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토요일] 잔잔해진 호수 (마르코 4,35-41)

2016. 1. 30. 오전 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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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잔잔해진 호수 (마르코 4,35-41)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다음, 나탄 예언자가 다윗을 찾아가 그의 잘못을 일깨운다. 다윗이 범한 간음과 살인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행위였는데, 그도 자신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 하느님께서는 통회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신다.(사무엘하 12,1-7ㄷ.10-17)
그 무렵 1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탄이 다윗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2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으나, 3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이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4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
5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탄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6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
7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1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거슬러 너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게 하겠다.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너의 아내들을 데려다 이웃에게 넘겨주리니,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너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것이다. 12 너는 그 짓을 은밀하게 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할 것이다.’”
13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14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15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 16 다윗은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 17 그의 궁 원로들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는 마다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맞자, 그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에게 잠잠해지라고 명하시어 물을 고요하게 만드신 다음, 제자들에게 믿음이 부족함을 한탄하신다.(마르코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12,1-7ㄷ.10-17)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0)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서 하권 12장 9절에서 다윗의 범죄의 성격 및 범죄의 내용을 지적하신 후, 사무엘서 하권 12장 10~12절에서는 이같은 흉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다윗에게 임할 엄중한 징계를 예언하신다.

그래서 주의를 환기시킬 뿐 아니라 과거와 대조되는 이 시점을 가리키는 '앗타'(atha; '이제'; now)라는 부사를 가지고 시작하면서 그 징계가 엄중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로 타쑤르'(lo thasur)절대적이고 영원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로'(lo) + 미완료 구문'으로서 다윗이 이 징계를 영원히 안고 살아야만 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음이 항상 그 가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생존 당시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 밧 세바와의 간음으로 낳은 아들이 죽었으며(2사무12,16~23),

다윗의 딸 타마르가 다윗의 장자 암몬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으로(2사무13,1~22)인해서

타마르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였으며(2사무13,23~29), 압살롬은 부친 다윗에게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하는 등 죽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2사무15,1~18; 18,9~15).

그러나 '영원히'에 해당하는 '아드 올람'(ad ollam)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는 다윗 당대로만 그치지 않았다.

즉 다윗 사후 그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위 찬탈을 노리다가 동생 솔로몬에 의해 처형되었고(1열왕2,1-11),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그뿐 아니라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사이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두 왕국은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다가 결국 바빌론과 아시리아에 의해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에 보내신 징계의 칼부림은 다윗 자신이 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한 칼에 대한 보응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자신이 심은 죄악의 열매를 거두어야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징계하시는데 그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심으로써 악의 씨를 뿌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셨다(갈라6,7).

'네가 나를 무시하고 ~ 때문이다' 

앞의 사무엘서 상권 12장 10절 전반절에 언급된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공의의 심판의 근거를 설명하는 후반절은, 이유의 접속사 '키'(ki)뿐만 아니라 사무엘서 하권 12장 6절에서 다윗이 부자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문장에도 등장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에케브'(eqeb)를 사용하여 심판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다윗은 그 비유 속의 부자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가혹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자신의 입으로 부자에 대해서 엄중한 심판의 선고를 한 다윗은, 동일한 근거에서 내려지는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무엘서 하권 12장 9절에서 이미 사용된 '무시하고'라는 표현을 여기서 다시 한번 사용하여('베지타니'; bezithani; because you dispised me),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의 근본 동기가 바로 당신을 무시하는데 있음을 강조하신다.

물론 다윗의 범죄는 인간의 윤리 기준에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범죄의 동기가 하느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경멸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했다는 데에  가장 큰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나탄은 다윗이 범한 죄를 폭로하면서 그가 자기 죄를 깨닫게 합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다윗은, 오직 자기 욕망과 사리사욕에 따라 타인의 생명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전형적인 전제 군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그가 “나를 무시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았다고 말씀하시고, 잘못을 깨달은 다윗도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합니다. 나탄이 다윗을 찾아왔을 때 그가 올린 기도라고 전해지는 시편 51편에서는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악한 짓을 했다고 고백합니다(6절, 어제 화답송).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은 우리야가 들었다면 상당히 언짢지 않았을까요?
피해를 끼친 사람이 사죄하는 마음은 전혀 갖지 않고 하느님께만 잘못을 고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기도에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신앙인이 깊은 통찰을 하도록 이끄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우리야의 생명과 그의 아내를 거슬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을 거슬렀다는 것에 대하여 깊이 참회합니다.
우리도 자주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후회와 회한을 갖거나 양심을 성찰하면서 죄를 고백합니다. 이러한 순간들은 그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반성만 하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을 당사자들과 무관하게 하느님 앞에 가서만 털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범한 행위와 죄악의 무게를 절감하면서 속죄하고 화해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범한 죄악이라 하더라도, 죄는 늘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이기에 이러한 과정을 요구합니다.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복음(마르4,35~41)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9~41)

'꾸짖으시고'로 번역된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경우 베드로를 향해서(마르8,33), 더러운 영을 향해서(마르1,25; 9,25), 열병에 대해서(루카4,39), 그리고 여기서는 바람을 향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서 인간과 영계와 질병에 대해서까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권세가 미치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원 사업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를 꾸짖으셨으며, 질병과 부마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악령들을 꾸짖으셨고,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막는 풍랑을 꾸짖으셨다.

이처럼 '꾸짖는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표출된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을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행하신, 권위있는 활동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희생 제사를 바치며  달래거나 겁을 주는 방법이 아닌, 권위있는 말씀으로 꾸짖는 방법을 이용하셨다.

한편, '바람''호수'는 특별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람''호수'동시에 등장하는 점이나 마르코 복음 4장 39절 후반절에서 호수더러 잠잠하라고 했는데,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는 을 보면 그렇다.


구약 성경에서 '호수' 또는 '바다'욥기 38장 8~11절, 예레미야서 5장 22절에서 태고의 혼돈을 나타내며, 시편 69장 2절이하 이사야서 43장 2절에서는 의인이 당하는 시련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이 타신 배를 삼키고 그들을 죽이려 하는 호수를 굴복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39절'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페피모소' (pephimoso; be still)의 원형 '피모오'(phimoo)'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 분사 '페피모소'(pephimoso)는 그리스 문학의 이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령 제압을 위한 문구로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예수님 활동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부르짖음을 듣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역사는 오로지 주 하느님께 돌려지는 구약적 배경을 갖는다(시편107,29.30).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41절'복종하는가?'에 해당하는 '휘파쿠에이'(hypakouei; obey)의 원형은 '휘파쿠오'(hypakouo)인데, 여기서는 현재 능동태 단수 3인칭으로 쓰였고, 어떤 곳에서는 현재 능동태 복수 3인칭형인 '휘파쿠우신'(hypakouousin)이 쓰였다.

복수로 쓰인 것은 '바람과 호수'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풍랑의 원인을 여러가지 자연적인 요소들로 간주했기 때문이고, 단수로 쓰인 것은 풍랑의 원인을 한 위격 또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연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달리 흉폭해져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자연을 악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타락한 자연, 사탄의 세력에 의해 조종받는 자연도 이 모든 세상을 재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7-41)"




거센 돌풍이 일어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모습은,
예수님은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 대해서도 주님이시기 때문에...)




또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모습은 제자들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바람과 파도와 맞서 싸워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믿으셨다는 것은,
그 돌풍과 파도는 사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셔도 제자들만의 힘으로 헤치고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주무시지 않고 처음부터 개입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한 말은,
왜 함께 걱정하지 않으시냐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 자체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구해 달라고 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태 8,25).
그래서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처럼 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에서도 바람과 파도 때문에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또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만드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놀라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믿음도 없이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구해 달라는 말은,
아마도 자기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해 달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죽게 되었다고 겁에 질린 것인데,
그게 왜 잘못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무서우니까 무서워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제자들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신 예수님께 자기 목숨을 맡기면 됩니다.
(무섭다면, 아니 무서우니까 더욱더 예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나중에 사도들은 모두 그런 믿음을 갖게 되는데,
베드로 사도의 경우, 헤로데가 그를 죽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모습으로 감옥에서 태연하게 잠을 잡니다(사도 12,6).
돌풍과 파도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마르 4,41).
여기서 '큰 두려움'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는데,
이 두려움은 돌풍과 파도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고,
완전히 차원이 다른 두려움입니다.




돌풍과 파도는 사람의 몸만 죽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죽일 수 있는 분입니다(마태 10,28).
예수님은 바로 그 권능, 즉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예수님만 믿으면 안 죽고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과연 옳은 해석인가?
비행기 추락으로 탑승객 전원이 죽은 사고들은?
배가 침몰해서 많은 사람이 죽은 사고들은? 세월호 참사는?
지진, 해일, 태풍 같은 재난들은?
그런 재난들과 사고들을 당했을 때,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고,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살아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무시면서 그들을 외면하신 것인가?




이 이야기는 예수님만 믿으면 아무리 거센 돌풍과 파도가 닥쳐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예고하실 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은 "목숨을 잃더라도 신앙을 지키는 이는 반드시 구원하겠다." 라는 약속이지
"죽지 않게 해 주겠다." 라는 약속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박해 예고 말씀을 보면 '순교 예고'도 들어 있습니다(마태 10,21).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믿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멸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마르 4,40)
그들이 돌풍과 파도를 무서워한 것 때문만은 아니고,
'육신의 죽음'만 무서워하면서 '영혼의 구원' 문제는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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