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와 '신학대전 요약' 제 1 부

2005. 7. 21. 오전 12:59:17

글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G. 달 사쏘 - R. 꼬지 편찬 / 이재룡 ․ 이동익 ․ 조규만 옮김



제 1 장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


1)격변의 시대

-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년과 1226년 사이에 이탈리아 아퀴노(Aquino)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입회하게 될 새로운 수도 공동체의 창설자인 성 도미니코(St. Dominico)가 죽은 지 5년쯤 뒤의 일이고, 성 프란치스코(St. Francesco de Assisi)가 죽기 1년쯤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란돌포 데 아퀴노(Landolfo de Aquino)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이었다. 1231년 여섯살의 나이로 몬떼 까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 그 해 봄 15세쯤에는 볼료냐 대학과 그 밖의 교황의 영향력 아래 있던 다른 기관들과 경쟁하기 위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1224년에 설립한 나폴리 ‘대학(studium generale)'을 다녔고, 1240년에서 1244년에 ‘7자유학예’를 공부하여 기초 교육을 마치고 자연철학을 배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배웠다.


2)토마스 아퀴나스 수사

- 토마스는 1243년쯤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지니고 있는 형제애에 매력을 느꼈다.  토마스는 젊음의 활력과 희망을 품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가족의 계획을 거절하면서, 19세에 1242년  또는 1243에 나폴리에 있는 설교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수도원은 1231년에 (창설자일 뿐만 아니라 그 즈음에는 성인이기도 했던) 도미니코에게 헌정되었다. 거기서 도미니코의 후계자 조르다노 데 삭소니아(Giordano de Saxonia)는 1236년에 대학생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의 독창성은 그의 소명과 그에 대한 복종안에 현존하고 있다.


3)교육과 저술

- ♦1252-1256년  파리에서의 명제집 학사  ♦1256-1259년 파리에서의 신학 교수(1)

  ♦1259-1268년 이탈리아 체류기

    [나폴리(1259-1261),오르비에토(1261-1265),로마(1265-1267), 비테르보(1267-1268)]

  ♦1268-1272년 파리에서의 신학 교수  ♦1272-1273년 나폴리에서의 교육과 저술


4)걸작 구상

- 1260년경에 토마스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로마 관구, 그가 10여년전 도미니코회의 수도복을 받았던 나폴리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가 맡고 있던 파리대학 신학 교수좌는 한 영국 도미니코회원에게 넘겨졌다. 40세에, 토마스는 철학적 주해서들과 성서 주해서들에 대한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속하는 것들을 (...)간략하고 명료하게 진술하기”시작하였다(『신학대전』, “머리말”이다. 아마 제1부는 그가 재차 파리에서 가르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끝마쳤을 것이다.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과 윤리학에 대한 주해서들이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제2부 1편을 편찬하던 때에 집필되었다는 것과, 이 도미니코회원이 그의 신학자로서의 역할 때문에 그것들을 주해하였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신학대전』에 대해서는 제2부 2편과 제3부의 몇몇 부분들이 두 번째 파리 체류 기간에 집필되었다. 동시에 아퀴나스는 특별한 평온함과 깊이를 간직하고 있는 주해서, 즉 『로마서주해』및 『욥기주해』와 더불어 대단히 섬세한 것으로 분류되는 『요한복음주해』를 집필하였다. 1272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는 서방 교회의 개혁 작업에 착수하고 동방 교회와의 재결합을 모색하기 위해 제2차 리용(Lyons)공의회를 소집하였는데, 거기에 이 도미니코회 신학자도 초빙되었다. 1274년2월초에 일군의 도미니코회원들이 나폴리를 떠나 로마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로마를 경유하여 리용 공의회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거기에서 토마스가 추기경으로 임명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 50세 되던 해에 숨을 거두었다.


제 2 장 『신학대전 요약』의 구조

1)「신학대전요약」은 총3부와 ‘보충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자들은(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로마에서 오래도록 함께 동고동락하며 자주 앞날의 과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고, 또 서로 의지와 격려로 「신학대전」엄청난 분량 때문에도, 어찌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이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다만 한 작은 디딤돌이나마 되어보자고, 이 「요약」의 번역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하였다고 역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전체 논술은 ‘문제(quaestio)'들로 나뉘어져 있고, 이 문제들은 또다시 각각의 ’항목(articulum)'들로 세분되어 있다(오늘날로 얘기하자면 장[章]과 절[節]쯤에 해당될 것인데, 총 611장이나 된다.  이 요약은 「신학대전」의 구조를 충실히 따랐으며, ‘문제’와 그 제목은 그대로 옮겨 놓았고‘항목’을 그저 단순히 ‘번호’로 표시하였다.

제 1 부는 9개의 문과 119개의 항목으로 (신-창조-인간) [이재룡;철학]번역 담당하였으며, 제 2 부 ; 제1편은 8개의 문과 114개의 항목으로 (윤리원론)[이재룡 번역-이동익검토], 제2 부 ; 제2편은 11개의 문과 189개의 항목으로 (윤리신학)[이동익;윤리신학], 제 3 부는 7개의 문과 90개의 항목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사)[조규만;교의신학], 보충부는 7개의 문과 99개의 항목으로 (성사와 종말)[조규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3 장 『신학대전 요약』입문

《제Ⅰ부》는 신에 관한 <교의(敎義)>부분으로서, 원리인 신으로부터의 발원(exitus)으로, 무엇보다도 신에 대해서 신을 창조의 ‘능동인(能動因)’으로서 고찰하는데. 먼저 신을 그 자체로 고찰하고 다음으로 그의 작품, 즉 피조물 속에서 고찰한다.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 다른 존재자들은 오직 형상일 뿐이고 질료가 아닌 천사들도 유한하다. 신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본질상’,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지우므로 ‘능력상’, 신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현존상’ 모든 것 안에 있다.

 신은 신 아닌 다른 무엇으로 될 수 없고 불변적이다. 신의 고유한 본질인 영원성은 신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오직 신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완전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은 오직 하나다.

 ‘신’이라는 이름으로써 사람들은 ‘우주의 주재자’로  ‘신’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신의 작용’을 표상한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신의 본성을 지칭하는 데에로 방향 지워져 있다. 신에겐 인식이 그 실체이므로, 실체가 불변이듯이 지식도 불변적이다. 이처럼 신의 인식은 사변적(speculativa)일 뿐 아니라 또한 실천적(practica) 즉 작용적(operabilis)이다.

 진리(veritas)란 ‘지성에 있는 질서’로, 신은 ‘최고 진리’ 이자 ‘제일 진리’이다. 일치성과 동일성까지 있으며 그의 지성이 ‘사물의 척도(mensura rerum)'이기 때문이다. 신의 규범으로부터 멀어져 갈 때 거짓이 될 수 있으며, 진리가 그렇듯 거짓(falsitas)도 지성과 관계된다. 흰색과 검은색처럼, 진리와 거짓은 서로 모순되며 신에게는 사물들 속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신이 원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말은 그 자체로 운동보다는 그 운동이 속하는 실체(substantia)를 가리킨다. 신은 최대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신의 의지는 어떤 특수한 의지가 아니라, 보편적 의지이다. 신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따라 채워지는 것이다. 신의 의지는 언제나 채워진다. ‘의지의 신호’라 불리우는 의지의 현현은 : 선을 이루고, 명하고, 권장할 때, 악을 허용하거나, 금지할 때. 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악에 앞서 선으로 향하는 의지의 일차적 움직임은 ‘사랑(amor)'은 ‘공동선’으로 향한다. 신에게는 무기력하지 않은 [즉 역동적인] 의지가 있으며 사랑이 있다.


 신의 본질은 무한하다. 이 능동적 무한 권능인 ‘전능(omnipotentia)'은 모든 가능 대상,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 즉 모순이 아닌 모든 것이 그 권능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권능을 신은 가지고 있다.  대상에 있어서 유일하고 활동에 있어서 여럿인 행복은 신 직관과 사물 직관을 ‘명상적 행복’과 더불어 공유하고 ‘능동적 행복’과 더불어 우주 지배를 공유한다. 따라서 복된 자들은 신을 그들의 인식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의 작용은 지성 존재들에 견주어서 고찰되어야 한다. 신에게 있는 실제적 ‘관계’ 그 자체는 신의 본질 자체이다. 신의 관계들에게는 ‘대립’(oppostio, 대면[對面])이 중요하고, 그 대립에 중요한 것은 ‘구별’이다. 신의 ‘관계들’은 ‘전개들’에 좌우 된다 ; 성부성(paternitas), 성자성(filiatio), 발원성(發源性, spiratio), 발원을 통한 전개.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substantia individa natura rationalis)'는 “위격”(또는 인격, persona)이라고 불리운다. 위격은 이성적 실체들에 있어서 다른 실체 범주들에서는 어떤 특정 본성, 자립성, 기체성(基體性, 희랍어=우유들 밑에 있는 것)으로 구성된 그것을 가리키며, 이처럼 ‘위격’이란 말은 본성 전체에서 가장 완전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사물의 모든 완전성들은 ‘두드러진 방식’으로  신의 위격은 오직 셋[三位]이다. ‘위격’이란 이름은 세 위격에 공통된 이름이다. 우리가 세 사람이라고 말할 때 ‘사람’이라는 이름이 셋에 공통이듯이 말이다. ‘삼위(Trinitas)’는 신의 위격이 하나 이상이고 정확히 말해 ‘셋’임을 말하며, ‘성자는 성부와 다르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자가 성부와 구별됨을, ‘성부는 유일신이다’라는 표현은 다른 잡신(雜神)들 배격하는 의미로 알아들어야한다.

 성부(Pater)에게는 ‘원리(principium)’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성부는 다른 위격들과 구별해 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제일 위격의 고유 이름이다. 또한 ‘출산되지 않는 존재(Ingenitas)'로 성부는 원리이다.


 신에게 있어서 성자의 고유이름인 ‘말씀(Verbum)’은 하나의 유일한 활동으로,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또 당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하는 피조물에 대해서도, 형성하게 되는 표상적 기능이다. 엄밀히 말해 ‘모상(image)’이기도 하다. 성부에게서 첫 번째 ‘전개’는 성자이며, 두번째 전개는 ‘성령(Spiritus Sanctus)’으로 ‘영(靈)’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자극하고 움직이는 것이 부는 바람(風)의 고유한 기능이듯이, 사랑하는 자를 사랑받는 자에게로 추동하는 것이 사랑의 고유 기능이기 때문에 두 번째 전개는 바로 ‘사랑의 방식’으로 발생한다.


 신에게 있어서 ‘성부성’은 성부이며, 위격들은 이 신의 본질과 동일시된다. 모든 관념적 활동들의 종착점은 한 단일 위격일 수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위격만이 ‘말씀’으로 전개되고, ‘사랑’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삼위는 서로 동등하다. 각 위격은 숫 적으로 하나이고 동일한 신 본질로 자립하기 때문이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전개되는 것은 성부의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 본성의 완전성의 결과에 따라서이다. 이런 완전성은 영원하므로, 영원으로부터 성부 ․ 성자ㆍ성령이 있다. 신적 위격의 비가시적(非可視的) 파견은, 파견됨과 수용됨을 함축하는데, 이것은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과 더불어 발생한다.


창조(創造)


 ‘제일 질료(materia prima)'가 사물의 구성 요소로 들어오고 사물들의 일부가 되나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제2의 질료도 신으로부터 유래한다. 신은 창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들 자체가 창조 활동을 통해 기원(起源)되어 나왔다. 실상 장인(匠人)들은 자연으로부터 재료를 취해 각기 형상을 주고, 또 자연도 기존하는 재료 위에 작용한다. 그러나 신은, 어떤 것도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에, 사물들을 창조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질료(물질)를 창조했어야 했다.


 세상의 질서(ordo)는 통일성을 형성한다. 모든 사물들이 그들 상호간에 그리고 신에 관련되어 질서를 이루고 있으므로, 오직 하나의 신이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의 세상이 있을 뿐이다. 사물들 간의 비동일성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불멸의 사물들도 있고 멸망할 사물들도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 멸망할 것들은 멸망 또는 결함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가멸적(可滅的, corruptibile)'이 아닐 것이다. 이 ‘가멸성’은 상대적 선의 결핍 즉 ‘악’과 더불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악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악엔 형상도 목적 질서도 결핍되어 있기에 형상인(刑相因)도 목적인(目的因)도 아니고, 오직 질료인(質料因: 이 질료인은 악의 주체로서 ‘선’이다)과 작용인(作俑因: 악을 부수적으로 산출하는 행위 주체)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악의 원인은 선이다.


 천사들은 ‘분리된 실체(substantia separata)'들이다. 천사는 육체에 결합되어 있지 않다.  천사들은 신처럼 되길 원했다. 그것은 신처럼 되어 창조 능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결정적으로 자연적 완성품인 것처럼 자처했거나, 또는 은총 없이 다만 자연적 능력만 가지고 초자연적 능력만 가지고 초자연적 지복 상태를 넘보았던 것이리라. 악령들은 그들의 지성에 손상을 입었다. 자연적 인식에 관해서가 아니라, 은총의 인식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는 신의 신비에 대한 사변적 인식을 잃었고, 그에 대한 애정적 인식은 완전히 상실했다. 이처럼 ‘황혼녘의 인식’은 그들에게 ‘한밤중’이 되었고 육화(肉化. incarnatio)사건에 대한 인식은 그들에게는 공포에 질릴 만한 인식이었다.


오리게네스(Origenes)가 생각했듯, 물질적 피조물들은 신이 영적 피조물들의 죄를 벌하고자 했을 때 창조해 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지어낸 이유는 그 다양성 속에서 (덜 고상한 것은 더 고상한 것에 종속된다) ‘신의 선성을 온통 표상하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 이다. 성서가 말하는 “어둠이 땅을 뒤덮고 있었고, 땅은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창세 1,1-2]는 구절은 , 어떤 형체를 갖추지 않은 질료가, 즉 아직 어떤 ‘실체적 형상’도 갖추지 않은 ‘제일 질료’가, 시간적으로 먼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존재 없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창조는 ‘형체가 없다(informitas)'고 즉 거의 ‘일그러졌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하늘에는 아직 빛이 없었고 물속에 잠긴 땅엔 풀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물질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빛이 첫째 날 창조된 것은 마땅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관찰을 상기해보면, <신의 영감을 받은 성서는 언제나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잘못될 수 있다.> 하늘 또는 궁창(firmamentum)이 어떻게 그리고 왜 둘째 날에 만들어졌는지,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생각하듯 4가지 원소로 구성되었는지, 플라톤(Platon)이 생각하듯 한 단순 요소로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하듯 어떤 다섯 번째 물체인지 하는 따위의 문제는 무익한 공론(空論)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창조의 날들은 시간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가리킨다’고 말하게 될 때 말이다. 아마도 ‘궁창’이란, 구름들이 농축되게 되는 대기층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탈레스(Thales)는 ‘물은 무한한 물체로서 다른 물체들의 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세(Mose)가 “물들 사이에 궁창이 생겨라”는 신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 줄 때, 그는 탈레스의 것과 같은 의견을 자기의 것으로 삼기는커녕, (무지한 자들에겐 허공[虛空]과 똑같은) 공기를 거론하지 않은 채 자신의 표현들을 거친 히브리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그것을 박식한 이들의 용어인 ‘궁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벌거숭이 황량한 땅은 보기에도 제거되어야 할 일그러짐(deformitas)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서 성서는 이 일이 땅을 풀과 초목으로 장식함(vestire)으로써 일어났다고 말한다. 또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대로라면, 그것들을 산출할 능력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졌다. 앞의 창조 3일간의 기간은 후속하는 3일간의 ‘꾸미는(decus)'기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넷째 날 성서는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장식한다. 창조의 첫 3일의 가운데 날(즉 제2일)물과 궁창이 갈라진다. 그래서 성서가 물과 궁창들을 물고기와 새들로 꾸미는 것을 둘째 그룹의 가운데 날 (즉 제5일)에 배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비슷하게 둘째 그룹의 마지막 날 즉 여섯째 날은 땅을 장식하는 세 번째 날에 상응한다. 그날에 지상에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또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의견대로라면, 그것들을 산출할 능력들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적절하게도 성서는 일곱째 날 존재자들의 번성에 관한 ‘축복(benedictio)'그들의 신 안에서의 휴식에 관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를 배정하고 있다.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는 매우 지혜롭다. 왜냐하면 ‘말씀’을 암시하며 ‘태초에(in principio)'라고 즉 ‘원천과 원형(元型)인 자 속에 서’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물들 위를 감돌고 있던 신의 ‘영(Spiritus)’에 대해 말하면서 ‘성령’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인간 영혼은 육체로부터 독립적으로 그 자체 ‘자립하는(subsistens)'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적 인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지성적 인식을 통해서 모든 물체들의 본성을 안다.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영혼은 물체에 속하는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 육체의 ‘실체적 형상(forma substantialis)'은 인간의 지성적 작용과 지성적 생활의 원리인 지성적 영혼 즉 인간의 영혼이다. 이처럼 지성(영혼)은 육신(질료)에 직접적이고 내밀하게 결합된다. 인간 육신의 ‘실체적 형상’ (=인간에게 종(種)적인 존재를 주는 것)이 지성이라는 것은 인간 본성으로부터 알려진다.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한다(intelligere)’는 것은 종(種)에 특징적인 것이고, ‘형상’은 종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사물들의 끊임없는 변화 때문에 학문은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학문 또는 확실한 지식을 부인했다. 플라톤은 학문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이 ‘분리된 본질들’을 직관(visio)하는 데에 성립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식에 있어서, 사물은 인식 주체의 존재 방식에 따라 주체 속으로 이동해서 실존하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물질적이고 움직이는 사물들을 ‘비물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고 말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비물질적인 우리 지성은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자체 물질적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인식하는 외감들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 지성은 감각상(phantasmta)들로부터 추상(抽象)을 통해서  즉 물질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항구하고 형상적인 관념들만 포착함으로써 비물질적으로 인식한다. 영혼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활동을 통해서’ 인식한다. 분리된 영혼(anima separata)은 자기 자신을 보며(視), 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분리된 실체들 즉 다른 영(靈)들을 안다.


성서가 인간 창조를 장황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의 정점(頂点)이자 왕(王)임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첫 여인 하와는 실제로 첫 인간 아담의 ‘갈비뼈’로 구성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동료’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발(足)’에서도 나오지도 않았다. 종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의 원형적(元型的) 원인(causa exemplaris)이고, 또한 인간은 신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 이 모상은 바로 ‘유사성’과 ‘유래성(由來性)을 알려 준다. 첫 인간이, 혹시 탈혼 상태(raptus)에서라면 모를까, 신의 본질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신 직관(visio Dei)은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고, 지복 직관을 누리는 이들은 의지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없으므로 죄를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신의 ‘거울(speculum)'이고 신은 거울이 깨끗할수록, 그리고 거기 머무는 눈(眼)이 건강할수록, 더 잘 보인다. 범죄 이전의 아담에게 있어서는, 피조물들은 가장 깨끗한 거울이었고, 거기 머무는 그의 지성도 조금도 어둡지 않았었다.


무죄 상태에서 아담은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인간은 낙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낙원으로 인도되었다. 왜냐하면 불멸성(immortalitas)의 선물이 은총에 의한 것이었듯이, 불멸성에 적합한 장소도 역시 은총에 의한 것이지 자연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신의 통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반기를 들 수 없다; 가끔 반기를 드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말이다. 실상 모든 작용에는 충동과 목적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충동하고 목적으로 이끄는 자가 바로 세상을 통치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자기를 그렇게 형성한 제작자에게 빚지고 있다. 빛에는 태양이 ‘참여된 존재(ens participatum)인 우리는 존재 자체인 신에게 우리의 모든 존재와 그 보존을 빚지고 있다. 신에게 있어서 사물들의 보존은 하나의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이다. ‘움직이게 한다(movere)'는 것은 작용의 원리를 말한다. 지성적 존재자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인식 능력을 주고 또 인식 활동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다 지성적 존재자들을 움직인다. 비물질적 제일 유(ens primum)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에게는 모든 가지적(可知的) 사물들이 선재(先在)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인간 지성을 ‘조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자신들을 맞추어서 감각상(感覺像)의 모습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적인 일들을 계시한다. 이간은 자기가 조명되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언제나 누구에게서부터 온 것인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하위 천사들을 파견하는 것 을 ‘천사(天使:angelus)'라고 불리우는데, ‘선포자’ 또는 ‘소식 전달자(annuntiator)’ 란 뜻이다. 파견 중에도 천사들은 신을 명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직접 보기 때문이다.


 제일 질료(materia prima)는 순전히 수동적이지만, 형상을 가진 물체들은 어떤 종(種)적 활동을 갖기도 한다. 운명(fatum)이란 만물을 목적으로 질서지우는 신의 섭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조차도 교부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육체를 형성하도록 규정된 하나의 형상인 우리의 영혼은, 죽은 다음에도, 장소 이동에 관해서 물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영혼들은 세상 시작시에 모두 한꺼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영혼들은 육체에 주입될 때 그때마다 창조된다.



댓글 2

  • 2005년 7월 21일 오후 12:09

    흠~ 고생했구만~ 느나야~ 책선물(?) 공부 많이 하네~ㅋㅋ 날씨도 더운데 넘 책만 보시지말구~ 운동도 하구 그래요~ 건강해야~ 다 좋은것입니다.~ (^^*)

  • 2005년 7월 24일 오전 8:33

    아네스 정말 좋은 선물 받았네 잉 좋은 공부 하셨어 축&#54623;,려요 그리고 인쇄해 설랑은 서서히 자세히읽어 봐야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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