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 성서 | 윤리신학일반 (3)

2005. 9. 26. 오후 3:58:51

글자

1.2.3.3. 사도 바울로의 그밖의 서간들


      Syneidesis 개념이 표현되는 기타의 사도 바울로의 서간들 중에서 몇가지 중요한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설명하려고 한다.


      - 로마 2,14-16: 여기서 양심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재산으로 표현된다: “실상 이방 민족들이라도 비록 율법을 갖지 못했을망정 타고난 본성대로 율법의 요구를 실천한다면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 율법의 행업이 적혀 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의 판단도 서로 엇갈려서 혹은 고발하거나 혹은 변호합니다.  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속을 심판하실 그날에 판명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진리 안에서 우리 각자의 양심을 호소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러한 봉사직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창피해서 숨겨 두어야 할 일들을 우리는 버렸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동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밝혀 드러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 각자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 (2고린 4,1-2).

      비록 사람들의 양심이 항상 깨끗하고 완전무결하게 남아 있을 수는 없지만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양심마저 더러워졌습니다” (디도 1,15).

      - 따라서 양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며, 탁월하게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행위가 된다: “사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바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 특히 여러분을 대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순진함으로, 따라서 육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처신하였다는 것입니다” (2고린 1,12; 로마 9,1; 사도 23,1; 24,16 참조).

      그러나 근원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하에서 말하게되는 증언과 판단이 결정적으로 양심과 관련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문받든, 사람들의 법정에서 심문받든, 내게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심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문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고린 4,3-4).

      - 사도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에서 언급되는 양심은 무엇보다도 인간 행위 전체를 총괄하는 내면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1디모 1,5에서 사도 바울로는 거짓교사들을 겨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설교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고운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하나의 새로운 경고로써 1장을 끝맺는다: “그대는 이 예언의 말씀에 힘입어 훌륭한 싸움을 하고 믿음과 곧은 양심을 지니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을 저버리고 믿는 일에 파선을 당했읍니다”(1디모 1,18-19).  사도 바울로는 계속해서 봉사자들은 “깨끗한 양심으로 신앙의 신비를 간직해야 한다”(3장 9절)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올바른 길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릇된 정신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양심에 낙인이 찍힌” (4,2) 사람들이다.  1디모와는 달리 2디모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된다.  즉 사도 바울로는 디모테오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조상들을 본받아 깨끗한 양심으로 내가 섬기고 있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2디모 1,3)라고 고백한다.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들의 양심에 참된 의미의 순수함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으로서의 양심에 대해 다시 정리하고 있다.  사실 옛 계약에서는 제물과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만 “그것이 예배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하고” (히브 9,9), 반면에 그리스도의 피는 “그 죽음의 행위로부터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9,14).  또한 율법이 미래에 있을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도 제사를 반복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해마다 그들이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사를 통해서는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제사 드리기를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예배하는 사람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더 이상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2).  이제 이와는 반대로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진실된 신뢰의 행위가 된다: “... 우리는 진실된 마음과 풍부한 믿음을 지니고 나아갑시다.  악한 생각을 떠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서 나아갑시다” (10,22).  이와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기도에 대한 요구가 나타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든 일에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13,18).


      - 이상과 같이 살펴 본 사도 바울로의 양심에 관한 단편적인 텍스트 안에서 몇가지 명확한 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1) 양심은 인간의 내면이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한다.  따라서 양심은 그러한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2) 순수함과 선함은 각각의 인간이 지녀야 할 하나의 기본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순수함과 선함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 만이 진리 안에서 인간의 그러한 면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참된 존중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되고 신뢰할 수 있는 양심을 지니게끔 하는 지식-자유-사랑의 길을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야만 한다.

      3)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양심의 차원에서 제시되고 생활화 된다: 구원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사랑이 된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사랑 만이 진실되다고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행위는 그들의 삶 안에서 사랑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때만이 진실되다고 할 수 있다.


1.2.3.4. 사도 바울로 서간의 종합     


      주님의 사도로서의 바울로는 자신의 사명 안에 구약성서의 시각을 끌어 들였으며, 또한 자신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드셨고, 자신을 사도로 불러 주신 주님께 대한 체험을 강하게 부각 시켰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볼 때, 그의 감정의 예민함은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양심의 섬세함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2고린 1,12 참조), 또한 하느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 만큼이나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2고린 4,1-2 참조)를 갖는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7).  사도 바울로는 바로 그러한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곧 이방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종교와 양심에 대한 체험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빛에로 그들을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칭찬 할 뿐만 아니라 스토아 철학의 윤리개념, 즉 syneidesis (양심)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스토아 학파의 전통에서부터 자신의 사상을 끌어 들인 것에 대해서 서로 많은 논쟁을 한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설교들 듣는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개념이 지닌 본 의미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은 아니며8), 그는 명백하게 희랍어 syneidesis 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 안에서 긍정적이고 수용할 만한 것들을 찾아서 강조하여 사용했던 것이다9)  “비록 사도 바울로가 자기 시대의 철학적 용어를 빌어 썼을 수 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마음’이 지니는 역할에 대한 성서적 전승에 크게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영(Pneuma)이라는 역동적인 현존을 우리들에게 소개하면서 그 개념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10).  비록 사도 바울로의 메시지가 그의 편의에 따라서 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기는 하였었지만 그가 생각하고 설교하고, 그리고 저술한 것은 근원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서적 전통 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시대까지 스토아 학파의 윤리에서는 악한 일에 대한 양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만 예외적으로 syneidesis라는 개념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은 선과 악의 기로에 놓여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인식과 일체성(一體性)에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존재론적 열망으로서 이해되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라는 용어를 죄인을 고발하는 의미에서의 양심을 지칭하기 위해서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성서적 전승에서나 희랍적 전통에서나 다 함께 부합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이교도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 볼 때, 양심의 개념을 아주 명백하게 예언자적 전승의 조명을 통해서 확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2,14-15는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옛 것과 새로운 것을 함께 연결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이방 민족들이라도 비록 율법을 갖지 못했을망정 타고난 본성대로 율법의 요구를 실천한다면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 율법의 행업이 적혀 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의 판단도 서로 엇갈려서 혹은 고발하거나 변호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개념을 사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사랑의 법을 새겨 놓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의도하였다.  syneidesis 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아주 명백하게 그러한 맥락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 당신의 법을 새겨 놓으셨다는 것이 syneidesis 를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후회나 무엇을 고발하는 어떤 양심만을 취급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마음’, 혹은 syneidesis 는 두가지 면을 다 함께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syneidesis 개념을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질(質)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곧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질(質)이란 선하고 의로운 것을 지칭한다.  “사도 바울로는 인간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을 위한 결정들을 규정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사용한다”11).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서 의문은 인간이 범죄 후에, 상처 입은 양심으로서의 마음만이 유일하게 말을 하는지 혹은 마음과 양심이 함께 협력하는지의 여부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의 특별한 관심거리는 양심의 통합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선한 양심이 주체의 일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을 주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메시지는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통회와 회심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양심’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심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사도 바울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은총과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거부할 때, 내면의 자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열에 대해서 설명한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양심마저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그 행실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흉측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며 선행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디도 1,15-16).

      구원이란 단순히 정신과 사고(思考)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양심의 깊은 내면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신뢰를 둔다면, “영원한 영(靈)을 통하여 흠없는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그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것이다” (히브 9,14).  그 뿐만 아니라 양심은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성실성을 드러내 주는 하나의 증거를 제공해 준다.  “사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든 일에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히브 13,18; 2디모 1,3 참조).  그러나 선한 양심은 그 자체로 자동적인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자신의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양심에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을 주님이십니다” (1고린 4,4).  사도 바울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떳떳하게 생활하고 있는 인간이면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그것이 어떠 어떠하다고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숙을 위한 끊임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양심의 상호성까지도 의식하면서 생활했던 것이다 (1고린 10,25-29 참조).  양심에 관한 바울로 사도의 이 모든 사상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 부합한다.




* 이동익 신부님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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