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3일 사순 제4주간 -요한 9,1-41<또는 9,1.6-9.13-17.34-38>

2011. 4. 3. 오전 9:03:36

글자
 
 
2011년 4월 3일 사순 제4주간 일요일
  

제1독서 사무엘기 상권 16,1ㄱㄹㅁㅂ.6-7.10-13ㄴ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6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0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복음 요한  9,1-41<또는 9,1.6-9.13-17.34-38>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동물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고픈 사자 앞에 작은 토끼가 나타났습니다. 과연 이 사자는 이 토끼를 어떻게 했을까요? 배가 고프니이게 웬 떡이냐?’하면서 확 잡아먹었을까요?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예상이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사자는 이 토끼를 잡아먹지 않고 함께 살더라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 세상은 나 혼자서는 죽어도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혼자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자기만을 세상에 들어내려 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

어떤 권투선수가 친구와 차를 타고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앞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급정거를 하게 되었지요. 다행히 앞차와 부딪히지 않고 멈춰 설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뒤따라오던 차였습니다. 그 차는 미처 앞 차의 급정거에 대비하지 못해서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뒤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권투선수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

너 도대체 운전을 할 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그렇게 갑자기 서면 어떻게 해! 운전을 못하면 차를 가지고 나오지 말아야지
.”

화가 난 운전자는 이 권투선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도 권투선수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그 운전자가 자리를 뜨자 태연하게 자신의 차로 돌아왔어요. 그 모습을 보던 친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분통을 터뜨리며 말해요
.

자네 왜 아무 말도 안하고 있나? 자네 정도면 그 사람을 한 방에 눕힐 수도 있잖아. 본때를 보여 줘야지
!”

그러자 가만히 웃고 있던 권투선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조금만 참으면 그 상황은 지나가기 마련이네. 내가 그 상황에서 주먹으로 맞서야 할 이유가 뭔가? 누군가 테너 파바로티를 욕한다고 해서 파바로티가 그 사람 앞에서 노래 한 곡을 뽑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힘으로써 그리고 말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요
?

오늘 복음을 통해 어떤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태생 소경의 죄의 원인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지요
.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

그 하느님의 일을 드러나게 하도록 하는 것, 즉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치유를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무조건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이기기 위해서 소경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더 나아가서는 회당에서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 다시 말해서 함께 주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서 꼬투리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모습, 공동체에서 쫓겨날까봐 진리라 할지라도 말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입장 표명을 꺼리는 태생 소경의 부모,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태생 소경
.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인생이란

 

평생을 걸려 ‘나’라는 집을 짓는 과정과도 같다.

 

그 집이 완성되면

 

우리는 무덤으로 들어가고

 

그 집은 나의 묘비명이 된다

 

-김혜남, 어른으로…-

                 

   

                                                   

           한평생 지고 살아온 무거운 십자가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양승국 신부-


늦은 시각까지 휴게실에 TV가 켜져 있길래, 살짝 문을 열어봤습니다. 그런데, 아니 글쎄 몇몇 형제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 '이게 무슨 일인가' 했었지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느낌표'의 '눈을 떠요' 꼭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일로 심금을 울리나 궁금증이 생겨 형제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 앉았습니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근심어린 얼굴,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을 위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시각장애인,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새 세상을 밝혀주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출연진 모습도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프로그램으로 눈물샘을 자극한 제작진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을 떠요' 꼭지를 통해 실제로 새 삶을 되찾은 이웃들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참으로 부럽고, 또 한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교회도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형제자매들의 헌신, 여러 분야에 걸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 활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온 국민적 동참과 구체적이고 실제적 도움을 즉각 이끌어내는 '눈을 떠요' 꼭지의 참신한 기획을 보며, 우리가 하고 있는 사목에 대한 더욱 진지한 점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남겨준 각막을 이식받고 새 삶을 되찾은 사람이 '죽어도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 어떤 모습으로든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치유행위는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하는 가장 은혜로운 활동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태생소경의 치유를 통해 그에게 새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생소경에게 일단 담당 제자(접수창구)에게 가서 접수를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번호가 뜨면 들어오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 딱한 사람을 만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구체적 치유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당장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은 사람 앞에서, 당장 하루하루가 답답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즉각적이고 구체적 도움입니다. '한번 기다려 봅시다. 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요.' 그분들에게는 이런 말처럼 약 오르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마음, 따뜻한 한 마디 말, 간절한 기도 등등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즉각적이고 구체적 도움의 손길입니다.

태생소경! 말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오는 안타까운 단어입니다. 세상에서 태생소경처럼 큰 십자가를 진 분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그리고 '공짜로' 실컷 누릴 수 있는 빛의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암흑 세상을 살아갑니다. 찬란한 일출이나 감명 깊은 낙조, 밤하늘을 곱게 수놓는 무수한 별들, 황금빛 들판…. 태생소경에게는 이런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 그 또한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외와 저주를 밥먹듯이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더욱 그를 슬프게 했던 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이었습니다. 태생소경으로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규명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통은 고통 당하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고통관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딱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떠보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생소경의 철저한 소외, 심연의 고통, 죽음보다 더한 좌절감,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비참함이 예수님 마음을 자극합니다. 태생소경이 한평생 지고 살아온 무거운 십자가는 진정 괴로운 것이었지만, 결국 예수님 구원을 불러오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갖은 삶의 고통이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한계나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영적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줍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은 비록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빛이요 구원이심을 온 몸으로 고백합니다. 이런 태생소경에게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눈만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함께 회복시켜 주십니다.

댓글 3

  • 2011년 4월 3일 오전 9:41

    +아멘.

  • 2011년 4월 3일 오후 8:23

    아멘.

  • 2011년 4월 3일 오후 9:05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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