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와 샹그릴라

2006. 3. 20. 오전 10: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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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제가 ‘이어도’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하여튼 이청준(李淸俊)선생의 ‘이어도’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였습니다.


그 작품을 읽고, 이어도라는 섬을 그리며, ‘언젠가 나도 어른이 되면 그 섬을 꼭 한번 찾아가야지’ 하는 꿈을 키우며 자랐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시중을 들고, 일을 하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일을 하

지 않아도 언제나 배불리 먹고 지낼 수 있으며, 나이 들어도 늙지 않고, 하루 종일 야자수 아래서 빈둥거려도 누구하나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그 섬 이어도는 제겐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은 이상향(理想鄕)이었습니다.


이어도는 제주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천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니 제주도 사람들만이 아니라, 고된 물질과 고기잡이와 배고픔과 가난에 지친 모든 바닷가 어민들에게는 꼭 한번 가고 싶은 피안(彼岸)의 세계였겠지요.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아도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나이 들지 않고 죽음도 없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생각하며, 저는 가끔 제주도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꿈의 섬 이어도를 그리워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 돼 어떤 잡지를 읽었더니, 서양의 한 탐험가가 히말라야 산 아래 어느 곳 엔가를 갔었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오랫동안 배고프지 않고, 언제나 춤과 노래로 즐겁게 살며,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서방세계에 소개했다고 하더군요.

이곳이 바로 또 하나의 이상향 샹그릴라였습니다.


이어도와 샹그릴라는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삶이 고되고 인간적인 갈등이 심할 때마다 훌쩍 달아나 숨어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사회생활 중에 매일 마주 대하며 살아야 하는 주위 사람들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괴로움을 겪을 때는 혼자 숨어들어가 이런 꼴 저런 꼴 안 보며 편하게 살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저의 이상향에 대한 꿈은 어느 해인가, 정부의 해양탐사 팀이 제주도 서남 쏙 어디에선가 이어도를 발견 하였는데, 그것은 해면 가까이 솟아오른 암초에 불과하며, 정부에서 ‘파랑도(波浪島)’란 이름을 짓고 해양탐사기지를 만들 것이라는 보도를 보면서 무참히 깨졌습니다.


그때의 그 실망과 허탈함은 정말 오래가더군요.

이제까지의 저의 꿈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허무함은 참으로 오랫동안 저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샹그릴라가 티베트의 어느 가난한 산골 마을로 밝혀진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헛된 꿈이라서 밝히기 부끄러운 점도 있지만, 어쨌든 이어도에 대한 저의 꿈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그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고달픔과 갈등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바람이 잠재적인 도피처인 이어도나 샹그릴라 같은 이상향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어도나 샹그릴라, 또는 무릉도원 같은 곳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낙원이며, 고달픈 삶의 도피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천국과 그 차원이 다른 것은 물론이지요.


제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리고 요한의 ‘묵시록’을 통하여 천국의 아름다움을 알기 전에는 이러한 이상향에 대한 잠재적인 그리움을 강하게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언젠가는 한번 쯤 찾아가 봐야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다지면서 말이지요.




저는 지금도 가끔 이어도라는 지상 낙원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토록 헛된 꿈을 간직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때로는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고립되어 외로움을 느끼며 심한 경쟁과 다툼에 지쳤다 하더라도 그러한 헛된 도피처를 꿈꾼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는 것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꿈꾸어야 하는 것은 이어도나 샹그릴라 같은 헛된 이상향이 아니라, 언젠가 이 세상에 오실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고달픈 삶과 외로움과 다툼과 경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0~21)


이 말씀을 보면 하느님 나라는 지상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면서도 우리 가운데 있다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라는 것이 무엇을 뜻함일까, 약간 모호해서 영어성경을 있는 대로 펼쳐 보았더니 성경마다 이 부분이 각기 다르게 번역되어 있더군요.

어느 것은 ‘among you', 또 어느 것은 ’with you', 또 어느 성경에는 심지어 ‘within you'라고 돼 있어서 많이 헷갈리지만, 어쨌든 ’너희 가운데‘ 라는 우리 성서의 번역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 합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유추해보면, 하느님 나라, 즉 우리 크리스챤들의 이상향은 이 지상 즉,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다만, 그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하는 바에 따라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고, 존중해 주며, 하느님 안에서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줄 때만이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지, 서로 헐뜯고 미워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할 때는 이 하느님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로부터 떠나 가 버린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요?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성당의 교우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2006. 3. 19   월요일

                                                    윤여선 (다니엘)  올림





  



댓글 4

  • 2006년 3월 20일 오전 11:20

    교육분과장님의 글은 본인의 경험과 삶을 이야기 속에 같이 엮어 글을 쓰시니 글 속에 진실과 진심이 물신 배어 있습니다 좋은 글 자주 올려 주세요

  • 2006년 3월 20일 오후 6:00

    이렇게 주관이 뚜렷하셨으니 교육분과장님을 뵈오면 항상 웃으시며 편안해 보이셨군요.그리고 아멘입니다.

  • 2006년 3월 21일 오후 7:44

    <img src=http://kr.img.blog.yahoo.com/ybi/1/9d/a0/ing89898/folder/8/img_8_28868_10?1142829317.jpg>

  • 2006년 3월 23일 오후 1:37

    글을 진솔하게 잘 쓰시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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