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3주간 목요일]등불의 비유 (마르코 4,21-25)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해 주시자, 다윗은 하느님께 그 약속을 친히 이루어 주시기를 청한다. 그는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영원히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사무엘하 7,18-19.24-29)
나탄이 다윗에게 말씀을 전한 뒤, 18 다윗 임금은 주님 앞에 나아가 앉아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19 주 하느님, 당신 눈에는 이것도 부족하게 보이셨는지, 당신 종의 집안에 일어날 먼 장래의 일까지도 일러 주셨습니다. 주 하느님, 이 또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24 또한 당신을 위하여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당신의 백성으로 튼튼하게 하시고, 주님, 당신 친히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25 그러니 이제 주 하느님, 당신 종과 그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영원히 변치 않게 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26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위대하게 되고, 사람들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 종 다윗의 집안도 당신 앞에서 튼튼해질 것입니다. 2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28 이제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당신 종에게 이 좋은 일을 일러 주셨으니, 29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짧은 가르침들이 이어진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은 지금 사람들 눈앞에 감추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등불처럼 환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사람은 그가 베푼 대로 갚음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왜 거절하셨을까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시험 문제는 아닙니다. 사무엘기 하권에서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는 반면, 역대기에서는 다윗이 피를 많이 흘리고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2역대 22,7-10 참조).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한 가지의 견해를 소개해 드리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문제는 왕권과 하느님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처음 수립될 때부터, 왕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요.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왕정이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성전을 짓는다면, 신앙이 국가 권력에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나탄이 나서서 성전 건립을 반대한 것은, 대대로 예언자들이 왕권의 절대화에 맞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정치에 예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왕조를 약속해 주시는 것이 다윗과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였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해 드렸기에, 이제 하느님께서 내 편이 되시고 나를 도와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기에 내가 응답할 수 있습니다. 임금인 다윗이 끝없이 되풀이하여 자신을 “당신 종”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다윗처럼 내가 하느님께 드린 것을 생각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늘 먼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너그러움이나 넉넉함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너그러우심과 넉넉하심을 체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고, 그 체험의 정도와 깊이만큼 나의 너그러움도 커질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주님께 의탁하면 할수록 그분의 것이 모두 내 것이라는 놀라운 은총에 눈이 열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2사무7,18-19.24-29)
"당신 종에게 이 좋은 일을 일러 주셨으니,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28ㄴ-29)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좋은 일'은 앞 문장과 연관 지으면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하느님의 약속이 진리라는 사실 안에서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 약속의 말씀이 자기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까지 미치는 영원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처럼 다윗은 그 말씀이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약속으로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로 번역딘 '웨앗타'(weatha; now)는 사무엘서 하권 7장 18절 이후부터
계속되어온 기도의 결론적인 내용을 시작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한편 '기꺼이 ~ 해주십시오'로 번역된 '호엘'(hoel)은 사역형으로만 쓰이는
동사이며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하기를 기꺼이하는 마음을 보이소서',
'~하기를 기뻐하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을 내리시어'로 번역된 '우바레크'(ubarek; to bless)는
'호엘'(hoel)과 직접 연결된 말로서, 따로 번역하기 보다는 같이 번역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호엘 우바레크'(hoel ubarek)를 번역하면 '축복하기를 기꺼이하소서',
'축복하기를 기뻐하소서' 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간구의 근거를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에 두었기 때문에,
간구하면서도 대담하게 하느님을 향해 '기뻐하소서'라는
명령형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따라 행하시는 것을 절대적으로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담한 간구를 드린 것이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지만,
문맥으로 볼 때 이 부분은 앞 문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문장에서 다윗이 주님께 '축복하기를 기꺼워하소서'라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복을 주시기를 기꺼워하소서. 왜냐하면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다윗은 간구의 근거를 철저하게 약속의 말씀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문에는 여기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앞에
'주님의 축복으로', '주님의 은혜로'로 번역될 수 있는 '우밉비르카테카'
(umibbirkatheka; and with your blessing)가 있는데, 새 성경은 이 번역을
뒷 부분에 있는 '당신의 복을'에서 '당신의'로만 번역하고 말았다.
'밉비르카테카'(mibbirkatheka)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과
'축복'이라는 뜻의 '뻬라카'(beraka)와 2인칭 어미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복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뜻의
'예보라크'(yeborak)와 함께 번역하면, '당신의 축복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축복으로부터 복을 받게 하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다윗은 다른 곳에서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어가는 간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12장 2절, 3절에서도 아브라함에게 내리는 축복의 근원이
주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다윗은 자신에게만 어떤 새로운 축복이 내리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구세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신실한 계약의 줄기에서
다윗 계약을 통하여 주신 하느님의 축복이
다윗의 왕조를 통해 이어져 가기를 간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담한 간구는 하느님께서 이미 그에게
다윗의 왕조를 영원한 왕조로 세우시겠다는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계획을
다윗 계약으로써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2사무7,12).
이러한 다윗 계약과 다윗의 기도는 왕국 분열 이후 북부 이스라엘 왕조는
계속 바뀌었으나 남부 유다 왕조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축복으로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오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목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4,21-25)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2)
마르코 복음 4장 22절은 선문답처럼 금방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다.
한글 새 성경이 원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르'(gar; for)를 번역하지 않아
마르코 복음 4장 22절이 앞 절인 4장 21절과 별개의 문장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가르'(gar; for)를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면, 4장 22절은 4장 21절의 종속절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4장 22절의 본문 자체도 부정어 '우'(ou; nothing)와 '메'(me; not)를
두 번 사용하여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구적 의미를 살려 직역하면,
'왜냐하면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숨겨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유대인의 속담을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루카8.17참조).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이
비유로 설명되는 것은 언젠가 드러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에서 등불을 가져 오는 이유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빛을 밝히기 위한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이
비유로 선포되는 이유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므로, 지금은
미약해 보여도 이 복음은 머지 않아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말이다
(마르16,15).
두번째로 이것은 메시야 비밀 사상과도 관련되는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마르1,43.44) 이유 역시 메시야가
아니시기 때문이거나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마르15,2).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일반 무리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천국은 감추어져 있는데
(마르4,10,13), 여기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이미 천국의 씨는
뿌려졌고(마르4,27), 그 씨가 아직은 미약한 단계이지만 곧 자라나(마르4,28)
크게 성장하면, 온 세상에 천국의 비밀은 공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르4,32; 사도1,8; 5,12~16).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마르코 복음 4장 22절 전반절의 '~아니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우 가르'(ou gar; for nothing)에 이어지는 후반절이다.
'감추어진 것은 반드시 빛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서 전반절과 동의적
대구를 이루며, 앞의 내용과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진술이다.
일반적으로 비밀의 강조와 유지는 그것을 영원히 덮어 두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도 있는데, 그것이 드러날 때 나타날 폭발력과 감동,
충격과 사람들의 반응을 위해 잠정적인 기간동안 비밀을 덮어 두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시고자 하는 모든 비밀은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사건 뒤로 미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마르9,9).
<등불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예수님은 '빛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신앙인은 그 빛을 받아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등불을 감춘다는 말은
신앙인이 자기의 신앙을 감추는 것,
즉 신앙을 증언하지도 고백하지도 않고, 신앙인이 아닌 척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신앙을
감추면 박해를 안 받을 것이고, 몸은 편안해지겠지만,
신앙인으로서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비추지 않는 등불은 등불이 아닌 것처럼
자기의 신앙을 감추는 신앙인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드러나기
마련이고... 드러나게 되어 있다." 라고 표현되어 있어서,
등불이라는 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말씀 바로 뒤에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라는 말씀은,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추고 숨긴다고 해도
예수님의 복음은
언젠가는 예수님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때가 되어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면,
그때 우리가 받을 몫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이 말씀은,
"언젠가 때가
되어 드러나기 전에 너희가 먼저 능동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그 나라 건설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때가 되어 그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시민 자격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했는지,
예수님의 명령대로
세상을 비추는 일을 제대로 했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요즘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관심 갖지 말라고,
교회는 사회 참여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등불 구실을 하지 말고
등불을 끄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등불 구실을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냥 미신을 믿는 집단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말씀은,
"잘 들어라." 라는 뜻이 아니라, "새겨듣고 행동으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야고 2,17)
실천하지는 않고 듣기만 하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더 많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후하게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을 앞의 '등불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더욱 빛을 낼 것이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난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도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이 말씀을 앞의 '등불의 비유'와 연결하면,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한 사람은 더욱 빛나는 등불이 되겠지만,
등불 구실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가지고 있던 등을 잃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미 앞에서 했던
"자기의 신앙을 감추면 신앙인으로서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다."
라는 말과 같은
말이 됩니다.
이 말씀에서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 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서, 즉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등불 구실을 하지 않아서 그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근처에 가서 멈추면 '밖에' 있는 것이고, 못 들어간
것입니다.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간 만큼 이익이 되는 경우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대충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안 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에서도 나오는데(마태 25,29)
아무것도 안 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된 세 번째 종에 대한 판결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마태 25,30)."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