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 성서 | 윤리신학일반 (1)

2005. 9. 26. 오후 3:56:30

글자
그리스도교적 양심 - 성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인간 지성이 지니는 양심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텍스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 귀에 들려 준다.  이렇게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을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로마 2,14-16 참조).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 준다 (마태 22,37-40; 갈라 5,14 참조).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에 따라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가지 윤리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윤리기준에 더욱 부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1).



1. 양심의 개념

1.1. 개념


      양심(Conscientia)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cum(함께)와 scientia, scire (지식, 알다, 지각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된다 (함께 알다).  양심은 인간의 윤리적 능력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면적 중심이며 성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만남으로써만 반사적으로 우리자신과의 참된 만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창조한 말씀의 부르심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당신과 함께 있도록 우리를 늘 초대하시는 스승의 부르심이 들려온다.  우리의 양심은 이렇듯이 우리를 존재에로 부르신 말씀을 통해서 생동력을 가지며, 우리 인간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매 순간 부르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의 심연을 통해서 양심은 우리들의 참된 자아가 그리스도와 일치되게끔 하며, 또한 우리들을 각자의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고 계시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의탁함으로써만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우리 가자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양심의 섬세함과 성실함은 우리를 내외적으로 진리의 성령에로 무장시켜 주시는 스승 그리스도를 신적조명을 통해서 우리 안에 더욱 크게 자라게 해준다.

      양심은 비록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양심이 말하는 말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곧 양심이 하는 말은 모든 사물을 창조하신 말씀, 즉 우리 인간과 함께 지내시기 위하여 육체를 취하신 말씀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양심이라는 은밀한 목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곧 이 양심이란 우리 인간의 전존재를 통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은 그 자체로 불꽃이 없는 하나의 초에 불과하다.  이 초는 진리이시며 빛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진리를 수여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빛을 밝히며, 그리스도의 열을 발하는 것이다.

      양심은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양심의 상호교류 안에서 경험과 반성을 함께 공유하는 촛점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약간의 지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지식 모두를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진실된 양심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을 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임을 인정할 때 우리들의 양심은 충만하게 살아있는 양심이 될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양심으로 형성 될 수 있을 것이다.



1.2. 성서적 관점에서의 양심

1.2.1. 구약성서 안에서의 양심


      구약성서 안에 나타난 양심에 관해서 우리가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다시말해서 ‘양심’이라는 개념을 지칭하고 있는 히브리적 혹은 희랍적 개념들을 찾아보면서, 그리고 단순히 언어적 연구에만 중점을 두고 ‘양심’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가리키는 용어인 희랍어 syneidesis (불경한 양심 혹은 악한 양심을 지칭함)는 지혜서 17,10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에서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우리가 양심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하는 실제적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다.

      다른 기타의 문화가 그렇듯이, 히브리적 사고 안에서도 하나의 발전을 찾아 볼 수 있다.  성서 형성시기중 가장 초창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그리고 가끔은 집단적인 측면에서 선과 악의 경험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느님의 의도는 그들의 전통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전달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그 어떤 소리, 즉 하느님의 소리를 체험했던 것이다.  내적인 그 어떤 것으로서의 양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였다.  양심이란 하느님께 충실하도록, 그리고 계약의 백성으로서 충실하도록 불리운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것이며, 이는 인간 자신이 자기 자신을 활짝 열기를 원한다면,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정신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인간의 마음에 대한 구약성서의 위대한 시각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으며, 선을 행하도록, 그리고 자유로움 안에서 정직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불리움을 받았다.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인 인간의 마음은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손상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셈족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그들 사상과 원의, 감정, 그리고 또한 윤리적 판단의 중심이었던 것이다”2).

      이스라엘의 믿는자들은 “하느님께서는 마음과 정신을 자세히 살피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자신들을 부른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완성된 행위를 찬미하거나 혹은 비난한다.  “내 마음은 이 날 이 때까지 꺼름칙한 날은 하루도 없었네” (욥 27,6).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병적조사를 실시 한 다음에 그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 “다윗은 병적조사를 하고 나서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제가 이런 못할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읍니다.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읍니다.  야훼여, 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2사무 24,10).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는 결코 지적인 앎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의 깊은 가책이 관계된다.  비록 카인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 수 없수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러한 마음의 가책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 면전에 여전히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 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읍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쫒아 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읍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세 4,13-14).

      구약성서를 통해서는 사실상 선행적 양심과 후속적 양심에 대한 현대신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어떠한 연구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건의 실재는 성서저자들에 의해 명백하게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 악을 저지르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그 인간을 비난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질책한다.  인간의 마음은 또한 그 마음을 조명하고 정의에로 인도하는 성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만일 마음이 악을 저질렀다면, 성령의 속삭임은 마음으로 하여금 새롭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정스럽게 부른다.  “너희는 가슴이 쓰려 아우성치고 마음이 찢겨 울부짖으리라” (이사 65,14).  시편 저자는 성령으로 충만된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빗나갔던 자들이 당신께로 되돌아 오리이다” (시편 51,12-13).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고뇌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1열왕 8,38 참조)3).

      성령으로부터 얻어지고 움직여지는 인간 마음의 심오한 시각은 모든 외적인 윤리를 능가한다.  바로 이 점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가져다 주는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인간의 마음에 새기리라 (예레 31,29-34; 에제 14,1-3, 36,26).  “죄는 그들 마음의 식탁 위에 새겨져 있다” (예레 17,1).  인간의 마음은 무디어질 수 있지만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무디어진 마음까지도 새롭게 하실 수 있으며, 그들에게 또한 그들의 형제들에 대한 의무와 사랑의 의지에 대해서 새로운 느낌과 열린 마음을 주실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1.2.2. 신약성서 안에서의 양심


      신약성서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양심에 관한 경험적 실재는 구약성서의 조명 하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다음은 복음의 메시지이다: 하느님께서 무딘 마음을 제거해 버리시고, 죄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져다 주시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죄인들은 새롭게 재무장된 정신과 마음으로써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정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때가 이미 도래했다.  만일 죄인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탓이다.  빛이 새로운 광채로써 그들 위를 비추고, 따라서 그들은 주님 안에서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순함이 부족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완고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당신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읍니까?” (마태 6,23; 루가 11,33-34).

      거짓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리가 바로 위에서 말하는 내적 개혁이며,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의 체험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 안에 늘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며, 동시에 양심의 체험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을 통해서 불리웠으며, 또한 선을 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4).  우리 인간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평화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부르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이며, 이는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    

 

* 이동익 신부님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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