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화요일

2010. 5. 4. 오전 9:39:57

글자

<부활 제5주간 화요일>(2010. 5. 4. 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의문점 몇 가지...

예수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사도들은 정말 평화를 누리면서 살았는가?

지금의 세상에, 지금의 교회에 평화가 있는가?

(“지금 나는 평화로운 상태인가?” 라는 의문까지.)

 

독서 말씀에 바오로 사도가 박해를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고, 그가 쓰러지자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립니다.

겨우 깨어난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숱한 고난을 겪었던 사도들의 일생은 사실 전쟁이었습니다.

사도가 아니었던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해와 피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평화인가?

 

마태복음 10장에, 전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에게 평화가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데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

 

예수님은 아예 평화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평화를 준다고 하신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가?

-------------

 

로마제국 시대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 - 로마의 평화)”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평화는 곧 온 세상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보면 그건 로마인들만의 평화였고,

식민지 국가에게는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20세기에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 미국의 평화)”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평화는 곧 온 세상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 말만 잘 들으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 미국도 세상도 평화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의 이기심만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을 뿐입니다.

 

로마의 평화나 미국의 평화라는 말은 인간들의 오만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평화와 다른 세상의 평화입니다.

양들의 평화가 아니라 이리 떼의 평화입니다.

 

이제 우리는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l - 그리스도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참 평화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독재자들은 백성들이 데모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평화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아예 데모를 못하게 합니다.

특정 주제로 아예 집회도 못하게 하는 것은 독재적 발상일 뿐입니다.

조용한 것이 평화는 아닙니다. 그렇게 조용하기를 바란다면 공동묘지로 가면 됩니다.

다 죽어버리면 아주 조용하니까...... 그게 독재자들이 바라는 평화입니다.

생명력은 없고 그저 조용하기만 한 상태,

우리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르지 않고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누렸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사도 23,1).”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사도 4,7).”

하느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참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아무리 많은 고난을 겼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예수님이 주신 참 평화를 얻었고 그 평화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한 윤동주 시인도

그런 평화를 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사태평하고 아무 일도 없는 편안한 상태가 아니고,

투쟁이 있고, 고통이 있고, 박해가 있는 그런 평화,

세상 사람들 눈에는 평화로 보이지도 않을 그런 평화입니다.

 

그런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고 “인내”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 없는 인내는 인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인내는 인내가 아니라 비겁한 것이고 비굴한 것입니다.

(3.1 운동도, 간디의 운동도, 비폭력이었지만, 분명 저항 운동이었고 불복종 운동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타협과 굴복에 참 평화란 없습니다. 노예 생활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양심의 평화, 영혼의 평화를 얻어야 그것이 진짜 평화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박해와 싸워야 하고, 내부에서 오는 유혹과도 싸워야 합니다.

(요즘엔 아무래도 자신의 욕망과 유혹과 갈등과 싸울 일이 더 많겠지요.)

굴복하지 않고 싸울 수 있다면, 그 싸움 자체가 평화일 수 있습니다.

 

싸우고 있다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살아 있음이 평화를 얻는 힘이 되고, 그 자체가 평화라고 믿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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