(토브- 좋은일, 착한일)인 것이다.
(시편31,2)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시편48,11) 하느님, 당신 이름처럼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집니다. 당신의 오른손이 의로움으로 가득합니다.
(마태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아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평화는 하느님의 열정(熱情)이 이루신다.
(마태10,34─11,1)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세상의 돈, 명예, 의로움이 주는 그 평화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올바른 하늘의 평화의 길로 돌아와 살게 하시려고 칼을 던지시는 것이다. *칼(발레인 마카이)- 전쟁 용어로 ‘격렬하게 던지다. 자르다.(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다) 사람의 그 어떤 수고, 노고도 결코 평화를 줄 수 없다. 역사가 증명하지 않는가?
(예레6,13-14) 13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예언자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고 있다. 14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면서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
= 평화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열정이 이루신다.(이사9,6) 그 평화는 우리의 죄로 대신 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미카5,4 이사53,5 에페2,14 참조) 곧 하느님의 사랑, 열성이 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 누리는 평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세상의 것이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우리 스스로가 속이고, 속고 있다.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골로1,19-20)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예수)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평화가 아닌, 세상의 힘, 자기 열심히 이루려는 평화, 곧 안식을 줄 수 없는 그 위선의 평화로 뭉쳐있는 가족 관계를 칼로 가르신다.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에페6,17)
곧 말씀 안에 머물면서 그 말씀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 죄인들의 용서,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을 깨닫게, 찾게 될 때 세상이 주는 평화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아는 그 잘라짐,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다. 육의 본능을 잘라내는 것이기에 속은 쓰리다. 그러나 영은 기뻐한다.
(묵시10,10)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말씀)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가족들이 하느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과 동시에 목숨과 같은 부모, 자식이다. 그들과 함께 하느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보고, 그 자신을 더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음이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우리의 죄로, 대신 죄로, 저주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가 달렸어야 할, 내 죄의 십자가였음을 믿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제자인 것이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원수 같은 집안 식구가 현실의 내 십자가이다.
그 현실의 십자가 곧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원수 같은 식구(이웃)를 사랑할 수 없는, 품을 수 없는 그 내안에 원망과 미움, 시기를 보며 불가능한 그 나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그래서 그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임을 깨닫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리로 메는 것이다. 그랬을 때 하늘의 용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에만 열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구원, 곧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신앙이 된다. 현실의 십자가를 잘 지고 열심히 사는 그 삶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를 악물고 잘 참아내며 잘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은 억지로, 이를 악물고 참고 하는, 그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선이라 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짓는 미움도 죄라 하신다. (루가11,39) 우리는 무엇이 제 십자가인지 다시 배워야 한다.
(마태11,29-30)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멍에, 십자가이기에 우리 죄가 용서로 가벼워져 편한 쉼(안식), 평화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하늘의 대속, 그 진리를 모르는 이들의 박해를 받는다(요한15,18~) 사실 세상은 관심이 없다. 박해는 교회 안에 있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육의 명예, 영광, 그 목숨을 위한 삶은 영의 목숨, 곧 하늘의 생명을 잃어버린다. 우리의 생명은 말씀(예수)이다. (요한1,14) 그 말씀 안에 숨겨진 진리를 깨달아 간직하는 것이 생명이다. 곧 참 진리(빛)가 주님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머리로 그분의 지체가 되면, 그를 가리켜 세상의 빛(진리)이라 하는 것이다.(마태5,14)
40 너희(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 모든 예언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진리로 선포한다.(루가24,27참조) 그리고 그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뜻, 계명을 목숨 바쳐 다 이루신 참 의인 이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믿고 간직하는 것이 하늘의 생명을 얻는 상(償), 福인 것이다.(요한14,6)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시원한 물 한잔- 한 말씀이다. 말씀을 선과 악(도덕과 윤리), 그 둘로 주지 말고, 그러면 심판이니까. 선과 악을 짝하여 하나로, 곧 예수 그리스도(善)께서 죄(惡)를 대속하시고 하늘의 생명, 하늘의 의, 영광을 주신다는 그 한 말씀을 자신의 의, 영광을 위해 짐 같은 무거운 신앙으로 걱정과 근심 속에 사는 이들에게 준다면, 모든 것으로 부터의 자유, 그 시원함을 주는 것이고 그는 결코 하늘의 상, 하늘의 용서, 생명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 지금까지의 복음, 기쁜 소식을 오늘 우리에게 선포하시려 떠나오신 것이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찾아오신 구원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여, 진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0,34~1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4)
마태오 복음 10장 34절에서 39절까지는 '제자들이 세상과 겪게 되는 갈등의 필연성 및 절대적 헌신'의 요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원문에는 마태오 복음 10장 34절과 35절에는 과거 시제, 마태오 복음 10장 36절에서 38절까지는 현재 시제, 그리고 마태오 복음 10장 39절에는 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첫 단락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피할 수 없는 세상과의 갈등 및 박해에 대해서, 둘째 단락은 제자로서 요구되는 절대적 헌신의 삶에 대해서, 세번째 단락은 자신의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함에 대해서 각각 다루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점층법의 구조를 통해 마지막 단락의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수준의 헌신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승되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외의 것들은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영원한 생명의 도(道)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높은 신앙의 경지이다.
여기서 '평화'에 해당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는 세상과의 타협을, 그리고 '칼'에 해당하는 '마카이라'(machaira; a sword)는 하나의 은유로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신앙에 대해서 복음을 들고 싸우는 적극적인 대처를 상징한다.
2024년 07월 15일 월요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사랑을 하여 보았나요?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족의 평화가 깨지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찾아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되는 고통이 그 사람과 함께하며 겪을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에도 당신에 대한 사랑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이 담긴 믿음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이 소중해지도록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가슴에 남아 우리를 움직이게도 합니다.
어쩌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분을 외면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줍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 안에 살아 계신 신비가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주 만나고 그와 자주 대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고, 그러다 사랑하게도 됩니다.
이 방법을 예수님께도 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체 앞에 머무는 신앙생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지닐 수 있도록 합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07월 15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舊約에서 罪를 들춰내신 후 新約에서 恩惠로 덮어버리신다.
왜? 罪를 모르면 하늘의 容恕, 慈悲, 平和를 모르기 때문에.
복음(마태10,34-11,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의 뜻을 떠난 카인의 후예들인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자신들의 뜻을 위한 법(法)으로 바꿔가며, 또 세상의 물질, 문명, 문화, 과학, 경제를 발전시켜가며 그것들이 평화를 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창세4,21-24) 또한 거짓 사도들이 양의 옷차림을 하고, 착한 모습으로 와서 착하게, 의롭게 살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 말을 믿고 있다. (마태7,15 2코린11,13-15 참조)
아니다, 속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닌 거짓들이 진리가 된 세상이다. 역사가 말하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악(惡)해져 가고 있고 평화가 아닌 절망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떠난 악한 생각들이 인정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세상을 기대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칼을 뽑으실 수밖에 없다. 가짜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세상이 속이고 있는 가짜 평화에 대한 갈망을 잘라 내시고, 영원한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다.
(잡회22,21) 21 친구에게 칼을 뽑았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라. 우정을 돌이킬 길이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세상의 죄(罪)를 없애시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세상의 모든 죄(罪)를 대속(代贖)하실 속죄(贖罪) 제물(祭物), 어린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이 악(惡)이며 죄(罪)라는 것이다.
(이사53,5)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하느님이 먼저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산다.
하느님의 뜻은 하늘의 영원한 평화, 생명이고, 인간들이 추구(追究)하는 세상의 것들의 결국(結局)은 땅속이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위해 세상(世上)평화(平和)를 추구하는 가족을 부수신다.
세상의 것을 위해 뭉친 가족이라면 식구가 서로에게 원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도 원수가 된다.(필리3,18)
(골로1,21-22)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십자가, 피의 새 계약)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속죄 제물)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38 (그러므로)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현실의 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죄성을 보고, 그 ‘내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 제 십자가로 지고 따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로마6,6)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육(肉)의 욕정(欲情)과 욕망(慾望)의 죄(罪)가 죽은 것이다. 육의 목숨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육(肉)의 목숨을 위한 신앙(信仰)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나오는 것이 죄(罪)밖에 없다고 하신 것이다. (마르7,20-23)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용서(容恕)의 십자가(十字架)’를 ‘제 십자가로 지고 따라오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목숨, 육의 욕망을 위한 삶을 고집한다면 영원한 죽음이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그래서 매일 ‘십자가의 복음(福音), 피의 새 계약’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나 사랑을 위한 이기적 삶’을 버리는(否認) 신앙을 살아야 한다.
어두운 땅 속에 영원히 갇히지 않으려면~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8,10)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믿음)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40 너희(제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야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자기 버림, 부인(否認)으로 ‘하나 됨’ 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예언자(말씀)로 오셔서 ‘하느님의 뜻을 십자가(十字架)에서 다 이루신 의인(義人) 그리스도 예수님’을 말씀하심이다.
(1코린1,30) 30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구원)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시원한 물 한 잔? 갈증(渴症), 목마름을 해갈(解渴) 해 살리시는 생명수, ‘주님의 한 말씀’이다.
(아모8,11)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그러니까 세상의 좋은 말, 훌륭한 지혜(知慧)의 가르침을 아무리 매일 주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주지 못하면,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요한4,13)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말씀, 성령)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이 물- 땅, 세상의 말은 목숨을 다시 살리지 못한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 인간의 뜻, 죽음의 욕망인 유대주의, 그들의 속셈, 죄성을 드러내어 하느님의 구원의 뜻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십자가(十字架)의 복음(福音)이 ‘덮으시러’ 가시는 것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아멘)
☨은혜, 생명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