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마르코 4,1-20)
예루살렘 도성에 자리를 잡은 다윗은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께서 다윗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시리라고 약속하신다. 내일까지 이어질 이 독서의 전반부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윗을 선택하시어 임금으로 세우셨다는 점을 기억하게 하신다.(사무엘하 7,4-17)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7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니던 그 모든 곳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의 매와 인간의 채찍으로 그를 징벌하겠다. 15 그러나 일찍이 사울에게서 내 자애를 거둔 것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17 나탄은 이 모든 말씀과 환시를 다윗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처럼 온 세상에 뿌려질 때, 어떤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어떤 씨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코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생활 안에서 만나게 되는 아주 흔하고 평범한 소재를 통하여 하느님에 관한 진리와 신비를 깨닫게 하시는데,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씨를 뿌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고, 둘째는 밭의 입장에서 읽는 것입니다. 13절 이하의 비유 설명은 주로 밭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제자들에게, 뿌린 씨가 모두 싹이 터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그래도 어떤 씨는 열매를 맺을 것이니, 이 비유 안에는 계속해서 씨를 뿌리라는 말씀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말씀을 이천 년 동안 줄곧 읽고 듣고 묵상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비유를 무수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비유 말씀을 받아들이는 실제 상황에서는, 좋은 말을 전하면 사람들이 모두 다 잘 받아들이고 좋은 일을 하면 다들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애써 좋은 일을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누군가에게서 비난을 받게 되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꼈다면, 우리가 사도들보다도, 예수님보다도 더 뛰어나서 모든 사람을 설득시킬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저 착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듣는 모든 이가 그 가르침에 설복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그렇게 뿌려지고, 신비롭게 세상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편견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절망적인 생각으로 귀가 꽉 막혀서, 또는 게으름 때문에 무기력해져서, 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은 아닌지요?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마르4,1~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20)
마르코 복음 4장 3~8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씨'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 4장 3절에도 '씨 뿌리다'라는 동사만 나오며, '씨'라는 명사는 없다.
이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같은 자루에서 나온 '씨'의 '동질성'
(homogeneity)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즉 '씨 뿌리는 사람'이 '예수님'을 상징하고, 뿌려진 '씨'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천국의 말씀'을 상징한다면(마르4,14; 마태13,19), 같은 선포자이신
예수님께서 전한 동일한 말씀들이 어떤 이에게는 열매를 맺고, 어떤 이에게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씨'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 농사법과 팔레스티나의 농사법이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이 비유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밭을 경작하고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려놓고 밭을 고른다.
그러니까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씨가 있는 것이다.
우선 새들이 씨를 먹어버린 일차적인 이유는 씨가 길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씨가 열매를 맺기는 커녕 바로 먹혀버린 일차적인 책임은 마르코 복음
4장 15절에서 '새들'이 상징하는 '사탄'에게 있다고 하기보다는,
길의 밭이 상징하는 굳어진 인간의 마음에 있다.
그리고 '흙지 많지 않은 돌밭'(마르4,5)에서 '있지 않은'에 해당하는 '우크 에이켄'
(ouk eichen; it did not have)이 미완료 과거 시제이므로, 흙이 거의 없는
돌밭 같은 불모지의 상태가 이전부터 계속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마르코 복음 4장 5절을 해설하는 마르코 복음 4장 16절에는 '많은'을 의미하는
'폴렌'(polen; much)이라는 단어가 없이 '돌밭'에 해당하는 '페트로데스'
(petrodes; stony ground; rocky place)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흙이 거의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4장 6절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죽은 이유가 나오는데,
'뿌리가 없어서'이다.
돌과 바위투성이 땅에서 물은 금방 흘러 가버리거나 말라서 습기가 없었고,
아울러 돌과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릴 수도 없어서 죽은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4장 7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마르코 복음 4장 4절에 기록된 '길에 떨어진 씨'는 발아도 못하고 새들에게
먹혀 버렸고, 마르코 복음 4장 5절에 기록된 '돌밭에 떨어진 씨'는 겨우 뿌리만
내린 채 말라 죽은데 비해, 마르코 복음 4장 6절에 기록된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랐다.
그래서 길보다는 돌밭이, 돌밭보다는 가시덤불이 더 나은 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잘못된 판단임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좋은 밭이란 열매를 맺는 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 4장 7절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라는 표현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밭에 대한 결론이면서, 동시에 앞에 이미 언급된 두 밭에 대한 결론이다.
마르코 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당신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뿐만 아니라 이미 선포된
여러 가지 비유들의 뜻을 묻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 4장 11~12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서 6장 9~10절의 말씀이
'저 바깥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있다.
'저 바깥 사람들'은 오직 기적과 치유에만 목적을 두고 찾아왔다가,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아무런 미련없이 돌아선
일종의 '불신과 배교의 무리'이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 4장 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의 길을
봉쇄하신다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목적으로 나아갔다가 사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면
쉽게 돌아서 버리는 '불신과 배교의 무리'를 그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구원의 길을 원천 봉쇄하실만큼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마태7,6; 히브6,5.6).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라는
문제도 아니고,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가도 아니며, 또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도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열매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의 씨가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열매를 맺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좋은 신앙인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마르4,28; 마태7,20).
마르코 복음 4장 20절에서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의 '받아들여'에 해당하는
'파라데콘타이'(paradechontai; receive; accept)의 원형 '파라데코마이'
(paradechomai)로서 '인정하다'(사도16,21; 1티모5,19), '환영하다'
(사도15,4; 히브12,6)라는 뜻이다.
즉 복음을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성을 인정하고
깊이 받아들여야함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받아들임은, 마르코 복음 4장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돌밭이 순간적인
기쁨에 도취되어 받는 것과는 달리, 생명을 잃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소유와 내주'로서의 받아들임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 4장 16절의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에서
사용된 '받는다'에 해당하는 '람바노'(lambano)는 일시적 소유물을 취하는 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에, 마르코 복음 4장 20절의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환영하는'의 의미를 지닌 '파라데코마이'(paradechomai)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 자신이 소유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
쉽게 망각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명처럼 여기고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좋은 땅'이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