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의 시대적 상황, 구조, 그리고 신학적 메시지
송병현(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들어가는 말
선지자 에스겔이 히브리어 묵시문학의 창시자라면, 다니엘은 이 장르를 한단계 높은 차원의 궤도로 올려 놓은 장본인이다. 파이퍼(R. H. Pfeiffer)는 다니엘서를 최고수준의 묵시문학으로 간주했으며 이 장르의 금자탑이라 칭하기도 했다. 묵시문학이라는 독특성 때문에 다니엘서는 많은 해석적 난제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나마 다니엘서의 해석의 길잡이가 될 시대적 배경, 구조, 그리고 신학적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대적 상황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단1:1과 겔14:14, 20; 28:3 등에 근거하여 다니엘이 주전606년경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그가 체험한 일들과 본(see) 환상들을 바탕으로 이 책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다니엘서가 결코 주전500년대에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 존재하던 인물에 의하여 제작된 작품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주장을 제일 먼저 펼쳤던 사람은 주후 3세기에 기독교를 공격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피리(Porphyry)였다. 그의 저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지만 그의 주장이 제롬(Jerome)에 의하여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 그는 다니엘서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인 것처럼 묘사했을 뿐이며(vaticinium ex eventu), 다니엘이라는 주전 6-7세기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전 2세기 중반에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한 유태인이 안티오쿠스 4세가 이스라엘에 종교적인 핍박을 가하던 때에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1500여 년 동안 묻혀져 있다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많은 학자들이 다니엘서가 주전165년 경에 가명으로 저작된 책이라 결론지었다.
다니엘서가 주전2세기에 비롯된 문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다니엘서가 주전6세기 인물에 의하여 저작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역사적/신학적 문제를 안고있다. 그 중 몇 가지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니엘은 자신이 “유다의 왕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던 해”(단1:1; 주전606/5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무리들 중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강제이송에 대하여는 성경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고 바벨론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는 점.
둘째, 바벨론의 기록에 의하면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는데도 책은 마치 그의 아들 벨사살이 마지막 왕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는 점.
셋째, 책은 바벨론의 벨사살로부터 왕권을 빼앗은 페르시아의 첫번째 왕을 “메대 사람 다리오”(단5:31)로 밝히고 있는데 다리오 1세는 메대 사람도, 바벨론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장본인도 아니라는 점.
넷째, 단10-12장이 “북방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한 예언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고 세부적인 기록이라는 점.
처음 세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학자들을 통하여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과 가능한 시나리오가 제시되었다. 네 번째 이슈는 인간이 미래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언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제적(前提的)인 문제제기에 불과하다. 한 학자의 주장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모든 환상이 이미 일어난 일을 예언인 것처럼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prophecy after the fact)을 전제하여야 한다. 왜? 인간은 몇 백 년 후의 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징적인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의 천사가 해명을 해주었다고 하더라도 다니엘이 몇 백 년 후의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확실한 인간의 본질(human nature)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다니엘서]에 있는 것은 주전6세기에서 바라본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저자의 현실인 167-164BC에 서서 과거를 해명한 것뿐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선입견에서 비롯된 문제제기는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는 그의 종에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주신다고 고백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니엘서가 주전6-7세기에 바벨론에 살았던 인물에 의하여 완결되었거나 그에게로부터 유래되었던 것들이 훗날에 정리되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주전7세기 말—6세기 초 유다의 상황
어떤 학자들은 묵시문학의 성격상 시대가 매우 불안하고 암울할 때 그것이 성행하는 것을 감안하여 다니엘서는 주전2세기 안티오쿠스 시대에 저작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안티오쿠스 시대보다 더 암울하고, 더 불안했던 시대가 있었다. 요시아 왕이 주전609년에 이집트 왕 느고에게 므깃도에서 살해된 이후 주변의 강대국들(이집트, 바벨론)에게 농간을 당하던 시대였다(cf. 대하35-36장). 즉, 불안의 요소 역시 다니엘서가 이때 저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를 배경으로 저작되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선민이기에 자신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혹독한 심판을 받아 나라가 단계적으로 뿌리째 뽑혀가던 시기인 605-587BC를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주전7세기 말 근동지역의 국제정세는 급격하게 변해갔다. 2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해왔던 앗시리아의 세력이 626년의 아술바니발(Ashurbanipal)의 죽음으로 급격히 약화되었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바벨론과 이집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느보(Nabopolassar)(625-605년)는 625년에 바벨론에 새로운 왕조를 성립시켰다. 몇 년 후 느보는 쇠퇴해진 앗시리아의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이때가 616년이었다. 바벨론이 신진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을 견제하려 했던 이집트 왕 사메티쿠스 1세(Psammetichus I)가 앗시리아의 패잔병과 합세하여 바벨론을 대적했다. 처음에는 바벨론이 매우 불리했지만 메대(Mede)가 바벨론에 합세하면서 전세는 판가름 났다. 결국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의 수도 앗술(Assur)이 614년에 바벨론-메대 연합군의 손에 의해 함락되었다. 2년 후인 612년에 니느웨(Nineveh)가 함락되며 앗시리아 제국의 존재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물론 앗시리아 제국의 패잔병들은 당분간 여기저기 산재해 있으면서 바벨론에 대항해 보지만 무모한 짓이었다.
이집트의 사메티쿠스의 후계자인 느고(Neco)가 앗시리아의 패잔병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유브라테스 강 기슭의 갈그미스(Carchemish)로 609년에 대군을 이끌고 출동했다(대하35:20; 왕하23:29). 그가 가나안 지방을 지날 무렵 그의 앞 길을 막는 왕이 있었다. 바로 유다의 요시야였다(왕하23:29). 느고는 자신은 여호와의 부름을 입고 출동하는 중이라며 그를 권면해서 길을 비키기를 강요해보았지만 요시야는 끝까지 비키지 않다가 결국에는 므깃도에서 네고의 칼에 맞아 죽었다(대하35:20-22). 요시야가 죽자 백성들은 23세 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다(왕하23:30). 느고는 곧장 예루살렘으로 돌진했으며 벌금으로 금 1달란트와 은 100달란트를 요구했다(대하36:2; 왕하23:33). 그는 또한 여호아하스를 이집트로 인질로 끌어가고 그의 형 엘리아스를 왕으로 세웠으며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이라 했다(대하36:4-5). 엘리아스의 나이 25세 때 일이었다.
메대를 포함한 바벨론 군은 이집트-앗시리아 연합군과 605년에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근동의 통치권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은 바벨론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바벨론이 근동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 일 이후 앗시리아의 존재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집트는 다시 한번 근동의 “조용한 2인자”로 있어야 하는 패배를 맛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바벨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완충지역의 역할을 하고 있던 가나안 지방에는 끊임없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벨론과 이집트는 601년에 또 한번 가나안 지방 경계선에서 전쟁을 치르지만 무승부로 끝났다.
바벨론 군은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을 대파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유다-팔레스타인을 정복하러 나섰다. 가나안 지역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유다는 바벨론에게 정복당했으며 상당 수의 거주민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바벨론 사람들이 끌고 간 무리는 전반적으로 귀족들, 박식한 사람들, 각 분야의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을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서 보다는 기술자, 총명한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가서 살게 함으로써 제국의 경제와 문화의 바탕을 다져나갈 의향이었던 것이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이때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유다는 바벨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여호야김은 이집트가 세운 왕이요 또한 이집트에 충성을 약속한 왕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군이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자 유다를 포함한 그 지역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601년에 바벨론 군이 이집트와 또 한번 전투를 치렀지만 이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으며 바벨론 군은 본국으로 돌아가 군대를 점검했다. 재점검된 바벨론 군이 가나안 지역의 반역 소식을 전해 듣고 598년에 가나안 땅을 다시 침략했다.
유다는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으며 유일하게 예루살렘만 바벨론 군의 손에 무너지지 않았다.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태에서 성이 무너지기 3개월 전에 죽었다. 드디어 예루살렘은 597년 3월 15-16일에 느브갓네살의 손에 함락되었다. 바벨론 군은 약 8000명의 포로와 많은 노획물을 끌고 돌아갔다(왕하24:16). 이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무리 중에 에스겔 선지자가 있었다. 바벨론 군은 왕위에 올랐던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그 자리에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다.
이집트의 지칠 줄 모르는 로비와 압력, 주변 국가들의 동조, 그리고 601년 전투에서 바벨론 군이 이집트 군을 이기지 못한 점 등을 감안하여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반하고 다시 이집트에 충성을 약속했다. 이때가 589년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바벨론이 다시 가나안 땅을 침략했다. 바벨론 군이 쳐들어 오면 도와주겠다던 이집트의 약속은 무산되었고 온 가나안 땅이 바벨론 군 앞에 바닷가의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지듯 무너져내렸다. 예루살렘은 1년 이상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버티어 보았지만 끝에 가서는 성벽이 무너졌다.
이때가 587년 여름이었다. 시드기야는 야밤에 성벽을 넘어 도망했으나 결국에는 바벨론 군에 붙잡혀 리블라(Riblah)에 있던 느브갓네살에게 끌려갔으며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모든 아들들이 사형을 당했다. 아들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다음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25:1-21; 렘52:9-11). 그 이후의 시드기야의 행방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아마도 바벨론으로 끌려가다가 길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추측이다. 이로써 유다는 한 나라로서의 막을 내렸다.
다니엘서의 상황적 의미
위와 같이 혼란과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절망 속의 사람들에게 다니엘서 저자는 어떤 목적을 두고 책을 저작했는가? 예언서와 묵시문학의 성향에서 다니엘서의 기본적인 저작 목적을 간파할 수 있다. 다니엘서는 선지서로서 독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새롭게 정비하고 삶의 중심을 재점검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있다. 예언서의 특징은 미래에 대한 말씀을 선포한 후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 이렇게 살아라. . .”하는 삶에 대한 권면이 따른다는 점이다. 선지서로서 다니엘서도 이러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묵시로서 다니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적 세계의 현실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주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 되어가고 영적인 세상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이때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늘 나라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는 독자들의 영적 각성을 유도하는 촉매역할을 한다. 저자는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이 사탄의 사역임을 입증하여 주의 백성들이 체험하고 있는 고통은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그분의 통치로 해결하실 것임을 전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묵시문학이 발전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민족적으로 매우 큰 위기를 맞거나 믿음생활에 대한 심한 핍박이 있었을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묵시문학의 이러한 정황적 배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특히 신앙인들은—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묵시문학은 이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과 원통함이 언젠가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판결을 받고 정리될 것을 역설함으로써 핍박과 탄식 속에서 눈물짓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한다.
아픔과 신음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묵시문학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올 종말의 일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막거나 지연시킬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역사는 그분의 뜻에 의하여 일정한 방향과 목표를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은 종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들을 이기고 승리할 것임을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류의 종말이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임을 보장하는가? 다니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자 이스라엘을 각별히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으실 뿐만 아니라 능력도 겸비하고 있으심이 보증한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으로서 다니엘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정황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첫째, 이 세상에서 착취와 박해를 당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저자는 이들이 순간 당하고 있는 고통과 아픈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선포한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핍박했던 모든 자들을 심판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묵시문학은 혹독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 언젠가는 모든 것이 올바른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남을 착취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들의 악한 행동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위배되며, 그들의 불의는 분명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은 이 세상이 마치 삶의 모든 실체인 양 착각하고 남에게 고통을 주고 아프게 하는 자들에게 미래에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모든 행위가 도마 위에 오를 날이 다가오고 있다!”
셋째,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권면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순리, 기준”과 하나님의 순리와 기준을 혼돈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결코 인간의 현실의 모든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목격하고 있는 현상들 뒤에는 더 큰 영적인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세계관을 새로이 정리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의와 공평과 신실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아가라! 그가 너희들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기를 원하노라!”
책의 구조
다니엘서의 구조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이슈에 속하는 요소들은 책의 이중적 언어사용과 인칭적 변화이다. 다니엘서는 언어적으로 히브리어(1:1-2:4a)—아람어(2:4b-7:28)—히브리어(8-12장)의 A—B—A'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1-6장은 3인칭을 중심으로, 7-12장은 1인칭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1-6장은 전반적으로 왕궁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일명 Court Narrative)로서 꿈에 대한 해몽이 중심이 되고있으며, 이 꿈 이야기들의 핵심은 이방 왕들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7-12장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시가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을 온 열방의 왕이시고 세계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표현을 하고있는 것이다.
언급되는 이방 왕들의 순서를 살펴보면 1-6장은 느부갓네살(1-4장)—벨사살(5장)—다리오(6장) 순서로 진행되며 7-12장에서는 벨사살(7-8장)—다리오(9장)—고레스(10장) 순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A—B—C—B—C—D패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종합해볼 때 책의 아람어 섹션(2-7장)은 다음과 같은 교차대구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A. 네 왕국(2장)
B. 열방의 이스라엘 핍박(3장)
C.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4장)
C'.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5장)
B'. 열방의 이스라엘 핍박(6장)
A'. 네 왕국(7장)
사용하는 언어와 내용을 감안할 때 7장은 책의 전반부인 2-6장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사용되는 인칭과 주제(7-8장에 전개되는 벨사살 왕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7장은 또한 책의 후반부인 8-12장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저자가 7장에 이러한 이중성을 부여하는 것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언어 차이에 근거하여 인위적으로 2-7장과 8-12장을 지나치게 구분하고 단절시켜 읽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 구조에 의하면 중심은 4-5장에 가 있으며 4장은 느부갓네살, 5장은 벨사살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의 언질이다. 이들은 바벨론의 처음과 마지막 왕으로서 제국을 대표하는 왕들이었다. 그러므로 2-7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나라들과 권세들에 대하여 계획하신 모든 것이 그대로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바벨론의 손에 의하여 패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는 큰 소망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기에 역사는 그분의 계획이 펼쳐지는 무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범세계적으로 선포하기 위하여 이 섹션에서 그 당시의 통용어(lingua franca)였던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니엘서의 아람어 섹션은 위와 같은 구조를 지닌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 섹션(1, 8-12장)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언어사용에 있어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니엘서가 히브리어—아람어—히브리어의 A—B—A'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간파되었을 뿐이다. 다음은 전개되는 내용을 감안하여 섹션으로 구분해 놓은 다니엘서의 윤곽(outline)이다.
A. 느브갓네살의 왕궁에 거하는 다니엘과 세 친구(1:1-21)
B. 느브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몽(2:1-49)
C. 다니엘의 세 친구의 구원(3:1-30)
D.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심판(4:1-37)
E. 벨사살의 잔치: 벽에 쓰인 글(5:1-31)
F. 다니엘과 사자 굴(6:1-28)
G. 네 짐승에 대한 비전(7:1-28)
H. 양과 염소에 대한 비전(8:1-27)
I. 다니엘의 기도와 70주(9:1-27)
J. 하늘의 사자(10:1-11:1)
K. 근동의 역사와 종말(11:2-12:13)
신학
다니엘서는 여러 가지 다채로운 신학적 교훈을 지니고 있는 책이다.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것만 살펴보도록 하자. 다니엘서의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사상은 “우리의 눈에 비추어지는 현실은 실제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표현될 수 있다. 다니엘서는 강제로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포로민들의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바벨론 체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하여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도 수금 타는 재주를 잊을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137:1-6)
좌절의 어두움과 슬픔의 그늘로 가득 찼던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가 다니엘서를 통하여 찬란한 햇볕같이 비추었다. 저자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과는 달리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있는 현실은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수호신에 지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온 열방의 통치자이시며,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분의 통치 아래 움직이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다니엘의 기도(9장)는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온 것이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한 증거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 언약의 세부사항(계약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저주)을 이행하신 것뿐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징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약속의 땅으로 회복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어떠한 연단과 시련이 와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에 비추어지는 현실은 더 큰 실체의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체는 여호와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
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열방의 왕에게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다니엘서는 이방 신이나 우상숭배에 대한 반박(disputation)이 아니다. 이방 신들은 책 안에서 전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제대로 등장하지도 못한다. 여호와 외에는 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그분의 존귀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이 된다.
첫째,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이름들이 사용된다. 그는 기도문들에서 “여호와”(Yahweh), “주”(adonai), “하나님”(elohim), “선조의 하나님” 등 성경 다른 부분에서 사용되는 칭호를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전통적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죄 때문에 바벨론까지 끌려왔지만,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여호와의 선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소유격과 같이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들이다. 3장에 전개되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당하는 핍박 이야기와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지는 6장의 핍박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성향은 하나님의 이름이 소유격과 함께 사용된다는 점이다. “우리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 등이다. 생사가 좌우되는 상황에서 각별하게 하나님께서 소유격과 연관되어 불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믿음 때문에 환난과 핍박에 처한 성도들을 결코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으시며, 특별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신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지 않았던가? 고통과 아픔이 우리의 삶에 임할 때, 우리는 누구의 하나님을 찾는가?
셋째, 우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들이다. 가장 감동적인 하나님의 이름 사용이다. “신들 중의 신,” “왕들의 주,” “지극히 높으신 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등이 책 안에서 두루 사용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여호와를 칭하는 자들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핍박하던 열방의 왕들이란 점이다.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4:34-37)과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6:26-27)이 여호와의 능력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 그들의 찬양에서 왕들은 자신들의 제국의 시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포로민들과 그들을 핍박하는 열방의 왕들에게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뿐만 아니라,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요셉의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역사는 여호와의 뜻이 펼쳐지는 무대
저자에 의하면 역사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무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바벨론으로 끌려와있다. 그들은 큰 혼란에 빠져있다. 그들의 신 여호와께서는 그 어떤 신보다도 능력이 있고 싸움도 잘하는 용사(divine warrior)라고 성경은 가르쳤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게 그의 백성들을 넘겨주셨는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능력을 상실했단 말인가? 아니면 바벨론의 신들이 여호와에게는 너무 벅찬 상대란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그의 뜻에 따라 조작되어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지배하시고, 필요에 따라서는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때와 계절을 바뀌게 하시고, 왕들을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신다. 지혜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신다”(2:21); “이것은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의 나라를 지배하신다는 것과,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과, 가장 낮은 사람을 그 위에 세우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4:17) 등은 대단한 간증이자, 책의 집필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니엘서 전체를 살펴보면 이런 성향의 문장들이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7-12장을 통하여 다니엘에게 주어지는 미래에 대한 환상은 여호와께서 인간의 역사를 절대적으로 주장하고 계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핍박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행위도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사가 세상의 왕들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며,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와 생활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의한 것이지 세상 왕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1장에서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자청해서 채소만 먹었던 것도 느브갓네살 왕이 그들의 통치자이자 그들을 먹여 살리는 자라는 것을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실체의 갈등
다니엘서는 “갈등의 책”(book of tensions)이다. 바벨론의 왕들은 포로로 끌려와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요구한 정치적인 충성이 종교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 모든 사회에 팽배해 있던 정서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각 나라의 왕은 자신들의 수호신(들)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했다면, 그것은 또한 정복한 나라의 신(들)이 정복당한 나라의 신(들)을 정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들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우상에 절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순간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를 유일한 신으로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바벨론 왕의 요구가 큰 갈등을 빚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벨론 왕에게 정치적인 충성을 보이자니 우상에게 절하는 행위였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에게만 충성을 하자니 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3, 6장).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분명히 외치고 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를 의지하라!”
다니엘의 세 친구가 죽음을 무릅쓰고 느부갓네살에게 했던 간증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3:16-18). 여호와의 주권에 전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내던지고, 살려주셔도 그분을 찬양할 것이요, 죽게 내버려둬도 그분을 찬양할 것이라는 이들의 간증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신앙적 모범은 안티오쿠스 4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행해졌던 무시무시한 종교적 핍박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런 것이 아닐까? 히12장은 우리 이전에 이미 믿음의 경주를 달린 사람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다음 세대에 의하여 “그들은 진실했고 신실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다니엘서는 매우 독특한 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저작된 책 다니엘서는 암울한 현실에서 절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들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이라도 이 세상의 통치권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거나 위임하신 적이 없으시기에 주의 백성들이 체험하는 패배와 좌절이 그분의 실패와 능력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을 환상을 통하여 계시해 줌으로써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가고 있으니 그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주의 백성들이 절대로 좌절할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