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3, 13-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세례 주기를 사양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내세워 세례를 요구하십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요한을 더 훌륭하게 볼 위험을 막기 위해 복음서들은 각각 여러 가지 장치들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가 사양하는 요한과 요구하는 예수님님을 부각시키는 것도 그런 장치의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노래하는 시편(2장)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가 노래한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말씀(42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구약성서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이지만,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통당하는 야훼의 종과 같이, 하느님을 알리다가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분이라는 초기 교회의 믿음을 반영한 말입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다양한 세례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세례자 요한의 것입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세례 운동은 흐르는 물에 몸을 잠기게 하면서 죄를 씻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례였습니다. 이 운동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혹은 성전에 제물봉헌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이 그 죄를 씻고 깨끗해지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그 유형을 달리 하였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또 몇 번이라도 죄를 씻는 단순한 정화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삶을 바꿀 것을 약속하면서 일생에 단한 번 받는 회개의 의례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회개 운동은 그 시대 유대교가 요구하던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 준수와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이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대한 집착으로 은폐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외치면서 심판하실 하느님을 자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자각하라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대한 유대교의 맹목적 강요로 이스라엘 안에 대량으로 발생한 죄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친 데에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한의 세례운동은 유대교의 배타성을 배제하였습니다. 루가복음서는 “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3,9)는 요한의 가르침을 전해 줍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타민족에 대해 가지는 우월감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타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월감은 그 민족 집단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우월감으로 연결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와 성전에 봉사하는 제관들의 권위가 과대포장 되면서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 감춰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셨다가 후에 독자적 노선을 가신 분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이 요구하던 바를 더 발전시켜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같이 물로 씻는 의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죄를 직접 용서하는 실천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시하던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도 가히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다”(마르 2,27). 유대교가 죄의 대가라고 가르치던 병을 예수님은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이 세례라는 하나의 의례로써 표현하던 바를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 부릅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등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세례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자각과 실천은 그분을 죽음으로 인도하였고 그 자각과 실천은 요한이 세례에서 요구하던 바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하나의 의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실제 가담하셨고, 그 세례 운동이 요구하던 바를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해 보복하시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효도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의 실천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었기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천은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것이었기에 하느님은 그분은 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입니다. 결혼식이 결혼 생활을 향한 통과의례이듯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실천을 향한 통과의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실천에는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신다는 자각과 그것을 자각한 이의 실천이 보입니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차별합니다. 그리고 높은 자와 가진 자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갖지 못한 자와 낮은 자의 편에서 세상을 보고 그들을 돕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우는 자가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신앙인은 그것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그런 보람에 대한 대가가 십자가가 되어 돌아와도 하느님 안에 모든 희망을 두고 그 십자가를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은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의 신분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의 실천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
2005. 1. 10. 오후 2: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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