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지나쳤던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 당신 모습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을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분이 되셨습니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헐벗고 굶주린 이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수많은 성인들이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일생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모시고 사는 ‘주님’이 우리 삶 안에 계셔야 합니다. 방에 십자고상만 있다고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주님을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보다 못한 작은 이들과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만 그들이 내가 모시고 사는 ‘주님’이 됩니다.
우리는 삶에서 주로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요? 그리고 왜 그들을 만나는지요? 그 만남에서 우리 자신이 섬기는 가난한 이웃은 얼마나 되는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을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분이 되셨습니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헐벗고 굶주린 이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수많은 성인들이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일생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모시고 사는 ‘주님’이 우리 삶 안에 계셔야 합니다. 방에 십자고상만 있다고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주님을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보다 못한 작은 이들과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만 그들이 내가 모시고 사는 ‘주님’이 됩니다.
우리는 삶에서 주로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요? 그리고 왜 그들을 만나는지요? 그 만남에서 우리 자신이 섬기는 가난한 이웃은 얼마나 되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