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화요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2,22-40)

2016. 2. 2. 오전 5: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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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일 화요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2,22-40)


교회는 예수 성탄 대축일 40일째 되는 날, 곧 해마다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본디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뒤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신 것을 기념하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전례 개혁으로 1970년부터는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어 주님의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점에서 죄가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취결례’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해마다 이날 교회는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한편, 젊은이들을 봉헌 생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할 것을 권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포했던 ‘봉헌 생활의 해’(2014.11.30.-2016.2.2.)가 오늘로 끝난다.

 <초 축복>

 사제는 팔을 벌리고 아래의 기도를 바치며 초를 축복한다. + 기도합시다.
모든 빛의 샘이며 근원이신 하느님, 오늘 모든 민족들을 비추시는 계시의 빛을 의로운 시메온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이 초에 ✠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이 초를 손에 들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백성의 정성을 굽어보시어, 현세에서 덕을 닦아 마침내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말라키 예언자는 언젠가 주님께서 홀연히 당신 성전으로 오시리라고 예언한다. 그분께서 오시는 날은 선과 악을 갚으시는 심판 날이며 세상을 정화하시는 날이다. 그분께서는 사제들을 정화하시어 당신 백성이 하느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실 것이다.(말라키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시편 24(23),7.8.9.10(◎ 10ㄴㄷ)
◎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성탄 축일 후 40일이 되는 날,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한다. 말라키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실 때, 시메온과 한나는 이스라엘의 기다림이 이제 끝나고 구원이 도래했음을 알아본다.(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 봉헌 축일 제1독서 (말라3,1-4)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1ㄷ,ㄹ)

하느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주님이 홀연히 그의 성전에 올 것을 예고하신다. 여기서 '주님'과 '계약의 사자'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 '계약의 사자'가 동의어로 됨으로써, 계약의 사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주 하느님은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이 성립된다. 이같은 사실은 요한 복음 1장 1절필리피서간 2장 6절에서도 유사하게 제시되지만, 삼위일체의 진리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사자'에 해당하는 '우말르아크 합베리트' (umallak habberith;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로 표현된 것은 그가 성부 하느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자, 곧 하느님의 계약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의 계약이란 옛 시나이산 계약(옛 계약; 구약; 舊約)과 대비되는 '새 계약'(the new covenant)이다. 새 계약(신약; 新約)에 대해서는 과거 이사야 예언자(이사55,3; 61,8), 예레미야 예언자(예레31,31-34), 에제키엘 예언자(에제16,62; 37,26)등에 의해 이미 예언된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 자신이 흘리신 피가 바로 새 계약을 이루시는 피임을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선언하셨다(마태26,28).

그런 점에서 말라기 예언서 1장 1절ㄷ하느님께서 자신의 무죄한 피를 흘려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를 새 계약으로 일치시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예언한 것임에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너희가 찾던'에 해당하는 '앗템 메바크쉼'(athem mebaqshim)히브리어에서 사용을 안해도 의미가 통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구하다', '추구하다', '찾다' 등의 의미를 지닌 '빠케쉬'(bakesh) 동사의 강조 분사형이 사용되어, 직역하면 '바로 너희들이 간절히 구하고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너희가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앗템 하페침'(athem hapetsim)'바로 너희가 몹시 기뻐하는'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사실 동의적 대구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였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메시야를 갈망한 것은 메시야가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영광을 누리는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 하느님께서 계약의 사자, 메시야가 '홀연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메시야가 오실 때 그들이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피트옴'(pithom)'갑자가', '놀랍게', '예기치 않은 때에'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메시야가 누구도 알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온다는 의미,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메시야가 오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장차 메시야의 재림 때의 상황과도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그 계약의 사자'자기 성전'에 오실 것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당하는 '헤칼로'(hekallo)'그의 성전'(his temple)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의 궁전'(his palace)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머무는 처소인 '궁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성전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탄생하신 지 여드레 만에 성전을 방문한 사건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지 40일 만에 성전에서 봉헌되었고(루카2,22-39), 마지막 수난 주간이 시작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던(마태21,12-17) 사건을 예고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헀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메시야가 오시는 성전을 '그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자리, 곧 메시야께서 당신 스스로 자원하여 이루실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세우실 당신의 몸인 교회, 당신의 인류구원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 한 가운데 영신적 임금으로 좌정하셔서 통치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3)

'깨끗하게 하고' 해당하는 '웨티하르'(yethihar)의 원형 '타헤르'(thaher)는  어원상 육체적, 도덕적으로 불결하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를 나타낸다(창세35,2; 레위12,7; 민수8,21; 에례33.8).

이 단어는 구약에서 78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정결례 의식주로 다루는 레위기에서 무려 35회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제사와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백성들로 세우기 위해서 그 선택한 백성들을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 성화(聖化)의  의미 사용되었다.

그런데 말라기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힘주어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마치 금과 은을 정련하듯이 그들을 정련하신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정련하여'(단련,연단)에 해당하는 '웨직자크'(yeziqaq)의 원형 '자카크'(zaqaq)광석을 정련할 때에 불순물을 용해시켜 버리고 순수한 금속만을 추출해 얻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욥28,1).

여기서 이 단어는 메시아께서 레위 자손으로 표현된 신약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거룩한 고난, 시련과 환난 등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불로 그들의 죄악을 사를 때에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들의 인격의 모난 부분을 깎아 내고 연마할 때 아픔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정금같은 순수한 면모를 갖춘 참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신앙의 인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욥23,10; 야고 1,4)  

특별히 오늘 2월 2일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이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고 있기에,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봉사자들의 거룩한 정결, 봉헌된 정결, 성결(聖潔)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여 중요한 단어들을 묵상해 보았다.   



렘브란트의 예수를 주님으로 알아본 시메온과 안나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Simeon and Anna Recognize the Lord in Jesus,

        c. 1627, Oil on wood, 56x44cm Kunsthalle, Hamburg

 2월 2일 화요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루카2,22-40)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4~35)

시메온이 축복하는 대상'그들',요셉과 마리아로 밝히고 있다. 당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꽤 오랫동안 안고 있었으며,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하여 축복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듯 하지만, 시메온은 자신이 감히 구세주 예수님을 축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부모들만을 축복했다고 본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부모를 향해 시작된 시메온의 축복은 곧 마리아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보다 더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예수님으로 인해 직접적인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마리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즈음에 일찍 죽은 것으로 전해지며, 마리아는 그 이후까지 살아 예수님께 대한 온갖 비방과 더불어 십자가 처형까지 목격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많은 사람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의 지대함과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쓰러지게도 하고'로 번역된 '프토신'(ptosin; falling)의 기본형은'프토시스'(ptosis)이며, 그 뜻은 '무너짐', '넘어짐'을 뜻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어지게 될 자들교만하여 꼿꼿이 서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넘어질 것이다.

반면에 '일어나게도 하며'로 번역된 '아나스타신'(anastasin; rising)의 기본형 '아나스타시스'(anastasis)'일어서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니스테미' (anistemi)의 명사형으로 '일어섬'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비참한 죄의 상태(예레17,9)로 인해 절망하여 넘어져 있던 자들은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어설 것이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루카 복음 2장 12절에서도 나오지만, 예수님 자신은 '표징'(sign)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표징이 되기 위해서 '정해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반대를 받는'으로 번역된 '안틸레고메논'(antilegomenon; which will be spoken against)'반대'를 뜻하는 '안티'(anti)'말하다'를 뜻하는 '레고'(lego)의 합성어로서 '반대하여 말하다', '적대적으로 말하다'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는 수동태 현재 분사로 쓰여 '적대적인 말을 듣는', '비방을 받는' 이라는 뜻이며, 이 상태가 예수님께는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항상 반대를 받으신 예수님의 공생활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와 비방의 최고 절정은 인류 구속을 위한 성혈의 제단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 되심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었지만, 그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멸망'의 표징인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여기서 '칼'로 번역된 '롬파이아'(romphaia; a sword)는 전쟁 때 살상용으로 사용되는 '큰 칼', '긴 창'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영혼을 가득 채운 '큰 고통'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당신의 피'로 번역된 '수 ~아우테스'(sou ~autes; your own)는  고통을 당하게 될 대상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직역하면 '너 여자 자신의' 이다.

마리아의 영혼에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루카 복음 2장 34절 후반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마음속 생각까지도 다 드러내 단죄하며,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배척과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아들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영혼을 뒤흔들 듯한 고통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이 땅에서 수난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세사의 섭리 안에서 이미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여기서 '생각'으로 번역된 '디알로 기스모이'(dialogismoi; the thoughts)'마음속의 궁리', '뒤틀어진 생각'등을 의미하는 '디알로기스모스' (dialogismos)복수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루카5,22; 6,8).

여기서도 이 단어를 사용해 장차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실 것이 예언되고 있다(마태23,25~27; 마르7,20~23).


<'빛'으로 오신 예수님>송영진 모세 신부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에 초를 축복하면서,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음을 묵상하고, 또 우리도 '등불'로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예수님은 높은 곳, 즉 하늘에서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의 어둠을 밝혀 주시는 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이라는 말은,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인류의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의 앞길을 비추셔서
'평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평화의 길'은 평화를(구원을) 얻기 위해서 가는 길,
즉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뜻합니다.


어둠 속에 있었던 인류는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그 나라로 가는 길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만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어 주셔서
길을 찾게 해 주셨고(길을 가르쳐 주셨고), 앞장서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1-32)."


'계시의 빛'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이 '빛'은 모든 민족들, 즉 인류 전체를 위한 '빛'입니다.
(이방 민족들만을 위한 빛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셨으니
메시아의 탄생은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시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빛'은 곧 '생명'이고, '생명'은 곧 '빛'입니다.
그 빛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길을 잘 가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거부하면 스스로 생명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생명을 거부하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1)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요한 3,19).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싫어하고
그냥 죄 속에서 살면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쾌락을 포기하고 사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지만,
신앙인들이 보기에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입니다.


2) 예수님은 '참 빛'이신 분인데(요한 1,9),
예수님이 '참 빛'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다른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곳으로 가게 될 텐데,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생명이 없는 나라입니다.
'참 빛'이라는 말은 '유일한 빛'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빛'은 '빛'이 아닙니다.
'빛'이 아니니 '생명'도 없습니다.


3)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빛'이 너무 희미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그 '빛'을 따라가는 일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빛'이 너무 희미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 '빛' 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만 한눈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제대로 안 보니까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또 '빛'을 따라가는 일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열매만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구원은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제대로 안 하니까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은 참되고 유일하고 밝은 빛이신 예수님만 잘 따라가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서만 가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 없으면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았다면 그 '빛'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14).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악을 물리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씀은,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말고 참된 기도를 하라는 뜻이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신앙인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하나의 촛불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입구에는 "혼자 오는 사람은 입장 불가" 라는 간판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나라는 이기적인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
즉 이타적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오늘은,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수도자들이 봉헌과 축성 생활을 감사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봉헌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봉헌 생활의 해’(2014년 11월 30일-2016년 2월 2일) 성년이 막을 내리는 날이기도 하지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이적으로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무사히 통과하여 이집트를 탈출하기 직전에,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맏배를 치시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에서 태를 열고 나오는 모든 첫아들은 당신께 봉헌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탈출 13장 참조). 이 계명에 따라 아기 예수님도 성전에서 봉헌되십니다. 우리가 세례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 축성’, 곧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봉헌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성작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던 수녀님이 있었습니다. 성작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에, 식사 때에 성작으로 물을 마시면 안 되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속하고 그분의 소유이기에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몫으로 삼아 주셨기에, 하느님께서도 우리 몫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몫이신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차지할 수 없고, 어느 것도 우리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시편 16,5), 그분이 우리의 주인, 주님이십니다.


구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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