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Ⅲ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사(聖事, sacramentum)에 관한 <교의>부분으로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살피고 그가 인간 개개인을 구원의 공로에 참여시키기 위해 설정한 ‘성사’들을 고찰한다.
구원자 그리스도(1) : 육화의 신비
육화(肉化)는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최고선(最高善)이신 그분이 피조물(被造物)과 친교를 이루는 최고의 방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본성의 일치는 은총(gratia), 하느님의 뜻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며, 선물이다. 인성을 취(取)한다는 것은 신적 위격에 속한다. 위격적인 하나의 행위이기 까닭이다. 그런데 취함의 근원은 신 본성이기 때문에, 신 본성이 인성을 그의 위격 안에 취했다고 말 할수 있다. 인성을 취함에 있어 신 삼위(神三位)에 공통적인 신적 덕능(德能, virtus)이 시작으로서의 행위가 착수되며, 종결로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말씀(Verbum)의 위격 안에서보다 더 적합한 자리가 없다. 육화는 삼위 일체의 하느님의 작업이지만 그 완성은 성자(聖子, Filius)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수난 때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기도하셨다. 그분이 진정으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당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든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멜기세덱(Melchisedech)의 사제직은 사제직의 예형(豫形)이였으며, 그리스도 사제직의 예형이기도 했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예를 따라 사제이시다. 그러나 그 예형을 뛰어 넘는 실재였던 만큼 더욱 탁월한 사제이셨다. 양자로 입양(入養, adoptio)한다는 것은 그가 고유한 상속(相續)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의미하며, 피조물과 관계되고, 신적 삼위격(三位格)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신적 위격이시며 본성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그리스도의 운명(運命, praedestinatio)은 우리들의 운명의 본보기며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고, 그런 은총을 받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경배(敬拜, adoratio)하는 방법은 그분의 신성에 있어서나 인성에 있어서나 흠숭지례(欽崇之禮, cultus latriae)의 한 가지 방법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합당하며, 피조물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흠숭지례가 합당하지 못하며 특별한 공경지례, 즉 상경지례(上敬之禮, cultus hyperdualiae)가 합당하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 분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중재자(Christus mediator)이시다.
구원자 그리스도(2) : 육화하신 말씀(Verbum)의 행하심, 그 고통의 감수(甘受)에 대하여
1)세상으로 들어오신 첫걸음에 대하여
천사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여”라고 했던 것처럼, 동정녀(童貞女) 마리아는 영혼을 받기 전에는 거룩할 수 없었고, 그분이 구원자의 모친이 되었을 때, 격정적 원인(fomes)이 제거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죄로부터 물들지 않는 특혜(特惠)의 빛 안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아담으로부터 유래하는 질료적 신체를 지녔고, 아브라함(Abraham)과 다윗(David)의 혈통을 따라야 했으며, 그 피는 현실태(現實態)가 아니라 가능태(可能態)로 있는 뼈와 살로 육체를 이루어 여인으로부터 탄생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적합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성신의 잉태(孕胎, conceptio)로 성신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일 실체성(同一實體性, consubstantialitas)의 관계를 지니고 있고, 육체에 대해서 능동인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잉태는 기적적(奇蹟的)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반 사물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그 능동적 시원은 그리스도 잉태에 있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혈통은 이미 거룩하며, 잉태의 첫 순간에 완전하게 되었고, 영혼을 받아 일치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nativitas christi)은 과 그리스도의 공현(公顯)은 목동들에게, 동방 박사들에게, 성전에 거주하고 있는 의인들에게 , 처음엔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 이민족에게, 나중에 유대 민족 전체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에게 구원자라는 의미의 “예수”라는 이름은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준 이름이었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유아(乳兒)로서 성전에 봉헌되었고, 맏아들로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대속되어 계명을 기꺼이 율법을 준수(circumcisio)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洗禮, Baptismus)물로써만 베풀어진 것이었고, 예수는 물을 성화시키고자 세례를 받은 것이며, 그분이 받아들인 인간 본성, 즉 다른 인간의 인간 본성의 성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2)그분이 이 세상에서 걸어가신 생애의 여정(旅程)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진리를 보여 주고자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자, 하느님께로 나가는데, 그 문을 열어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들 가운데 함께 사시면서 그들의 생활방식(modus conversationis)과 상응하셨다. 평범한 삶과 가난한 생활, 당신 자신의 삶을 율법의 계명에 일치시키고, 율법을 인정하셨고, 완성하시고 극치를 보여주셨고, 유대인들의 악의적인 중상 모략을 예견하셨다. 그리스도는 유혹(誘惑, tentatio chrsti)이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적으로 필요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교만과 하느님을 멸시(蔑視)하기까지 이른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방법과 순서를 따라 유혹을 당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doctrina)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었다. 당신의 지식을 아끼지 않았고, 정직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항상 군중들, 사도들만을 평범한 가운데 가르치셨다. 비유(比喩)를 사용하실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비유들이 영신적 신비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스도의 기적(奇蹟)들은 그분이 가르친 진리와 상응해야 할 목표를 지니고, 가르치기 시작할 때 기적들을 행할 것을 기대한 것은 합당하였다. 완전한 시기가 이르렀을 때 가르치기 시작하셔야 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는지를 그와 같이 설명하며, 그분의 신성을 충분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악령들을 추방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돌아가실 때 태양이 어두어졌던 것처럼, 병자들들 회복시켜 주시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종류의 놀라운 일로써 비이성적 존재들 위에 기적을 이루신 것은 세상 만물이 그분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또 그렇게 해서 백성의 신앙을 도와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시기 적절하게 변모(變貌, transfiguratio) 하셨고, 당신 자신을 영광의 빛 안에서 드러내셨다. 그것은 시련(試鍊)의 끝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변모 사건에 있어서 모세(Moyses)와 엘리아(Elias), 그리고 특별히 사랑했던 제자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3)그분의 이 세상으로부터의 떠나심에 대해서
인류의 구속(求贖)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수난(受難, passio)과 죽음을 겪어야 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그리스도는 영광에로 현양(顯揚)되고 하느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이 매우 적절하였다. 그러한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고, 어떤 죽음이라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맡기셨다. 보다 합당한 희생 제물로, 스스로의 의지로 하느님께 봉헌하셨다. 그렇게 아담의 불순종을 치유하셨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기 위해 필요한 덕행인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구속의 능동인(causa efficiens)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은총을 다시 선사하는 사랑에로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그 값을 치르고 구속함으로써, 수난이 도구가 되는 그 신적 덕능(virtus)을 통하여 죄를 추방함으로써,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음(mors christi)은 죄에 대한 형벌이며, 죽음을 통해서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보여 주셨으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 죄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죽음으로서 죄에 대해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부활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묻히심(sepultura)은 그의 죽음의 진실성이 증명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틀 밤과 하루 낮을 무덤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이틀 밤은 두 가지 죽음, 즉 영혼과 육신의 죽음으로서 우리를 그런 죽음으로부터 해방하셨음을 뜻하며, 하루 낮은 그분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분의 죽음의 결실은 단지 신앙과 사랑으로 그분과 일치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죄 받은 사람들은 신앙과 사랑이 결핍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지하 세계(infernus)에 내려가신 것이 단죄 받은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4)지상 생애 이후의 그분의 현양(顯揚)되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부활(復活, Resurrectio)은 하느님의 정의를 찬미하기 위해, 우리들의 신앙을 교육하기 위해, 우리의 희망을 근거 있게 하기 위해, 우리들을 선한 행위로 이끌기 위한 가르침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하기위해 필요하였다. 진정한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것, 그 이후로 다시 죽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의미에 있어서 첫 번째로 다시 살아나신 분이요, 그 분 이전에 다른 사람들의 소생(蘇生)은 불완전한 부활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부활의 원인이셨다. 그분의 신성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며, 영혼과 육체와 일치하여 죽음에 머무시면서 사흘 만에 영혼을 육신과 일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영광스럽게 다시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지니신 고유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천하셨다. 그리스도의 승천(昇天, ascensio)은 우리에게 구원의 원인이다. 승천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천상에로 이끌어지고, 그리스도는 그 문을 여셨으며 그분은 성인들의 성소 안으로 대사제로서 들어가셨으며, 거기서 그분의 신적 선물을 우리에게 계속 베푸신다.
그리스도에게 “성부 오른편에 좌정(坐定)하시다” 라는 것은 하느님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부와 동일한 영광, 동일한 권능을 지닌다는 것을 뜻하며, “오른편”이라고 하는 표현은 권능, 지복, 영광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성자의 위격을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지혜이시면서 성부로부터 나오는 진리이며, 성부께서 지상으로 파견하신 분이다. 특별한 방식으로 심판의 권한(심판권, iudiciaria potestas)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부여되고 있다.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까닭이다. 현세에 대한 심판 이후 최후의 공심판이 남는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다면 완전한 심판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사(聖事, sacramentum) 일반(一般)에 대해서 ~~
성사(聖事, sacramentum) 란 인간의 성화(聖化, sacrificatio)를 위한 모든 성스러운 표징을 일컫는다. 인간의 성화에서 그 원천인 그리스도의 수난, 형상(形相, forma)인 은총, 그 궁극적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사는 3중의 표징이다. 기념적(記念的)이고, 표현적(表現的)이며, 예고적(豫告的)이다. 성사적 제도 안에 그 실재들은 모든 것의 원천이요 성부의 영원한 언어이신 말씀(Verbum)을 확실하게 상응케 하는 것과, 형상이 되는 영혼이 질료(質料, materia)가 되는 육체와 공존하는 이간에게 영적 약품(藥品)이 될 수 있어야하며, 형상으로서의 언어가 질료와 일치되어 있지 않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성사적 표징의 본성에 언명(言明)과 상응(相應)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사의 효과를 통하여 영적 임무를 책임 맡은 관리가 되면서 특별한 표식을 받게 된다. 인호(印號, character sacramentalis)라고 부르는 영적 표식이다. 영적표식으로서 인호는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써, 영적 능력(potestas spiritualis)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호를 통하여 신앙인들은 하느님 경배에 관한 임무를 임명받거나 다른 사람을 임명하게 된다. 성사적 인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닮게 하며, 인호는 그리스도의 표시이다. 인간에게 하느님 경배에 대한 질서 안에서 주거나 받게 되는 어떤 최종적 능력을 지니게 하는 인호를 새겨주는 성사들은 오로지 성사들의 문(門)인 세례성사, 세례성사를 완전하게 하는 견진성사. 하느님 경배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신품성사이다.
모두에게 주는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um baptismi)는 씻는 예절에서 표징을 성화에 있어서 의미를, 인호에서 표징과 의미 모두를 지니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가치(價値)를 지닌다. 물의 사용은 정결 예식(淨潔禮式)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으로부터, 성신의 은사(恩事)로 유래하는 효과를 지닌다. 세례성사는 다시 반복(反復)될 수 없으며, 영적ㆍ육적인 삶에서는 단 한번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성사와 더불어 죄의 생활에 있어서 죽는 것이며,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은 의화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사람은 죄의 묵은 삶에 대하여 죽고 은총의 삶에로 들어간다. 세례성사는 묵은 삶을 이루었던 전의 모든 죄를 사(赦)한다.
견진성사(堅振聖事, sacramentum confirmationis)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성화 은총(聖化恩寵)을 부여하는 성령을 받게 된다. 견진성사를 주는 주교(主敎, episcopus)에게 축성된 성신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 그 덕을 의미하는 기름과 향을 합성한 크리스마(chrisma)유(油)가 이 성사의 재료이다.
성체성사(聖體聖事, Sacramentum Eucharistiae)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體)와 결합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육신적인 삶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 이외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이외에도 또 하나의 성사, 영적인 음식(飮食)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체다. 그 자체로 ‘훌륭한 은총(grtia bona)'을 의미하는 성체성사는 과거를 기념함에 있어서 ‘희생제(犧牲祭, sacrificium)’라고 일컫고, 현재를 중점으로 ‘성찬(聖餐, communio, 또는 synaxis)'이라 부르며, 미래적 의미로서 '노자 성체(路資聖體, viaticum)'라고 부른다. 성체성사의 재료(materia eucharistiae)는 빵과 포도주이다. 성사적 측면에서 단순한 성사로서, 영적 측면에서 영적 효과에 대한 것으로서 신령성체(communio Eucharistae spiritualiter)를 완전한 방식과 불완전한 방식으로 구별한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신자들의 일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은총에 의해 완전하게 되는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죄 중에 성체를 모시는 것은 거짓의 죄를 짓는 것이며 하나의 모독(冒瀆)이 된다. 교회는 매일 미사를 드리도록 정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은 삼시경(낮12시)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장엄미사는 여기에 맞추어 정규적으로 정오에 드리도록 하고 있다.
고해성사(告解聖事 또는 참회성사, Sacramentum poenitentiae)는 하나의 성사다. 참회(懺悔, poenitentia)도 성화를 향한 거룩한 무엇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고치고자 하는 참회자의 행위가 그렇고, 그 죄를 사해 주는 사제의 행위가 그렇다. 이 두가지 행위가 고해성사를 이룬다. 고해성사의 질료는 뉘우치는 감각적 행위다. 즉 통회(痛悔), 고백(告白), 보속(補贖)등의 행위다. 죄는 뉘우치지 않거나 뉘우칠 수 없는 것일 때 사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고해성사의 질료로서 질서 지워진 덕인 참회는 그 안에 열쇠의 능력이 형상을 대신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성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질료의 결정적인 부분을 이룬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덕으로서의 참회의 결과이다. 더 나아가서 성사로서 참회의 효과이다.
경죄(輕罪, peccatum veniale) 역시 하느님으로부터의 결별(訣別)을 뜻한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경죄도 개선되어야한다. 이 개선은 적어도 행한 것에 대한 후회를 포함해야 한다. 이런 후회스러움 없이 사면(赦免)은 불가능하다.
덕(德, virtus)은 고해성사로 되돌아온다. 덕은 은총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은총의 회복과 더불어 덕은 회복된다. 초자연적 은총의 마지막 성향은 자유 의지의 동기이다. 그러므로 덕은 그것에 따라서 그 전보다 더 상당한 정도로, 또는 똑같은 정도로, 더 못한 정도로 회복된다. 고해성사의 본질적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양적인 부분은 질료적 부분이며, 이들은 고해성사 안에서 통회와 고백과 보속이 우정(友情)의 화해(和解)에로 이끌기 위한 것으로 화해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뉘우침), 하느님의 대리자의 판단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백), 정해 준 보속을 받아들여야 한다(보속) 이 세가지 모두가 온전하게 참회를 이룬다. 덕으로서의 참회는 세례 이전의 참회, 사죄의 참회, 경죄의 참회로 구별되는데, 첫 번째는 성신의 새로운 삶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두 번째는 부패된 삶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며, 마지막은 보다 완전한 삶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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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부》는 『신학대전』의 마무리 부분으로서, 성 토마스가 이 웅대한 논술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익명의 어떤 제자’가 스승의 다른 작품(특히 『명제집 주해』)을 참조해서 스승이 못다 이룬 부분을 ‘보충’해 놓은 것이다(즉 이 부분은 성 토마스가 친히 쓴 부분이 아니다).
교회의 성사(聖事, sacramentum) 일반(一般)에 대해서 계속
뉘우침(통회;痛悔, contritio)은 죄를 고백하고 또 그 죄를 참회하는 일과 더불어 지니게 되는 죄에 대한 아픔을 말한다. 뉘우침(소재;素材, obiectum)은 어떤 형벌에 대한 것의 아픔이 아니며, 원죄(原罪)의 고통 또한 아니며, 죄를 사하는 뉘우침이기 위해서 하느님을 모독(冒瀆)한 모든 실제적인 죄에 대한 마음의 뉘우침이어야 한다.
잘못에 대한 고통인 뉘우침(강도;强度, quantias)은 더욱 큰 고통이어야 할 것이다. 의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영적 고통은 결코 지나치게 큰 것일 수는 없다.
의지의 고통인 뉘우침에는 지나치게 강렬한 것이 있을 수 없듯이 뉘우침의 시간(tempo contritionis)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죄에 대해 뉘우치는 것이 마땅하다. 뉘우침(효과;效果, effectus)은 성사의 측면에서 도구인 으로서 죄를 사하고, 덕의 행위의 측면에서 질료인으로서 죄를 사한다. 교회가 죄를 알지 못하면 치유를 할 수 없다. 죄인의 고백으로 그 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사람의 고백이 필요하다(必要性, necessitas confessionis). 고백은 고백하는 사람의 양심(良心)을 표현한다. 저지른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저지르지 않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위법(違法)하는 것이다. “고백이란 용서의 희망을 통하여 숨겨진 악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정의(定意)로서 가장 완전하다. 행위와 결과의 본질적인 모든 조건과 환경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의 본성(quidditas confessionis)은 기본적인 조건을 통하여 진실을 지니는 것으로서, 진실됨의 훈련이며, 참회의 덕이 예견(豫見)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죄를 사하는 것으로, 참회의 덕과 한 가지 행위이며, 심판 중에 악한 자의 고백은 정의의 행위이고, 은혜를 받은 자의 고백은 은덕의 행위이다.
고해성사의 집전자(執典者)는 오직 사제(司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이고 또 신비적인 육체에 대해서 능력을 지니는 사제만이 그 은총을 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은 성사의 한 부분으로 본인 스스로의 입으로 본인의 잘못을 발설함으로써 드러내는 것인데, 완전한 고백(질;質, qualitas confessioniis)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이어야 하고, 단순해야 하며, 겸손된 것이어야 하고, 분별적이어야 하며, 신실해야 하고, 발음되어야 하며, 뉘우치는 것이어야 하고, 순수해야 하며, 순명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고백(효과;效果, effectus confessionis)은 사죄(死罪)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무엇보다도 고백 안에 성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은 잘못과 형벌의 채무인 장애(障碍)를 제거(除去)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낙원(樂園)의 문을 열며, 영원한 구원의 희망을 준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제는 성사로 알게 된 죄를 비밀로 지켜야 한다.
고백의 비밀(또는 봉쇄, sigillum confessionis) 자체가 죄를 사할 수 있는 열쇠의 능력과 관련을 지닌 만큼 사제들은 비밀 엄수, 즉 침묵(沈黙)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덕은 형상적으로 정의로운 수단(手段) 안에 머문다.
보속(補贖, satisfactio)은 형상적으로 과거에 대해서 보상적(報償的)이며, 미래에 대해서 신중성(愼重性)을 수반(隋伴)한다. 성 안셀모의 성인에 의하면 “보속은 하느님께 마땅한 존경을 드리는 기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보속은 죄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그 정의를 보충하고 있다. 인간의 편에서 그 나름대로 정의를 수행하는 양식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 만족을 드리는 것은 가능하다(보속의 가능성, possibilitas satisfactionis). 보속은 선한 일, 하느님께 영예(榮譽)를 들리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형벌 또는 참회의 의미를 지니는 일로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초자연적 은총은 그 자체 안에 모든 덕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참회의 덕도 지니고 있다. 참회는 단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참회자;懺悔者)에게만 가능하다.
열쇠의 힘(능력, clavis)은 낙원의 문을 여는 힘이며, 우리를 죄에 대해 닫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능력은 본연의 권리로서 삼위 일체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권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의 효과가 담겨져 있는 성사를 베푸는 교회의 직무자에게도 속한 것이 되었다. 고해성사 안에서 열쇠의 능력은 일시적 형벌(刑罰)의 사면(赦免)에도 작용한다. 합리적 능력으로서 열쇠의 능력은 단지 푸는 능력만이 아니라 묶는 능력이기도 하다.
파문(破門, excommunicatio)은 부당(不當)한 자들이 배제(排除)되는 하느님 나라로부터의 제외됨을 말하는데, 사죄로써 은총을 상실한 자들이다. 파문은 대단히 중한 형벌로서 외적인 기준에 의해, 먼저 경고를 받은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제이든지 본연의 권위를 가지고 파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과 특별 권한을 가진 사제만이 할 수 있다. 사제는 파문된 자가 당연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참회자를 파문으로부터 풀 수 있다(철회;撤回, absoluttio). 파문은 하나의 형벌이지 하나의 잘못이 아니며, 의지를 거슬러서 성립되는 것인 만큼 의지를 거슬러 풀릴 수가 있다. 참회는 영원한 형벌을 사하고 일시적인 형벌의 어떤 부분을 사한다. 남아 있는 현세적 형벌에 대한 것도 하느님 앞에 유효한 은사(恩赦, 또는 大赦, indulgentia)로서 사해 질 수 있다.
은사에 대한 허락은 서품권의 행사라기보다 재판권(裁判權)의 행사다. 오직 주교(主敎)만이 교회의 법적 형식상 충만한 재판권을 지니고 있다. 본당 신부들은 은사를 베풀 수 없다. 그러므로 공로의 보화(寶華)를 온전히 관리하는 일은 전 교회의 통치자, 교황(敎皇)에게 속하는 일이다. 사목상의 이유로 교회의 부분을 나누어 담당하고 있는 주교들은 교황으로부터 허락(許諾)된 한도(限度) 안에서 은사를 베풀 수 있다. 사죄(死罪)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은사가 적용되지 않으며, 수도자들을 위해서, 그 은사를 베푸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약(藥)은 병(病)에 맞추어 조제된다. 그러므로 어떤 공공적인 죄와 상당히 깊이 관련된 죄는 공공(公共)적인 참회(solemnitas poenitentiae)가 요구된다. 장엄한 참회는 지상 낙원으로부터의 아담의 추방(秋芳)과 유사하다. 그가 단 한 번 쫓겨나 것처럼, 장엄한 참회도 두 번 반복되지는 않는다. 성사의 효과는 죄로부터 치유(治癒)하는 것이고, 병자성사(丙子聖事, Sacramentum extremae unctionis)의 효과는 야고버 성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로부터 낫게 하는 것이다.
병자도유(病者塗油, extrema unctio)의 성사를 의미하는 “이 거룩한 도유를 통하여...”라는 축성 기도문에 이어서 이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의 사함 등의 내용이 합당한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생의 마지막에 사용하는 영적인 부드럽고, 침투적이고 확산적(擴散的)인 기름은 올리브기름이라야 한다. 이 기름은 주교(主敎)에 의해 축성되어야 한다. 세례가 영혼과 육체를 씻는 것처럼, 이 병자 도유는 영혼을 낫게 하는 것이 일차적이요, 첫째 효과는 영혼의 치유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바 이차적인 효과로서 육체를 낫게 하는 것이다. 병자 도유의 집전자는 오직 사제(司祭)이며, 병자 도유는 건강한 사람에게 베풀어지지 않는다. 단지 병자들에게만 해당되는데, 성 야고버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땅 끝까지 당신의 영향력을 단계적으로 행사하신바, 그 세상의 아름다움이 교회 안에서도 반영(反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신품성사(神品聖事, Sacramentum ordinis)를 설정하셨다. 서품에는 7가지가 있다. 7가지 직무가 있기 때문이다.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직(司祭職), 성체 분배에 있어 사제를 도와 주는 부제직(副祭職), 성기구(聖器具)들과 재료들을 준비하는 차부제직(次副祭職), 포도주와 물을 관리하는 시종직(侍從職),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이들을 방해하는 악마를 쫓아 내는 구마(驅魔)의 직무,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이들의 영혼을 안배케 하는 독서직(讀書職), 합당하지 못한 자들을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수문직(守門職)이 있다. 사제의 고유한 행위는 축성하는 일이며, 사제직을 위해 교육되고 그에게 권한이 주어질 때 축성의 행위를 할 수 있다.
혼인(婚姻, matrimonium)은 그 경향이 본성으로부터 의도된 목적인 자손의 출산을 바라보는 혼인의 행위는 항상 합법적(合法的)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혼인의 의무로 간주되고 있다. 혼인의 정의(定義, definitio); “합법적인 인격으로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동으로 동일한 생활을 위한 부부의 결합(unio maritalis)이다.” 혼인의 본질인 결합(結合)을 표현하고 있으며, 혼인의 주체(主體)인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일치의 결과로 따르는 불가 해소성(不可解消性)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사 안에는 질료적 행위가 있다. 혼인성사 안에도 하나의 질료
적 행위로서 성사를 의미하고 본성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의미하는 영적 행위(靈的行爲)가 있다. 혼인이란 그 자체로 어떤 선익(善益, bonum)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부부 행위는 혼인 밖에서는 중대한 무질서(無秩序)로서 앞서 말한 세 가지 선 익에 의해서 판단되며, 정당한 방식 안에서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요, 거룩한 행위다.
혼인 장애(障碍, impedimentum matrimonii)들은 혼인을 불법적(不法的)이게 하며 혼인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금지장애(禁止障礙)라고 하는데, 혼인의 본질 또는 계약자 편, 계약 상대편에 관련된 장애들이 있다. 이러한 장애는 무효 장애(無效障碍)로서 불법적일 뿐만 아니라 혼인을 무효화한다. 혼인의 작용인은 의지적(意志的)인 동의로 이 행위는 지성적 행위를 전제한다. 지성 안에서의 결핍은 의지 안에서의 결핍을 수반한다. 오류(誤謬, imedimentum erroris)는 지성적 행위를 방해하는 것으로 의지적 행위에도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적으로 오류는 혼인을 무효화(無效化)한다.
노예 상태(奴隸狀態). 성품(聖品)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것으로 정결(貞潔)은 품위에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의무적(義務的)인 것이다. 라틴 교회에서 대품(大品)은 그 자체로, 그와 연결된 정결 서원을 통해서 혼인을 하는 데 장애(障碍)가 된다. 성대 서원(誓願), 혼인에 있어서 첫 번째로 꼽는, 후손의 선익은 친족(親族) 관계에 의해서 장애(障碍)가 된다(impedimentum consanguinitatis). 인척 장애;姻戚障碍, impedimentum affinitatis),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영적 출생을 통하여 혼인에 장애가 되는 영친장애(impedimentum cognationis spiritualis). 대부모(代父母)와의 관계가 법적으로 맺어지는 친인척 관계(법정 장애, cognatio legalis)는 영친 관계보다 더 육체적 출생에 의한 자연법적 관계에 접근한다. 그 밖에 자녀 출산을 위하여 요구되는 부부 행위의 불능(不能)은 그것이 치료 불가능한 태생적인 결핍이요, 항구적인 것이라면 혼인을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치료 불가능과 항구적인 불능이 질병이나 마술의 주문에 의한 것과 이전에 미친 사람과의 혼인, 친족과 불법적인 육체적 결합으로부터 유래하는 인척 관계, 연령 미달도 혼인에 있어서 무효 장애로 간주된다. 혼인의 첫 번째 선 익인 하느님을 경배(敬拜)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信者)와 비신자(悲辛者) 사이의 신앙의 상이성(相異性)은 그러한 효과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그 상이성은 혼인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障碍)가 된다. 다른 사람과 혼인할 목적으로 배우자를 죽도록 한 사람과 혼인을 맺을 수 없다.
정의에 따라 배우자 살해는 하나의 혼인 장애(범죄 장애; 배우자 살해-配偶者殺害, uxoricidium)가 된다. 혼인으로 결합된 자가 배우자의 동의 없이 하느님께 성대 서원을 행할 수 없다. 혼인을 통하여 배우자에게 속해 있게 되는 권리를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는 권리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인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경우, 계약은 체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부부 행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성대 서원(Votum solemne)이 가능하다. 그때 그는 수도자가 되기에 아직 자유롭다. 이 경우에 죽음의 경우처럼 해소(解消)된다. 협약의 관례(慣例)에 있어서 만일 상대편에 신용(信用)의 의무(義務)가 결핍되어 있을 때, 신용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남아 있지 않다. 한 남편이 그 스스로가 불충실한 아내와 헤어질 수 있다. 부인의 불충실성에 관한 경우 남편은 스스로의 권위로써 잠자리를 격리(隔離)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자리와 거주(居住)의 분리(分離)는 교회법정(敎會法庭)에 판결을 청해야 한다. 그 경우 아무도 스스로가 재판관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불충실한 아내로부터 스스로 멀리 하는 것 이외에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내가 뉘우치면 그는 어느 때라도 그를 되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 죄에 머물러 있으면 되 불러와서는 안 된다. 혼인의 매듭은 부부 가운데 한 편의 죽음으로써 풀린다. 그러므로 상대편은 새로운 혼인(두 번째 혼인;재혼, xecundae nuptiae)을 맺을 수 있다. 혼인은 육체적 욕망(慾望)을 치료할 목적을 지니고 있고, 남편은 그 부부 행위의 의무에 응(應)해야만 하며, 아내는 월경 중에도 남편이 원하면 그에게 복종하여 부부 행위의 의무에 죄 없이 응할 수 있다. 부부는 상대편의 동의 없이 어느 누구도 자신을 또 다른 사람에게 내맡길 수도 없고, 하느님께 받치는 서원을 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봉헌한 기간 동안 부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영혼에 있어서 죄가 된다.
여러 부인을 두는 일부 다처제(一夫多妻制, pluralitas uxorum)는 것은 자녀 출산이나 자녀 교육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지라도, 신자들에게는 혼인의 성사를 거스르는 것이다. 혼인이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상징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이처제(一夫二妻制, bigamia)는 항상 불완전(不完全)한 혼인이 된다. 후속적으로 두 부인을 하나는 법적으로, 또 하나는 실제의 사실로서 취하는 것은 불법적(不法的)인 것이다.
이혼장(離婚狀, libellum repudii)은 미움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배우자 살해를 피하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거부의 원인은 미움이었다. 혼인의 불가 해소성(不可解消性) 안에서도 자연법의 첫 번째 목적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 관면이 가능할 수 있다.
비적자(非嫡子; 서자, 사생자, filius illegitimus)란 법의 규정(規定)을 거슬러 태어난 자를 말한다. 진정한 혼인 이외에 태어난 자녀들은 자연법(自然法)의 질서(秩序)를 거슬러서 태어나는 것이다. 서자들이 마주치게 되는 손해는 자연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실정법에 의해서 적법화 됨으로써 그러한 손해들이 제거(除去)된다.
부활 이전에 선행(先行)되는 것들에 대해서
영혼(靈魂)은 그들의 존재가 육체(肉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육체적인 것들이 바로 영적(靈的)인 것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안배(按配)하셨고, 영혼에게도 그들의 장소(場所, locus) 천당(天堂, caelum)인바, 우리가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성인들이 천당에 머문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영혼들은 찬란한 장소에 모이고, 악한 영혼들은 어두운 곳에 모이는 것이다. 영혼의 거처(居處)는 그 영혼의 상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거처는 다섯 군데가 있다. 죽은 후 영혼의 거처는 낙원(천당), 연옥, 지옥, 그리고 성조들의 지옥의 변두리, 림보(Limbus, 또는 고성소), 유아들의 림보 이다.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감각 능력(potentia sensitiva)은 영혼과 결합된 육체의 소유물(所有物)이다. 육체가 소멸한 후 그 능력은 고유한 원리로서 근원적으로 영혼 안에 남는다. 만일 영혼이 육체와 다시 결합하게 되면 이 능력은 다시 현실화 되는 효력으로서 영혼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 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공로(功勞)나 하느님의 자비(慈悲)에 근거하고 있는 기도(祈禱)와 같은 행위는 유효하다.
죽은 이를 위한 중재 기도(仲裁祈禱, suffragia)중 죄인들을 위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애덕으로부터 유래하는 만큼, 연옥(煉獄)에 있는 모든 영혼들, 애덕 안에 일치되어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유용(有用)하다.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우리들에 대한 호의(好意)로서 성인들의 기도(Oratio sanctorum)는 항상 이루어진다. 그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원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심판(審判)하기 위한 주님의 오심은 그분의 심판의 권한(權限)의 위엄에 관련된 특별한 표징(表徵)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존경(尊敬)하고 그분께 복종(服從)하도록 이끌게 하기 위하여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심판이 가까워 오면 ;심판의 전조(前兆, Signa judicii)아마도 해, 달, 그리고 별들이 하느님 때문에 그 때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만큼 어둡게, 그들의 빛을 잃을 것이다. 심판에 앞서 마지막 재앙(災殃)으로서의 불(lgnis ultimae conflagrationis)은 자연적 능력으로서든지, 하느님의 정의의 도구로서든지 간에 그의 정화 작업(淨化作業)을 수행할 것이다.
인간의 최종적 목적과 그 최종적 완전함은 지복(至福)이다. 육체(肉體)의 부활(復活) 없이는 그 지복에 도달(到達)하지 못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우리의 부활은 그분에게 돌려야 하며, 하느님으로서 그 부활의 원인이 되며, 신(神)-인(人)으로서 동일한 원인이 된다. 만일 영혼이 그 이전의 동일(同一)한 육체를 다시 취하지 않는다면 부활이라고 말할 수 없다(부활한 자의 자기 동일성(自己同一性, identitas). 부활은 신적 작용을 통해서 발생한다. 다시 살아난 육체는 그 형상이요. 목적인 영혼과 완전하게 상응(相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모든 지체(肢體)를 완전하게 지니게 될 것이다(부활한 육체의 완전성, integritas).
우리 각자에게 자연적인 질(質)은 인간 본성에 있어서도 상대적(相對的)이다. 각자가 모든 결함을 제외하고서 완전히 성숙(成熟)한 연령과 관련된 체격을 지닌 채, 인간 본성의 결함과 관련되는 것들은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세상의 삶에는 먹는 것, 마시는 그런 종류의 것은 일체 없을 것이다.
부활 후 복된 자들은 그 육체가 외적으로 해(害)로운 영향을 전혀 받지 않게 된다. 완전히 영적 정신(靈的精神)에 의해 지배(支配)받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는 그 성향을 거슬러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는 소재가 되지 못한다. 즉 불가 침해적인 것이 될 것이다(불가침해성;不可侵害性, impassibilitas). 침투(浸透, penetratio)하는 것을 섬세하다고 말한다. 섬세함은 물질이 아니라 형상이 지배하는 육체의 속성(屬性)에 관여한다. 부활 후 지복자들의 육체는 그 형상(形相)이 질료(質料)에 대해서 완전히 우세(優勢)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영혼이 완전히 지배한다. 그러므로 섬세함은 성서가 영적 육체(靈的 肉體)라고 부르며 지시하는 바로 그런 육체들과 관련한다(영광스러운 육체의 섬세(纖細, subtilitas). 주체적 형상으로서만 아니라 원동자로서의 영혼(靈魂)이 영광스러운 육체를 운행하는 전적인 지배권(支配權)으로 말미암아 육체는 민첩성의 능력을 지니고 영혼에 즉각 순종할 준비가 되어 지복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적어도 하늘로 올라갈 때, 이 재능을 분명히 사용할 것이다(영광스러운 육체의 민첩성;敏捷性, agilitas). 성서는 영광스러운 육체가 광채(光彩, 또는 명료성 claritas)를 지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서 육체에 대한 영혼의 영광의 풍요로움에 마땅한 명료성의 재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단죄된 자들은 망칙한 형태로 부활할 것이며, 그 육체도 불사불멸적(不死佛滅的)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 앞에 영원하게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부활에 뒤따르는 것들에 대해서
최후 심판에 있어서 각자의 양심(良心)이 그 증인(證人)이 될 것이다. 신적 능력을 통하여 각자의 기억(記憶)속에 그의 모든 행위를 상기시킬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의 책이 근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공로(功勞)와 과실(過失)도 표징(表徵)으로 드러날 것이다.
인간의 최종적 목적인 지복 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에 있다면 인간적 지성은 하느님을 그분의 본질 안에서 볼 수 있다고, 우리들의 지성과 하느님의 본질 사이에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인들의 지복은 심판 이후 영광스러운 육체와 다시 결합한 영혼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성상 더욱 완전하게 될 것이고, 는 천당에 있어 그가 머물려고 도달한 곳 맨션(mansio), 즉 그 거처(居處)지복의 단계에 따라 다르다. 성인들과 단죄된 자들의 관계에 있어서, 성인들은 하느님과 마주하고 있다는 인식이 부여되고 있으며, 복자들은 단죄된 자들의 형벌을 인식하고 있다. 낙원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혼인(靈的 婚姻)이다.
지상의 혼인에 있어서 신부(新婦)에게 지참금(持參金)과 장신구(裝身具)가 제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가 언급하고 있듯이, 영혼이 낙원으로 입장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영적 지참금과 장신구를 지급받는다. 지복자들의 지참금(持參金, dotes)은 지복에 질서지워진 성향과 질에 따라서 지급된다. 복자들의 영혼의 지참금은 세 가지 선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느님을 뵙는 것, 그 지복 직관을 현재적 기쁨으로 인식하는 것, 그 현재적 기쁨이 우리에게 소유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대신덕(對神德), 즉 신덕(信德)ㆍ망덕(望德)ㆍ애덕(愛德)에 상응한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영적 기쁨에 첨가되는 고유한 승리(勝利)를 맛보게 하는 선행(善行)들의 기쁨을 후광(後光, aureola)이라고 부른다. 그처럼 후광은 낙원에서 그 상급은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영혼이 완전히 일치(一致)한다는 금관(金冠, corona aurea)과 구별(區別)된다.
단죄된 자들의 형벌(刑罰, poena)은 단지 불(火)의 형벌만이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노의 “세상 어느 부분에 지옥(地獄)을 위치케 할 것인가는, 만일 성령이 그것을 계시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는 말처럼, 무엇보다도 성서의 표현은 지하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서 그 명칭이 지옥(infernum)이다. 즉 우리의 아래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또 그곳은 마치 복된 자들에게 하늘이 합당한 장소인 것처럼 단죄된 자들에게 그만큼 어울리는 곳이다. 단죄된 자들에게 하느님이 주인인 선에 대한 자연적인 성향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본래의 의지는 최종 목적이고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선을 원할 때에도 그것은 나쁜 목적을 위하여 원하는 것이므로 단죄된 자들의 의지는 항상 악한 것이다. 단죄된 자들은 심판 이전에 복된 자들이 영광 안에 있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심판 이후에는 복된 자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記憶)함으로써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와 단죄된 자들, 무한한 분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사죄(死罪)를 범한 자는 끝없는 벌을 받으며, 영원한 지옥(地獄)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비로운 일을 한 그리스도교 신자도 만일 죄 중에 죽었다면 영원하게 벌을 받을 것이다. 은총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 4 장 『신학대전 요약』을 읽고 나서 ~ ~
기도가 평범한 음악가를 제2의 베토벤(Beethoven)으로 변형시키지 않을 것이고, 또 성서를 읽는다고 가난한 화가가 모네(Mobet)로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무수한 관념들과 인용구들을 담고 있는 『신학대전 요약』의 내용과, 나의 무거웠던 심정들, 인간관계의 어려움 속에서의 무거웠던 마음들을 비교하며 하느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은 처음 읽었을 때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성서를 읽듯이 편안하게 읽어 나갔습니다. 아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나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 의 묵주기도 처럼요...
이동익 신부님께서 주신 이 ‘하느님 사랑’에 답하려는 마음은 컸지만, 방학이라 회사에서 직원들이 ‘밥 한 번 먹자, 술도 고프쟎니??’, 학우들이 공소 체험 가기 전에 맛있는 것 사 줄테니, ‘공소 체험담 들려 줘라’, 기도에 심취했던 마음이 흩어지는 바람에 기를 다시 모으느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워낙 장엄한 저서 인지라 더욱더 힘들었던 작업이었지만 감히 올려 봅니다.
‘하느님 사랑’ 으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참고서적 ;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오미어러 지음 / 이재룡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