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복음선포 (마르 16,15-18)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바오로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대하여 자세히 전하는데, 그는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길에서 예수님을 뵙고 나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하느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셔서, 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려고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다.(사도 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철저히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었다.(마르코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독서 (사도22,3-16)
사도행전의 이방인 선교를 다룬 후반부(사도11,19-28,29)는 선교 무대의 주인공이 베드로가 아니라 바오로이다.
후반부의 첫째 부분(11,19-21,16)은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 안티오키아 선교와 세 차례에 걸친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다룬다.
1차 선교 여행(13,3-14,28)과 2차 선교 여행(15,36-18,22)사이에 열렸던 예루살렘 회의(15,1-35)는 서로 다른 관습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2차 선교 여행 때에 아테네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17,16-34)는 그리스도교 복음을 다른 문화권 안에 심을 때 필요한 전략을 가르쳐 주고,
3차 선교 여행(18,23-21,16)을 끝내면서 밀레포스 해안가에서 에페소 원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20,17-38)는 이상적 선교사의 삶을 묘사한다.
후반부 둘째 부분(21,17-28,29)은 유다인들과 로마인들의 박해 앞에서 교회를 변호하고 보호하는 호교론이다.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뜻하지 않게 유다교 율법과 관습을 무시했다는 오해를 받고 성전에서 체포된 바오로는, 유다 최고 의회 앞에서 그리고 로마의 고관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21-24장)
오늘 독서 사도행전 22장 3-16절은 히브리말로 유다 최고 의회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때문에 성전에서 체포된 자신을 해명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회심을 했는지 밝히는 사도행전 9장 1-22절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갈라디아서 1장 11-24절도 참조바란다.
"사울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길은, 오직 그를 말에서 거꾸러트리는 길밖에 없었다."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er)라는 사람이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한 말이다.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의 현장에 있었고 그의 죽임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7,58)"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사도8,1)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사도8,3)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사도9,1-2)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뿌리째 흔드는 박해로 이어졌지만, 그 박해는 도리어 교회를 견고하고 굳건하게 세우는 역할을 하였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퍼지게 하면서, 복음이 온 세계로 뻗어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스테파노의 순교의 현장에 있던 사울이 스테파노의 피의 순교의 댓가 때문인지 몰라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방인들을 위한 위대한 복음 선교사로 탄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다마스쿠스에서 18km 떨어진 곳(현재 지명 코갑)에서 사울은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사울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하늘에서 비추는 강렬하고 큰 빛에 의해 낙마한다. 요새로 말하면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 정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2001년도에 교회를 건축했는데, "바오로 낙마 교회" 혹은 "바오로 회심 교회" 라고 부른다.
사울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는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사도22,7-11참조)
사울은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고(사도22,11 : 9,8),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9,9) 사울은 눈을 떴지만 앞을 볼 수가 없는 상태가 사흘 동안 계속 되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사울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가 율법과 예언서에 정통했으나,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아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사울은 사흘간의 영적 암야인 "어둔 밤"을 통해, 자신이 가진 메시아에 관한 성경의 지식과 말씀을, 자신이 박해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로 포커스를 맞추고 정향하는 단식 피정을 한 것이다.
그 사흘 간의 단식 피정 중에, 진리의 성령께서는 사울의 이성에 은총의 빛을 비추어 주어, 모든 혼돈을 깔끔히 정리하게 해 주셨을 것이다. 이제 사울은 사흘 후에, 하나니아즈라는 예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은 봉사자를 만나 안수받고,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된다.
하나니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사도9,17)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게된다. 사울의 회심은 복음 전파의 흐름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된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은 복음을 소아시아로, 그리고 로마까지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먹으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내롭게 지켜 볼 필요가 있다. 그들안에서 그리고 그들 뒤에서 어떤 영들이 역사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특히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게속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시간들 두고 일이 되어가는 과정들과 열매들을 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가 읽혀진다. 악은 결코 선을, 거짓은 결코 진리를, 사탄과 그 졸개들은 결코 하느님을 이기지 못한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 (마르16,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5)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16장 15절보다 앞선 부분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불신앙적 모습으로 보여 주면서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6장 15절 이후부터는 이렇게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의 명령을 받고, 능력있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서 그 부활을 증거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의무가 믿는 이들에게 수행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기만 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에서의 강조점은 복음 전파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은 제자들을 중심한 유대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자들은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앙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이방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현존은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깨뜨리기에 충분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순간에 기존의 무지와 불신앙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부터 깊이 구세주로 영접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대상에서 이방인들도 제한되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반증하고, 이방인들도 부활의 복음 앞에서 무지와 불신앙의 틀을 깨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온 세상'으로 번역된 '톤 코스몬 하판타'(ton kosmon hapanta; all the world)는 '세상'(세계)을 뜻하는 '코스모스'(kosmos; world)와 '온', '모든 것'을 뜻하는 '하파스'(hapas)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당대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상(세계) 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세대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로 번역된 '파세 테 크티세이'(pase te ktisei; to every creature)는 보통 만민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복음이 어느 특정 지역과 민족에게 제한되지 않고,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함을 이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할 때의 사울은(바오로는)
'이리 떼'의 두목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사도 9,1-2).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이리'가 회개해서 '양'이 된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리'였던 사람은
없습니다.
길 잃은 '양'이 '이리'가 되는 것뿐입니다.
(박해자들도 모두 예수님의 양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겉으로는 '이리'가 회개해서 '양'이 된 일이지만,
실제로는 '잃은 양'으로 살고 있다가 '되찾은 양'이 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하느님을 안 믿다가 믿게 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잘 믿게 된 일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모르고 있다가 믿게 된 일입니다.
(신앙 자체가 바뀐 일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 자신의 믿음입니다.
그의 '회심'은 그 부르심에 올바르게 응답한 일입니다.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였기
때문에(사도 26,5)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일은 한 사람의 바리사이로서
자기 나름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뒤에야 비로소
그게 올바른 응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됨으로써 올바른 응답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응답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를 처음부터 선택하셨다면 교회를 박해하기 전에 계시를 내리실 것이지
왜 교회를 박해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하느님의 섭리나 계획을 우리는 잘 모르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로봇이 아니다."가 하나의 답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죄를 짓기 전에 하느님께서 그것을 모두 미리 막으셨다면,
'인간의 역사'는 없습니다.
종교도 신앙도 없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교회를
박해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2-13)."
여기서 중요한 말은 '성실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뜻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과 열성이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였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해도 교회를 박해한 것은 죄를 지은 일인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보다 먼저 그의 충성심과 열성을 보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고 죽은 스테파노만 억울하지 않은가?"
믿음 없이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스테파노의 죽음이 '억울한 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순교는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특별하고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도 순교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하느님 나라에서 스테파노와 바오로 사도는
같은 순교자로서
같은 영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 번째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오로 사도만 너무 편애하신 것은 아닌가?
다른 박해자들은 왜 그냥 죄 속에서 죽게 내버려
두시는가?"
교회 역사를 보면, 박해자였다가 회개하고 신앙인이 된 경우도 많고,
순교자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만
편애하신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에서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문들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의 사슬이 다 풀립니다(사도
16,19-26).
그것을 본 간수는 자결하려고 했고, 바오로 사도가 말렸고,
그 간수는 바오로 사도 앞에 엎드려서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16,30)" 라고 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라고 대답합니다.
그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은 그날 밤에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간수는 박해자들의
하수인, 또는 박해자들과 같은 편인 사람이었는데
극적으로 신앙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바오로 사도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 간수는 갑자기
구원을 찾은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구원을 갈망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한 사람만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인데(마태 18,14),
사람 쪽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갈망하는가? 에 따라서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응답하기도 하고,
무시하거나 거부하기도
합니다.
바라는 것이 바뀌면, 가는
길이 바뀝니다.
바로 이것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신앙인들도
안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끝까지 가야 제대로 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대하여 세 번씩이나 전해 줍니다. 그만큼 획기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생각해 보아도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그 후의 교회 역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과 지각 변동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루카 복음사가에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기에, 루카는 이 사실을 바오로 자신이 갈라티아서에서 전하는 내용보다도 더 기적적인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바오로는 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한다면, 바오로는 회심 이전이건 이후이건 뜨거운 신앙심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고, 하느님에 대한 열성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었기에, 어쩌면 회심한 그가 열렬한 사도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느냐고 되물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오로의 회심보다 더 어려운 것은 차갑거나 미지근한 사람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황금만능주의 등 이 세상의 쾌락과 사고방식에 흠뻑 젖어 있어서 하느님의 뜻에는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바라볼 겨를도 없이 희생과 봉사와 이웃 사랑 등과 같은 복음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고속 질주만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하고 고백하면서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회심하는 것이, 바오로의 회심보다 더 큰 기적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청동 벽 같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시고 바오로 사도에게 하셨던 이적처럼 우리 안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오늘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맡기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