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의 기도 고통의 신비는 정말로 하기가 고역이었었습니다.
하필면 고통을 기도해야 하는가?
환희와 영광 속에 궂이 고통이 들어가야 하는가?
고통이 있어야 영광이 있다고 말을 하곤 하지만
정말로 고통을 겪어 보십시오..고통을 누가 신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고통의 신비는 한 가운데 들어서 뺄 수도 없는 묵주기도의 부분..
고통의 신비를 기도해야 하는 날은 정말로 끙끙 앓았습니다.
고통이 오늘은 없게 해달라고..진짜 고통은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러나 진정한 고통을 느끼면서 헤어나올 수 없는 삶을 살아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인생의 맛을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나이..
그래서 진심으로 고통의 신비를 사랑합니다.
고통의 신비 제1단: 예수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라고 해서 고통을 좋아할리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피땀을 흘리면서 자신에게 올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애원하였습니다.
내게서 이 잔을 치울 수만 있다면 치워주십시오.
저도 고민했었습니다.
이 한세상 안살 수만 있다면 안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죽기 전까지는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나이들어가는 일인가 봅니다.
정말로 살기 싫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이유가 그렇게 현실적으로 대단한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스스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때 누구나 하느님을 붙잡고 묻습니다.
"이 잔을 거두어 주실 수 없습니까?"
그러나 그 분은 그때도 지금도 묵묵부답..받아들이라..
받아들이라..
그뿐입니다.
고통의 신비 제2단: 예수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행동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 따른 올바른 일이었는데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벌로 매를 맞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우선 아픈 일입니다.
살이 묻어나고 찢어지는 아픈 일입니다.
몸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입니다.
자신은 의롭고 옳은 일을 했는데 하늘의 뜻을 행했는데 기존질서를 위반했다고 매를 맞으니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도 없이 맞는 일을 감당하면서
입을 열지도 않고 묵묵히 예수님은 매를 맞으셨습니다.
그렇게 고통의 매는 소리지르면서 반항하기에도 무기력한 상태에 몰아치는 것..
견디고 견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의 신비 제3단: 예수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가시관이라는 것..얼마나 조롱과 불명예인가..싶었습니다.
몸이 매를 맞는 것은 고통이 물리적인 것이고 억울함에 그치는 것이지만,
가시관을 쓰는 불명예는 자존심을 완전히 긁어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고통의 신비에서도 제3단은 클라이막스였습니다.
자존심을 상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나 갈기갈기 찢겨진 모습인가요?
몸이 찢겨지고 살이 묻어나는 것도 모자라 자존심이 구겨져서 머리 위에 가시관이 얹힌 예수..
그는 왕이라며..유다인의 왕이라며..조롱을 받으면서..
그 조롱을 귀로 들으면서..
속으로 그게 아닌데..그게 아닌데..왜들 그러니..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은 피멍이 들어서 빨갛게 피가 고였을 것 같았습니다.
상한 자존심..항상 그것이 말썽이지요.
돈보다도, 육체적으로 힘든 것 보다도
맨날맨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나를 괴롭히고 뭉개던 기억이 납니다.
스스로 변명조차 할수 없었던 오해 속의 누명들..그렇게 생각하고들 살아라..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
그것이 현실이 되고 객관이 되어갈때
나의 자존심에 피멍이 들어가던 기억은 예수님의 가시관을 절절하게 아프게 기억하게 합니다.
고통의 신비 제4단: 예수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그래도 예수님은 어깨위에 놓여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곳을 향하여..
자신이 죽어야 할 형틀을 어깨에 메고서 온몸에 진이 다 빠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안간힘을 쓰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시고,
그렇게 반복하시고 또 일어서시고..
그렇게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일상의 십자가라는 것은 정말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살아내는 일상이 십자가라는 것을 나이들어갈수록 느끼고 또 느끼면서
그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는 까닭은
매사의 모든 책임과 의무들이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당연한 순서인줄 알았었지만
고통의 신비에서 매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이어서 연달아 나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이 터지고 조롱으로 잔뜩 자존심이 상한채로도 일상은 그대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억울해도 분해도 그리고 속이 상해도 일상은 그대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일상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신비 제5단: 예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묵상합시다.
결국 그렇게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허무할 정도로 고통만 겪다가 죽고 마셨습니다.
그렇게 없어지고 마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서 숨이 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악착같이 살아내는 일상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죽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순수하게 자신을 비우고 마는 단지 아무것도 아닌 살아내는 일입니다.
거기에 다른 이유도 의미도 부여할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죽어야 한다는 것을
고통의 신비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을 삽니다.
일상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항상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고통이 정말로 싫었었지만 고통은 단지 피흘리는 고통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무게와 삶의 고뇌가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고통의 신비를 기꺼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망가지고 자존심이 으그러져서 더 이상 견딜수 없는 상황에서도
일상은 계속되어야 했었고 그 일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순수한 일상 그 자체였습니다.
무슨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 자체가 살려는 일..의미 없이 매일매일 죽음을 택하고
고통을 견디는 일이 스스로를 신비롭게 이끌어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신비는 고통이 싫은 혐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탱해주는 피땀어린 고뇌의 결과이니
그채로 그 분께 봉헌하는 소중한 피땀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2009.5.17.묵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