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Ⅱ부》는 <윤리>부분으로서, 신을 ‘목적인(目的因)’으로서, 즉 모든 피조물과 특히 인간의 ‘궁극 목적’으로서 고찰한다. 제1편은 인간 행위 일반을, 즉 궁극 목적인 신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검토한다. 제2편은 덕(德) ․ 은사(恩賜) ․ 완성 상태 등 인간 행위를 풍요롭고 완전케 하는 동시에 신께로 향하게 하는 구체적인 수단들을 탐구한다.
제 1 편 윤리원론 : 인간 행위 일반
인간은 행위 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따라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 즉 참된 행복(beatitudo, 幸福또는 至福)은 부(富)에 있지 않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은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라 불리운다. 인간적 행위에 외부적이고 부수적인 상황 (circumstantia)은 인간적 행위를 목적과 관련시키기 때문에, 특별한 고찰이 필요하다.
선에 대한 이성적 욕구인 의지는 당연히 어떤 것(=선)에 의해 움직여진다. 의지는 오직 최종 목적 속에서만 충족될 수 있으므로, 진정한 향유는 오직 최종 목적에 대한 것이다. 지향(志向, intentio)은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아가는 의지에 고유한 것이다.
선택(electio)은 그 본질에 있어서의 의지 행위이다. 선택 또는 의지의 숙고에는, 형상적으로 지성에 속하는 심사 숙고(consilium)또는 검토가 선행(先行)된다. 동의란 선택에 이어지는 것이므로 선택처럼 수단에만 관련되지 목적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행위들은 사물들이 그렇듯 존재를 가지고, 의도되고, 원욕된 것인 한 선하거나, 있어야할 어떤 것을 결(缺)하고 있는 한 악하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죄는 참된 목적에로 질서 지워진 행위가 아니다. 모든 인간적 행위는 어떤 목적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행위는 올바르거나 아니면 죄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원함(velle bonum)'이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선을 원한다. 따라서 사랑은 ‘탐욕적 사랑’과 ‘우정의 사랑’으로 나뉜다. 사랑은 결합(unio)을 그 결과(혹은 효과)로 가진다. 사랑은 실제적 결합으로 기울고, 또 이미 그 자체 속에 사랑의 대상과의 결합이 있다. 선이 사랑의 원인이듯이, 악은 미움(odium)의 원인이다. 바람은 사랑과도 기쁨과도 구별된다. 현존 대상이 흡족한 것이면 기쁨(gaudium)이다. 그 대상이 욕구를 자극하게 되면 사랑이다.
고통(dolor)은, 그 원인이 육체에 있긴 하지만, 영혼의 한 열정이다. 왜냐하면 육체에 생명을 주고 그래서 육체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영혼 때문인 까닭이다. 지성이나 상상력의 깨달음에서부터 오는 고통을 ‘슬픔(tristitia)'이라고 부른다. 고통은 다른 어떤 열정보다도 육체를 헤친다. 왜냐하면 심장의 정상 복동을 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열정보다 더 무겁다. 왜냐하면 그의 대상은 현존하는 어떤 악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을 대 가벼워지며, 눈물(lacrima)로 완화된다. 친구들의 위로(compassio)로 가볍게 하며, ‘진리탐구’와 ‘명상’, 잠(수면)이나 목욕으로 완화시키기도 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며 악에 대해 슬퍼함은 악이 아니다.
두려움(timor)은 피하기 어려운 미래의 어떤 악으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영혼의 열정이다. 두려움의 원인은 사랑일 수도 있고 주체의 약함 때문이거나 해치고자 하는 대상의 강함 때문이다. 그 결과로 사람을 반성하도록 만들어주며 선에 대한 성찰은 저해한다. 대담한 사람들은 어떤 위험의 끝판에 보다는 초판에 더욱 자극받는다. 그들은 성급한 판단으로 감각적 욕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자들은 그들과 반대로 행동한다.
분노(ira)는 하나의 일반적인 열정이다.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자기에게 행해진 어떤 악이다. 이 어떤 악은 늘 ‘마땅한 존중의 결핍(parvipensio)'에로 환원된다. 그 결과로 복수하리라는 생각과 희망에서 나오는 분노는 애정(delectatio)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덕(德, virtus)은 어떤 능력을 완전하게 만들며, 행위의 규범으로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신의 선한 성질’로서, 그 때문에 올바르게 살아가게 되고, 아무도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지 않는 그런 성질이다“라고 정의한다. 덕의 등급은 덕의 주체는 능력들의 완성이며, 선한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 지성 속에 있으며 사변적 지성은 신앙(fides)의 덕을 지닐 수 있고 실천적 지성은 ‘현명의 덕(prudentia)'을 가질 수 있다. 덕은, 인간이 이성의 자극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선물(혹은 은사[恩賜, charisma])은 인간이 성령의 자극에 따르기 위한 것들이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고 있는 열매로 사랑, 기쁨, 평화, 관대, 선함, 인내, 온순, 믿음, 겸손, 절제, 정결, 이들은 성령의 움직임을 통해서 영혼이 그 자체로 또는 이웃을 향해 또는 자기 행위들에 관해, 좋은 성품을 갖추는 한에서 우리 안에 솟아난다.
윤리덕은 움직임의 원리이며 열정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습관들을 통솔하여 욕구 능력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만드는 덕이다. 윤리덕은 질료, 열정, 대상 그리고 기능에 따라 구분되며, 윤리덕은 하나의 덕이 다른 덕들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하다. 죽음 후에도 윤리덕은 남는다.
이에 반해 지성적 덕은 선을 행하는 기능을 마련하는 한에 있어서 덕이며 윤리덕 없이도 있을 수 있다. - 그 자체로 ‘행위의 올바른 규범’ 인 현명의 덕을 예의로 친다면 말이다. 또한 지성적 덕의 으뜸은, 최고의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혜’이다. 그러기에 ’웅장한 덕(virtus architectonica)'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악습(vitium)은 덕에 반대이다. 이성에 반(反)해서 악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특징적인 것은 이성이며 덕은 이성에 합치됨으로 악습은 이성에 반대되고 따라서 본성에 반대된다.
죄는 인간의 악한 행위이며 규범에 관련해서 악하다. 가까운 규범은 올바른 이성이고, 먼 규범은 영원법이다. 죄의 내면적 원인 중 가까운 원인은 이성과 의지이고, 먼 원인은 상상과 감각적 욕구이다. 죄의 외부 원인은 세속적인 사물들, 사람들, 악령들이 될 수 있다. 무지(ignorantia)가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죄이다. 사악함(malitia)에서 오는 죄는 알고 원해서 짓는 죄이고, 무지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계산(indstria)해서 짓는 죄이다. 인간은 제일 원인인 신에 의해 지탱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인간적 행위는 그래서 인간의 것이자 또한 신의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예들은 모두 ‘본성의 죄’라 불리우는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를 지니게 되었는데, 인간 본성의 죄이다. 인간 본성은 실체적 형상(=영혼)으로부터 가지게 된다. 영혼이 육체의 형상인 것은 그의 능력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영혼의)본질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원죄는 영혼의 본질을 그 주체로 삼고 있다.
모든 죄의 뿌리는,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이 재물에 대한 ‘탐욕’이다. 재물은 모든 나쁜 욕심을 키우고 채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죄의 시작은 ’집회서‘가 말하고 있듯이‘교만’이다. 교만은 나보다 두드러지고 싶어 하는 무질서한 사랑으로서,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선들을 뒤쫓고 따라서 모든 죄의 뿌리인 인색과 서로 뒤섞인다.
인간은 죄지음으로써 질서에서 벗어난다 ; a)자신의 이성의 질서에서, b)그가 속한 사회 질서에서 c)신의 통치 질서에서, 그러므로 후회, 불명예, 신의 진노의 형벌을 받게 된다. 개인적ㆍ 사회적ㆍ보편적 세 질서의 원리는 최종 목적이다. 질서의 원리, 즉 영혼이 신에게 복종해야 하는 기본 의무까지 침범하는 질서 전복은 회복할 수 없는 무질서이고 ‘영벌(영원한 처벌의 벌, poena damni infinita)’을 당하게 되며, 그리 무겁지 않은 무질서에는 일시적 형벌로 족하다.
법(lex: 라틴어 legare ‘묶다’, ‘매다’ 동사에서 나왔다)은 인간 행위의 규칙과 규범이다.
법의 구분으로 영원법(lex aeterna); 신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은 신의 영원한 이성에 의해 목적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는 신의 이성에 의해 사물에 주어진 성품(dispositio)으로 사물들의 본성에 새겨져 있고. 이성적 존재의 본성에 따라 인간에게도 분여(分與)되어 이성의 자연적 빛을 통해 인식된다. 이렇게 해서 영원법은 ‘자연법(lex naturalis)'이 된다. 자연법은 인간을 살아 있는, 통속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습성(habitus)이다. 자연법은 공통된 원리들을 제시하고, 이 원리들은 인간 이성의 개별적 성품에 의해 적용된다. 그래서 ‘인정법(人定法, lex humana)’이라 불리운다. 자연법과 일치하지 않는 인정법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성과도 일치하지 못한다. 이때 이것은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이다. 그러므로 인정법은 자연법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모든 것이 자기의 규칙과 규범에 비례하는 형상을 가질 때 올바른 것처럼, 적극적인 법도, 성 이시오로(S. Isidorus)가 말하고 있듯이. 정직하고, 의롭고, 합당하고, 필요하고, 유익한지가 그 상급법에 의해서 판단되고 규제되어야 한다. 인정법은 ‘공동선(共動善)’으로 질서 지워져 일반성과 항구성을 지녀야 하므로 가능해야 한다. 너무 세밀하게 되면, 솔로몬이 말하는 대로 , 백성의 피를 말리고 진을 빼는 것이다. 인정법은 영원법ㆍ자연법ㆍ인정법은 자연 질서를 위해서 넉넉하나 자연적 질서를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한데 이 때문에 신의 특별한 법, 즉 신법(神法, lex divina)이 필요하다.
신법은 ‘옛 법(lex vetus)’과 ‘새 법(lex nova)'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불완전하고, 하나는 완전하다. 하나는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선을 약속하고, 하나는 천상의 지성적 선을 약속한다. 하나는 ’두려움의 법(lex timoris)'이고, 하나는 ‘사랑의 법(lex amoris)'이다. 또한 ’육(肉)의 법(lex fomitis seu carnis)'한 마디로 관능의 경향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법으로부터의 일탈로서,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의 정의(正義)로부터 허락된 조건이다. 법의 결과(효과)는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백성을 고유한 덕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법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은 영원법에 종속된다. 그러나 신적인 것들은 영원법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법 자체이다.
모세의 법 : 모세의 십계명은 신 및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준다. 예식 규범은 신의 지혜로부터 설정되었고 어떤 목적성이 있었고 또 합리적인 것이었다. 예규의 목적은 장차 올 메시아의 예형(豫形)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축자적(逐字的)의미 외에도 신비로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모세법 이전의 ‘옛 법’의 예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증(例證)들이 함축하고 있듯이, 오직 그리스도로부터이다.
사회 규범들은 직접적으로 정의(正義) 건설을 위한 것이다. 모세의 사회 입법은 최상의 통치 규범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 법제는 군주제-귀족 정치제-민주제였기 때문이다.
‘새 법’이란 무엇보다도 각자의 가슴마다 새겨져 있는 성령의 은총 자체를 의미한다. 또한 이차적으로 은총을 향하게 만드는 ‘성문법(成文法)’을 가리킨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새 법은 사람을 의인(義人)을로 만들고, 둘째 의미에서는 문자(文字)가 아니라 영(靈, spiritus)이 사람에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새 법에서는 내면생활의 그리스도교적 교육이 완벽하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고, 사도들의 품위를 설정한 다음, 인간을 그 내면에 있어서 사물과, 이웃과, 신과의 올바른 질서에 놓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법의 예규적ㆍ재판적 규율들의 뒤범벅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래서 ‘자유의 법(lex libertatis)'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완전한 덕(정결, 청빈, 순명)이 제시되고 권고 방식으로 충분히 교육될 필요가 있었다.
선을 행하고 이와 함께 신 직관(神職觀)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 이다. 이 성화 은총은 인간을 새로운 상태로 변화시킨다. 은총은 결과에 따라 a)치유하고, b)작용하고, c)협력하고, d)인내심을 주고 e)영광스럽게 만든다.
사도 바울로가 열거하는 거저 주어지는 은총은 지혜의 정신, 앎의 정신, 믿음의 정신; 치유의 은총, 예언의 은총, 양심 식별의 은총, 언어의 선물, 연설의 선물. 그러나 우리를 직접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해 주는 성화 은총은 거저로 주어진 은총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은총은 오직 신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은총은 사람에 따라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적게 받을 수 있다. 이 은총의 다양성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신에 의해 안배된 것이다. 만일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가 은총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공로(meritum)란 정의로운 보상 또는 대금(代金)이라는 의미에서 동등한 자들 간에 있을 수 있다. 신과 인간은 평등 관계가 아니며,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도움을 받아 보상받을 행위들을 추구하도록 안배했다는 의미에서 공로는 오직 신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그 사람 안에서 작용하고, 사랑의 의지적 행위로 신에게로 향한다. 공로의 종점은 영원한 생명이다. 지나가는 세상의 선들이 영생(永生)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공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엄격히 말해 공로의 대상이 못된다.
제 2 편 윤리신학 : 덕(德) ․ 은사(恩賜) ․ 완성 상태 등 인간 행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조건과 지위에 연관되어 있는 덕과 악습에 대해서
우리 신앙의 대상은 첫째 진리, 즉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원인(原因)이다. 하느님을 생각함(Credo Deum), 하느님에 대해 생각함(Credo Deo), 하느님을 믿음(Credo in Deum)의 표현들이 가리키는 것은 첫째가 질료적 대상, 그 다음이 형상적 대상, 그리고 세 번째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육화(肉化)에 관한 의심 없는 신앙은 구원을 위해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신앙이다. 또한 삼위 일체(三位一體)에 관한 신앙도 똑같이 필요하다. 삼위 일체 신앙은 육화의 신앙으로부터 분명하게 추정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신앙 고백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하다.
신앙은 그 자체로 제1(德)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영성 생활의 원리이며,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질료적 대상으로서의 신앙을 갖게 하신다. 하느님은 믿을 진리를 계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사고(思考)의 동의로서의 신앙을 갖게 하신다. 동의는 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성(知性)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은총을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지성의 선물을 소유한다. 지식은 성령(聖靈)의 선물이다. 물질적 사물 안에서 지력(知力)의 동의를 위해서는 이미 제기된 문제를 이해하도록 하는 지성(知性)보다는 지식이 더 요구된다.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구원에 대한 포기이다.
희망(spes)의 덕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로부터 하나의 영원한 선을 희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은 영원한 행복이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우정이며 동시에 서로를 위해 선을 원함으로써 서로를 위하는 사랑인 애덕(cariitas)은 행복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과 관련되는 특수덕이며, 모든 덕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 애덕은 덕의 형상(形相)이다. 애덕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때 완전하다.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애덕의 한 효과인 영적 기쁨은 사랑받는 선(善)의 현존이 우리 내부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즉, 하느님의 머무르심으로부터 성화 은총(聖火恩寵)을 통해서 애덕의 열매가 우리 안에 자리하는 기쁨이다. 하느님과의 평화(平和, pax)그리고 인간과의 평화는 애덕의 행위이며 효과이다.
사랑하는 것의 효과로 선행(善行, beneficentia)은 애덕의 행위이다. 자선(慈善, eleemosyna)의 동기는 자비이며, 애덕의 효과이며 애덕의 행위이다. 자선을 행하는 것은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올바른 이성이 명령하는 덕의 행위이다. 또한 동시에 이웃에게는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덕의 행위이다. 만일 필요성이 극도에 달한다면 자선의 의무는 커지며, 이때 자선의 행위는 부차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의무를 부과한다. 성 암브로시오(S. Ambroosiu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굶주려 죽는 사람에게 양식을 주어라. 그에게 양식을 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를 죽이는 것이다.” 자선을 많이 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현명의 덕(prudentia)은 미래에 대한 예견이기 때문에 인식덕(認識德)이며, 올바른 갈망을 예견하는 지덕(知德)이며 또한 윤리덕(倫理德)이다.
현명의 덕의 분야는 세 가지로 나뉜다. 필수적 분야, 주체적 분야, 잠재적 분야이다. 의견의 선물은 하느님께서 축복받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식을 그들에게 보존시켜 주는 천국에 존재한다. 올바른 관심은 현명의 덕에 속하기 때문에 공정함의 결핍인 태만(怠慢, negligentia)은 현명의 덕에 반대된다. 육욕적(肉慾的)인 선을 최후 목적으로 하는 정욕(情慾), 거짓과 가장(假裝)의 방법으로써 고유한 목적에 도달하려는 방법에 대한 연구인 교활(狡猾), 말로써 작용하는 교활, 말로써나 행동을 통해서 작용하는 교활에 속하는 사기, 일시적 사물에 대한 염려, 최후 목적으로 추구, 미래에 대한 염려는 적당한 시기에 멈추어야 하며, 예상되어서는 안된다. 현명의 덕과 혼동되는 이러한 악습들은 정의(정의)에 속하는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방해하며 탐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십계명에서는 현명의 덕에 대한 규범은 없지만 구약성서 가장된 지혜의 덕의 형태에 대해 금지된 규범, 즉 사기와 기만이다.
여러 덕들이 인간을 인간 자신의 질서 안으로 인도하는 반면, 정의(正義)의 덕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져야만 하는 것 안에서 인간을 타인(他人)을 향한 질서 안으로 인도한다. 즉 이는 평등하게 행하는 것을 설정함에 있어서 바르게 하는 것이며, 평등하게 하는 것이 평등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지향하는 정의는 그 대상으로 법(法), 라틴어로 유스(JUS)로 불리운다.
인간은 불의를 원하면서 불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불의를 원하지 않으면서 불의의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르고 불의를 범할 수도 있으며, 불의를 원하면서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재판(裁判, judicium)은 올바른 것에 대한 결정이다. 재판한다는 것은 정의의 행위이며, 재판관은 살아 있는 정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예이다. 재판은 정당한 것인 만큼 정의의 행위이다. 법은 자연법을 가르치며, 긍정적인 법을 내포한다.. 올바른 것에 대한 확정인 판결(判決)은 성문법(成文法)에 근거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편애(偏愛)는 죄이다. 이는 분배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편애를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 그 사물이 당연히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사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자살은 하느님의 권한을 횡령하는 것이며, 천국에 빨리 가기위해, 무서운 죽음, 아주 중하고 번민되는 죽음을 모면하기위해, 어떤 죄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자살은 정당하지 못하다.
진실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 중에서 어떤 점에 대해서는 대답을 피하는 것이 현명의 방법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정당하다.
인내의 덕을 통해서 우리는 무례를 참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때로는 모욕을 주는 사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혹은 우리의 품위와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모욕을 되돌려 보내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의 비이성적인 창조물을 저주하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짓이다.
기도(祈禱, orattio)란 ‘유익한 것을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느님 앞에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예수님께서 가장 완전한 기도로 ‘주의 기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청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선만이 아니고 이웃의 선도 간절히 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이웃을 위해도 기도해야 한다. 형제적 애덕에 대한 기도가 오히려 하느님께 더 잘 받아들여진다. 기도는 세 가지 효과를 갖는다. 즉 공로(功勞), 영혼의 만족, 그리고 영혼의 양식으로서의 효과이다. 첫째, 둘째 효과에 있어서는 제일 지향, 즉 잠재적인 지향에 유의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러한 유의는 계속해서 말로. 느낌으로 혹은 하느님께로 직접 방향이 바뀌어질 수 있다. 우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하느님을 흠숭(欽崇, adoratio)해야 한다. 흠숭은 내적이며 또한 외적 행위이다. 그리고 내적ㆍ외적 흠숭은 서로 종속되어 있다. 흠숭은 종교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흠숭으로써 하느님께 존경을 드리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제사(祭祀, sacrificium)를 봉헌하는 것은 자연법에 속한다. 외적 제사는 내적 제사의 표지(標識)이며, 또한 창조의 으뜸 원리이며, 행복의 목적인 분에게 봉헌되는 생명력 있는 제사의 표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구약성서에서 십일조(十日組, decimae)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적인 근거는 오늘날에도 통용된다. 오늘날도 십일조는 정당한 제도이다. 신약성서에는 이러한 권위가 교회 안에 다시 자리 잡기 때문에 오늘날도 형평과 온정으로써 십일조에 상응하는 역할을 제정하는 것은 교회의 권한이다.
하느님께서 창조의 원리가 되시고 부모가 출생의 원리가 되는 것처럼 이는 통치의 원리가 된다. 공경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탁월함을 증거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탁월함은 마음만으로도 증거할 수가 있다. 인간에게 행해지는 존경(尊敬, dulia)이 있고, 또 모든 사물의 원리 이며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존경이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존경은 보다 높은 존경으로서, 이는 흠숭의 예배이어야 한다. 순명(순명, oboedientia)한다는 것이 하급자가 상급자의 동의(動議)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모든 사물은 가장 으뜸이며 동시에 우주의 원동력이 되시는 하느님의 동의에 따라야만 한다. 따라서 자연법적으로 모든 사물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명해야만 한다. 불순명(不順命, inoboedientia)은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 인간과의 좋은 관계를 지향하는 애덕에 반대된다. 명령하는 사람의 인격을 경멸하는 것은 명령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따라서 불순명보다 더 중대한 죄도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무죄한 사람은 죄인보다도 더 하느님께 감사(感謝, gratitudo)드려야 한다.
십계명의 계명들은 정의의 계명이다. 첫 번째 계명은 종교 생활의 기초가 되며, 두 번째 계명은 종교심의 탈선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세 번째 계명은 예배의 실천을 통해서 종교 안에서의 적극적인 생활로서 스스로를 뿌리내려야 하기 때문이며, 네 번째 계명으로서 부모께 합당한 공경이 옮겨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계명들은 이웃과 함께 지니고 있는 모든 의무들이 단계적으로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용기있는 사람의 가장 가까운 목표는 용덕(勇德)의 행위이지만, 먼 목적은 참된 행복, 즉 하느님이다. 또한 용덕의 행위를 완성함으로써 분노의 열정을 이용한다. 그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그는 덕성 있게 조절된 분노를 사용하게 되고, 그가 지녔던 분노는 이미 사라지게 된다.
성 대(大)그레고리오(S. Gregorius Magnus)가 말하는 교만의 종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을 온전히 자신의 것, 하늘의 선물을 온전히 자신이 이룩한 업적,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허풍을 떠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 이 네가지는 하느님과 그분의 법에의 복종을 거절함으로써 나타나는 사죄가 된다. 무죄한 상태로 창조되었던 첫 인간(人間)의 죄(罪)는 교만에 관한 죄였다. 하와는 뱀에게 신뢰를 두었었고, 아담도 죄로 유인했다. 하와는 아담보다 무겁게 벌을 받았다. 성서는 인간 본성의 완전성을 보존했어야 할 그 선물의 상실로 인해 아담과 하와에게 부과된 첫 번째 죄에 대한 벌(罰)을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지성과 가성이라는 이중(二重)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 카리스마적 은총, 지식, 말씀, 활동과 관련되는 카리스마적 은총에 관해서
예언(豫言, prophetia)이란 먼 일들에 대한 현시(顯示, Visio)를 의미하는 인식력이다. 일종의 신적 조명이기 때문에, 예언적 현시는 마치 표면의 빛이 모든 색깔에로 분산되듯이 모든 일에로 확장된다.
예언적 현시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개념을 토대로 해서 신적 조명의 영향으로 완성되며, 새로운 개념들을 통해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개념들의 새로운 배치로써 완성된다. 모세의 가시덤불처럼 감각적인 표현으로써 완성될 때에는 추상적인 감각이 없이 완성되며, 가야파의 경우처럼 움직이는 성령 앞에서 결함투성이의 도구에 불과하기에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위험, 예지(叡智), 운명(運命)이 예언의 종류이며, 앞으로 다가올 진리에 관한 현시이며, 현재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행복을 통해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갔다는 표지이기도한 언어(言語, linguae)의 선물을 온 땅의 여러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도들이 성령 강림 때에 받았다. 또한 성령으로부터 설교(說敎, sermo)의 선물을 받았다.
인간의 특성인 지성은 진리에 대한 명상 자체를 목적으로 갖는 사변(思辨)과 행동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인식력인 실천(實踐)의 두 가지로 곧 명상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이다. 명상적(瞑想的)생활(vita contemplativa)은 근원적으로 진리에 대한 명상으로 , 지성의 원리와 진리의 소유에서부터 기쁨과 사랑이 의지에로 옮겨지게 되며, 인간의 보다 고상한 업적, 하느님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활력에 넘치는 생활이며, 지성을 통해서 육체의 수고 없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윤리적 덕의 행위, 현명의 덕은 실천적(實踐的)생활(vita activa)스승의 직무로서, 학생을 위한 시험으로서의 가르침은 실천적 생활에 속하며, 천국은 명상적 생활인 지복 직관(至福 直觀)의 생활이고, 천국에서는 실천적 생활이 사라질 것이다. 명상적 생활은 실천적 생활의 동기가 되며 실천적 생활은 명상적 생활을 요청하는 것으로 두 가지 생활을 비교(比較)하기도 한다. 신분(身分, status)이란 변화되는 품위나 풍요로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이 되는 데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시민 생활에서건, 영적 생활에서건 직접적으로 자유와 예속에 관련된다. 교회에서의 여러 가지의 직무(職務, officium)의 다양성은 활동과 관련되어 완덕(完德)의 신분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 더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며, 필요성이 활동의 다양한 종류를 수반하는 직무의 차이점을 인정한다.
죄 혹은 정의에 대한 예속, 죄 혹은 정의(正義)로 부터의 자유에 관한 영성적인 두 가지 신분이 있는데, 그리스도적 완덕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러한 하느님 사랑을 통해서 가능한 완덕이 생기며, 완덕의 신분에 도달한 사람들 중에는 서원(誓願)한 수도자들도, 직무를 가지 주교(主敎)들도 있다. 성대 서원(盛大(誓願)을 발한 수도자들이나 주교 축성을 받은 주교들도 모두 의무적으로 완덕을 향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교직(主敎職, episcopatus)이 명(命)해지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 완덕의 신분은 하느님 사랑을 위한 이웃의 구원에 관심을 시작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책임을 지니며, 자신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하고, 침묵을 지키고, 밤 기도, 단식의 규정을 지키며, 시과경(時課經)을 바치는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수도자(修道者)들은 완덕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로서, 주교들을 위해서는 주교 축성을 요구하고, 수도자들을 위해서는 성대(盛大)하게 치루어지는 약속, 즉 서원 청빈, 정결, 순명으로 책임이 요구된다. 모든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로 자신을 봉헌한다. 애덕의 실천 방법과 신심(信心)의 실천에 차이가 있는데 교회 안에서의 수도회(修道會)도 다양하다. 그 수도회가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볼 필요가 있다. 수도자가 되는 것은 덕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덕망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죄인에게 유익한 일이다. 그리고,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소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면, 수도자가 되는 데 어떤 장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수도회와 어떻게 입회하는지에 대한 안내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