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교적 관점에서의 생명
그렇다면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명의 의미를 일별해 보기로 하자
우선 편의상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성서의 생명관은 일종의 상징적인 신화적 기술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말해 주지 않으며 논리적으로 보면 일종의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y)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수평적 대화는 용이하지 않다.
예컨대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이 흙으로 생물 일반을 지으시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고[...]' 하는 표현을 실증주의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괄적인 생명을 논하면서 오늘날에도 서양인의 생명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은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구약성서의 생명관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구약성서에서는 생명을 나타내는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하이임(hajjim)인데. 이 말은 지상에서의 삶, 즉 일생과 죽음에 반대되는 삶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네페쉬(nepeˇ s)인데, 이것은 인간을 활동시키는 생명의 핵심으로서 인간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생명 그 자체이다.
이것들도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말은 원래 종교적인 개념이며,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신에게게 달려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생명이 철저하게 신에게 속한 것이며,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생명을 나타내는 말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조에(zoe)로서 생명의 생존 기간이나 인간의 인생 또는 생왈을 위한 능력을 의미한다.
이 비오스는 영어, 독어, 불어 등에서 생명을 가리키는 어원이다.
이 말은 지상적인 삶 또는 육체적인 삶, 즉 육체적,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성서는 생명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종말의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로 될 때에 생명 그 자체이며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말씀(요한 14,6)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요한 10,10)이다.
신약성서의 생명관은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을 말하는 비오스를 넘어서 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 초점이 있다.
이 영생은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 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영생과 구원은 인간에게 국한되므로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은 인간 중심적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현대의 생명 윤리의 문제들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은 한마디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은 존엄하다는것이다.
생명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러므로 생명의 가치는 그 삶의 상태가 완전도에 의거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생존을 위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카이절링(E.W. Keyserling)은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며 결코 정당한 이유 없이 빼앗기거나 변질되거나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인간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고, 매코믹(R.A.McComick), 램지(P.Ramsey) 등은 "인간은 근원적인 신비나 생명의 수수께끼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며, 인간에게는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구체적인 생명 윤리의 문제에 적용시켜 보면, 배아 또는 태아가 설사 결함이 있는 것이 사전에 이지되었다 할지라도 낙태 또는 중절시킬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이유로도 안락사를 시킬 수 없다. 클로닝(Cloning)은 한 마디로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동양 종교의 생명관을 간단히 살펴보자.
불교의 생명관은 우주론의 일부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 요소를 가지고 해설한다.
예컨대 구사론(俱舍論)에서 지수화풍의 가시적(可視的)인 작용(業用), 즉 소지, 섭취, 성숙, 증장과 성질[自性], 즉 견고성, 습성, 열, 움직임[動]을 가지고, 그리고 여기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첨가하여 생명현상을 논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대 요소(四大 要 素)는 가시적인 공(空)에서 영원하며 본래 실체가 없으며 가화합하는 상(相)으로서 환화(幻花)와 같은 것이며, 오온 중에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일조의 정신적 작용을 하는데, 수(受)는 감수작용, 상(想)은 상상 작용, 행(行)은 의지 작용, 식(識)은 요해(了解)의 작용을 하는 것으로 논한다.
요컨대 사 요소 중 풍(風)은 생명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고 지수화(地水火)는 생명의 재료가 되어 신체를 구성하며, 오온 중에서 식(識)은 육식(六識)을 지나서 알라야식[소위 8식 또는 종자식(種子識)에 이르면 생명의 근원류에까지 심화되며, 생존을 유지하는 생명 자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존재하는 상태란 알라야식이 신체를 집수(執受)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제 도교의 생명관을 아주 간략히 일별해 보자.
도가 및 도교의 생명관에 의하면 만물은 천지(天地)의 소산이며, 도는 천지를, 천지는 만물을 낳는다; "도는 만물을 생성시키고 덕은 이들을 잘 키운다"
장자(蔣子)는 "하늘은 무위로서 맑고 땅은 무위로서 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과 지의 두 개의 무위가 서로 결합하여 만물이 생겨난다" 고 말했다.
그는 천지, 즉 자연과 인위(人爲)를 구별했으나, 산천초목(山川草木)과 같은 좁은 의미의 물질계(物 質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계(精神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천지와 나는 함께 태어났으며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면 만물과 내가 하나된다고 말할 때의 그 하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하나는 형상을 초월한 것으로서 언어 문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하지 않는 말'[不言之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진인(眞人)이라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의 말일뿐,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며, 단지 사물을 함부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분별지(分別智)를 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중국 민중의 도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국의 도교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이창령(李昌齡)의 태상 감응편(太上感應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생명 존중 사상을 담은 구절을 음미해 보자."모든 사물에 자비를 베풀어라. 초목과 곤충도 함부로 해치지 말라."
우리는 도교 사상으로부터 "사물이 자연스럽게 운행해 나가는데 무리하게 인간이 그 자신의 욕망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위 사상을 배울 수 있으며, 따라서 자연 생태계의 신비로운 조화와 균형을 깨뜨라지 말하야 할 것이다.
동양 종교의 관점에서 본 생명의 의미를 이제 유교의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방동미(方東美)는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천성을 그대로 실현시켜 그 생명 발전을 끊임없이 존속하게 하는 것이 도의(道義)가 할 일이다," 라는 『역경』 의 말을 염두에 두고 중국 사상이란 한마디로 생명 질서의 사상이라고 말하였다.
또 진립부(陣立夫)도 "시공(時空)중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다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는 바로 끊임없이 생생하고, 쉬지 않고 굳세게 운행하여 시시로 움직이면서 변화하고 있는 대 생명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도 주역을 두고 말한 것이다.
요컨대 역학(易學)은 생명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명 질서의 이치를 잘 밝히고 있다; 주역은 "생명의 부단한 계승을 역", "천지의 큰 덕은 생명"이라고 하였다.
김범부는 "모든 이치가 자연스러운 것에서 나왔으니 사람의 지력(知力)으로 덜어 내거나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우리는 유가의 생명관을 논하기 위해서는 천인상감석(天人相感設), 자연과 인간의 불가분리관계(不可分離關係), 격물론(格物論), 생명의 과정 연속성과 전체성과 역동성과 조화 들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나, 맹자가 생명의 근본 원리를 존양(存養) 과 자연지성(自然之性)에 두고 "자연스럽게 생장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 유교의 생명관의 요체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생명관을 현대 사회의 생명 윤리 문제에 직접적으로 적용시키는 데는 난점이 있음을 경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관은 현대 생명 공학의 생명의 존엄성을 부시하는 무절제한 도발 행위에 반성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4. 생명의 존귀함
앞에서 여러 관점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한마디로 일의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일회적인 것, 내면적인 것,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역동적인 것(das Dynamische), 체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 따라서 초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기계론적인 사고, 도식화하는 사고, 수학적.합리주의적인 사고로 파악될 수 없고 정서적인 느낌을 통해 간접적으로 겨우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사전적 정의는 엄밀히 말하면 동어반복(Tautologie)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아'설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생명에 관해서 정의를 내렸지만, 그러한 논의는 이미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분석하는 데 불과할 뿐 새로운 것으로 종합하지 못했으며, 생명의 어떤 필요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고, 충분조건을 제시해 주지는 못했다.
생명의 의미는 셀러(m. Scheler)나 베르그송(H.Bergson)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생명의 의미는 명증적(明證的, evident)이며 본질직관(本質直觀, Wesensanschaung)에 의해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본질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
그 누구도 생명의 신비를 다 파헤쳐 보여 줄 수 없다.
인격이나 사랑과 같은 정신 활동이 개념 정의가 될 수 없듯이 생명은 개념 정의를 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람들은 육체적 생명(식물적 생명과 동물적 생명을 포함), 영혼적 생명, 정신적 생명, 우주적 생명,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언급한다.
관점에 따라 생명의 범위는 크고 넓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논의가 '논점 이탈의 오류'또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생명은 '의미 있고', '가치가 충분한' 것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생(殺生)과 생명에 손상을 입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며,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존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생명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명의 존귀함을 이해하고 어떻게 생명을 고양시킬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