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꼬맹이 친구들이 가끔씩 제게 떼를 씁니다.
"신부님, 어떻게 해야 세례받을 수 있어요?"
"세례 준비 기간이 왜 그렇게 길어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한달 안에 좀 안될까요?"
세례받기를 너무도 간절히 청하는 몇몇 꼬맹이들을 따로 불러서 조용히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세례받고 싶어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영성체'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미사 도중에 자기들끼리 나가서 하얀 뭔가를 받아먹는데 도대체 그게 뭘까? 과연 어떤 맛일까?'하는 것이 너무도 궁금하답니다.
그리고 다들 '딱 까놓고' 말들은 안했지만 대체로 지난해에 거행된 세례식을 기억하는 듯했습니다. 세례식 때에 예비신자들이 다들 그럴듯하게 옷을 차려입고 신부님들과 함께 입장하는 모습들, 세례식이 끝난 후 답지하는 많은 선물들, 꽃다발 등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소망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받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만사가 잘 안 풀리고 하는 일마다 늘 꼬여서', '기도를 통해 육신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가정에 우환이 많아서 세례받으면 좀 낫겠지 하는 소망으로' 세례받기를 원한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전혀 죄가 없으셨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분께서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기 위해서,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가 필요 없으신 분께서 한 부족한 인간의 손에 의해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잠시 되살려 세례예식 때를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사제 앞에서 '세례받기를 원합니다'하고 청했습니다. '세례받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성인(聖人)이 되기를 청합니다'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성인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성화(聖化)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성화의 길은 걷는 사람은 더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람 가운데 가장 완전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또 다른 예수님이 되겠다는 의사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극심한 고통을 체험한 인간, 가장 깊은 슬픔을 체험한 인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고통과 십자가의 인간이셨습니다.
결국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세례식 이후의 파티, 금으로 된 묵주반지, 세례와 동시에 주어지는 그럴듯한 세례명 등 잿밥과는 거리가 먼 행위입니다. 또 세례는 건강이나 성공, 만사형통의 보증수표가 절대 아닙니다.
세례식의 기쁨은 잠시입니다. 즉시 다가오는 것이 고통이요 십자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신자가 되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손해 보겠다는 것, 세상과 거꾸로 살겠다는 의사표명입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바보 같은 인생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세상에 전부를 걸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말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지속적 회개의 여정을 충실히 걷겠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험난한 구원의 여정을 출발한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세례식 때 설렘이나 좋은 느낌, 많은 사람들의 축하인사, 꽃다발, 축하선물, 축하행사, 감격스런 미사와 첫영성체…. 이런 것들은 사실 잠시뿐입니다. 곧 이어 다가오는 부담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에 대한 막중한 부담감, 복음을 선택함으로써 감수해야할 손해들, 회의감, 무의미….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고뇌의 쓴잔을 받아 마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 그분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평화신문
또다른 예수가 되기 위해
2005. 1. 10. 오후 2: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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