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진교훈*
1. 생명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미증유의 생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른바 생태학적 위기와 생명 경시 풍조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고 가속화 되고 있다.
이러한 생명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데서 생긴 병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묻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물음은 묻는 것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때 이를 알려고 하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묻는 것에 대해서 뭔가 조금 알고 있을 때에만 물을 수 있으며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물을 수 없다.
어떤 것이 문제된다는 것, 즉 어떤 것이 물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혼란 상태에 있거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해 준다.
물음은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발생시키고 긴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여러 방면에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생물학이나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지만, 종교학자와 철학자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가장 근원적이고도 가장 절실한 문제일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긴지에 대해서 아직 아무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생명에 관해 무언가 좀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는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교인, 철학자, 문학자, 생물학자, 의학자 등은 각기 그들 나름대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 간에 생명에 대한 하나는 이 통일된 견해를 찾아보기 어렵고,, 더군다나 같은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간에도 관점에 따라 생명의 의미는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이 워낙 깊고 넓은 것이어서 어떤 하나의 관점에서 간단히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생명은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믿으며,, 또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생명이 이 세상의 질서의 근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며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생명은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생명은 물질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명은 개념 정의가 불가능해 보이는 신비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을 생명은 성(聖)스럽다고 말하기도 하다.
우리는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물음에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자명(self-evident)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응답할 수 없다.
모든 생명체에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으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체는 따로따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며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교제하면서 응답하고 수수(授受) 관계에 있는 파트너이다.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하나의 여대 공동체(Solidargemeinschaft)이며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순환의 파괴는 모든 생명체에 심대한 타격을 준다.
자연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안식처이다.
이 안식처의 위기는 바로 모든 생명의 위기이다.
이 생명의 위기는 이른바 '생태학적 위기'와 바로 직결된다.
이 위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최 근세에 들어와 발생했고 극히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지난 200년 동안 계속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공해, 너무나도 많은 자연 자원의 낭비, 너무나도 많은 긴장을 만들어 냈다.
자원 고갈, 오염, 생명의 종의 멸절, 산림과 야원(野原), 습지와 갯벌의 상실은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생태학적 위기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것은 생명의 의의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오해에 기인한다.
첫째, 서양 근세에 나타난 소위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 자연도태(自然陶汰)라는 사상을 인간에게 주입시켜 생물계 일반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인간이 마치 지구의 착취자나 폭군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았거나 그렇게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인간의 '지구의 지배'를 오도했다.
그 예로 베이컨(F. Bacon)은 "자연은 순종하는 가운데서 정복된다"(natura prarenlol vincitur)고 말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고 외치면서 지식[科學)이란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인간의 현실 생활에서 실익을 거두는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서구인의 자연관은 베이컨적인 유물론적 경험론으로 가득 차 있다.
둘째, 서구인들은 관념론자들이건, 유물론자들이건간에 자연을 단지 물질로만 구성된 것을로 파악할려고 하고 기계론적으로 해석한다.
특히, 데카르트(R.Descartes)와 라마르크(J.B.Lamarck), 모노(J.Monod)에 이르러 그러한 심신(心 身)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극에 달한다.
자연은 인간의 필요와 수단으로서만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의 관건은 근본적으로 생태학적위기를 유발한 인간이 생명과 이 생명의 안식처인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2. 생명 개념의 다의성
생명이라는 개념은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사람들은 생명은 대체로 살아 있는 것(생명체, 생물)과 살아 있지 않은 것[無生物)을 분간해 주는 기준, 즉 목숨을 의미하며, 생물의 생활 현상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일반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좀 더 과학적인 정의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생명의 정의는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즉 생리적, 대사적(metabolic), 유전적, 생화학적 및 열역학적(hermodynamic)관점에서 정의 내릴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생리적 정의에서는 생명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생리 작용을 나열하고 이러한 생리 작용을 지닌 대상을 생명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 생명 규정에 가장 근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 생명 규정에 가장 근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을 다 보여 주지 못할뿐더러 모든 생명체가 이러한 작용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사적 정의에서 생명은 신진대사가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며 적어도 일정한 기간 내에 그 내적 성격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서 외부와는 끊임없이 물질 교환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의 종자나 박테리아의 포자 등은 상당 기간 대사 작용 없이도 존재한다.
생명의 유전적 정의는 한 개체가 자신과 꼭 닮은 또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 내는 특성을 가진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현상은 생식 작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꿀벌 중에 일벌이나 노새와 같은 동물은 생식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은 생명의 정의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상세서 살펴본 것처럼 생리적, 대사적, 유전적 정의와 같은 전통적인 생물학의 개념에서 생명의 정의를 내리기에는 불충분할뿐더라 생며의 속성을 다 밝힐 수 없다.
그래서 생화학적 정의와 열역학적 정의가 등장했다.
생화학적 정의는 생명의 특성을 유전적 정보를 함축하고 잇는 핵산 분자. 즉 DNA 분자들과 생물체 내에서의 화학적 반응을 조절하는 효소 분자, 즉 단백질 분자들이라고 보아 이러한 물질들을 기능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체계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정의도 결점을 가지고 있다.
상이한 분자적 구조를 지니면서도 기능적으로 유사한 성질을 가진 물체가 나타날 때 이를 생명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 대응할 수 없다.
예컨대 일종의 바이러스를 닮은 스크라피 병원균은 스스로 어떤 핵산 분자도 지니지 않으면서 숙주의 핵산 분자를 활용해 번식을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화학적 정의와는 달리 열역학적 정의는 생명을 자유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하나의 열린 체계로서 보고 특정한 물리적 조건의 형성에 의하여 낮은 엔트로피, 즉 높은 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특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한다.
이 정의는 생명의 체계가 어떠한 소재로 이루어졌든 간에 이러한 기능만 수행할 수 있으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도 생명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기 어렵다.
예컨대 높은 질서 유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물질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생명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다를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생명의 정의는 생명의 외적인 물리적인 사태에만 주목하고 생명의 내면적인 차원을 소홀히 다루었다.
자연과학적인 생명관은 마치 생명은 오로지 물질적인 것처럼 생명이 가지고 있는 영적(beseelt)인 측면을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관은 생명을 온전히 해명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가 직관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생명의 개념보다 생명을 히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예컨대, 생물 현상은 이러저러한 특성이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생물은 무생물과 달리 조직적이고 물질 대사를 하며 성장하고 자신과 같은 것을 번식하며 자연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생명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현상은 생명의 본질을 다 밝혀 주지 못한다.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은 생명의 본질을 다 밝혀 주지 못한다.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은 생명의 본질이나 생명의기원을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출현(발생)은 과거 단 한번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며, 자연과학은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생명의 기원 문제는 엄격히 실험과학의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을 문제 삼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과학의 영역을 떠나 철학적, 종교적 영역에서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생명이 초자연적인 계획과 설계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믿는 창조론이나 수십 억 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자연적인 방법으로 무기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간단한 생물이 출현하고 그 후 복잡하고 질서 있는 조직을 갖춘 고등 생물로 서서히 진화되었다고 보는 자연 발생론 내지 진화론도 다 같이 처음부터 생명에 대한 어떤 형이상학적인 전 이해(前理解)에 의거하는 것이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전제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생명에 관하여 연구하는 과학들이 많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모든 생명과학들은 그 방법론에서 한계가 주어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생물들의 어떤 부분을 설명해 주는 데 불과하다.
생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현상의 특성을 망라하고 이를 통합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험과학들은 생명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실험과학은 온갖 생물의 생명현상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실제로 다 종합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종합은 자의적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며, 개괄적인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는 데 있어서도 그것의 가능 조건으로 먼저 생명 전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전첼를 문제 삼는 것은 과학의 과제가 아니라 철학의 과제이다
생명에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측면이 있고,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설명될 수 없고 다만 이해(vertehen)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실제로 생명의 깊은 뜻을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하여 문학적 - 예술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