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 성서 | 윤리신학일반 (2)

2005. 9. 26. 오후 3:57:42

글자

1.2.3. 사도 바울로의 사상 안에서의 양심


      “신약성사 안에서 모두 30번 사용된 syneidesis 개념은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모두 14번 사용되고, 그외의 사목적 서한에서 6번,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9.14; 10,2.22; 13,18)에서 5번 사용되고 있으며,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3번 (2,19; 3,16. 21),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2번 (23,1; 24,16) 사용되고 있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syneidesis 개념은 사도행전에서의 두 번, 베드로의 편지에서의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도 바울로의 입을 통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며, 따라서 이 개념은 사도 바울로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사도 바울로는 이 세상에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소개된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과 내면적 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가장 잘 제공하고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다5).

      사도 바울로 외에 신약성서의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syneidesis 개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인 καρδια (heart, inner self, mind, will, desire, intention etc.)를 찾아 볼 수 있다 (마태 15,10-28; 마르꼬 3,5.6.52; 8,17; 1요한 3,20-21 참조).

      바울로가 취하고 있는 사상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볼 때 그가 사용하는 syneideis 개념은 무엇보다도 헬레니즘의 영향과, 또 그 반대로 셈족의 영향, 이 두가지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하나의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사도 바울로의 독자적인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로 사도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만일 윤리적 양심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미가 이미 전에 알고 있었던 의미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해석대로 바울로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개념으로써 윤리적 양심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에로 우리를 인도 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1.2.3.1. 고린토 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


      윤리적 양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로의 언급들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성서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본문이다.  이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 1고린 8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지식(gnosis)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랑(agape)도 함께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1-2절) 본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이미 사랑받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어떤 지식이다 (3절). 어떤 형태로든지 Gnosis 가 지니는 참된 의미는 분명한데 즉, 이 세상에는 어떠한 우상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느님, 그리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4-5절).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아직까지도 우상들에게 젖어있기 때문에 고기를 정말로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것으로 알고서도 먹는다”(7절).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도 약해져서 오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올바른 자유를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8절).

      곧 그러한 자유는 분명히 올바른 것이며, 그렇지만 그러한 자유가 형제들을 무지로 빠뜨리는 자유는 아니다.  사도 바울로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써 그들을 스캔들에 빠뜨리거나 허약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9절).

      그러므로 만일 gnosis로부터 나타난 어떤 행동이 허약한 양심을 가진 어떤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의 양심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면, 바로 그 허약함 때문에 그러한 행동은 단죄받게 될 것이며, 또한 올바른 행동으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10-13절).

      사도 바울로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끌어들이면서 그리스도적 자유의 전망에 관한 하나의 고유한 돌파구를 열어놓는다(9장).  그런 다음 현명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하면서 다시 우상숭배자들의 문제로 되돌아 온다 (10장 1-12절).

      10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14-18절): “나는 여러분이 귀신들과 친교를 맺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교도들이 바치는 희생제사는 귀신들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절).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성찬 밖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더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gnosis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단순히 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의지하는 행동에 대해서 한 번 더 거부한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하거나 (synterei) 건설적인 것(oikodomei)은 아닙니다”(23절).  이어서 사도 바울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찾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찾으시오”(24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파는 모든 것은 양심을 가지고 따질 것이 없이 다 먹으시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5-26절).  이와같이 만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는 양심을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27절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알려주는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27-29절 참조).

      이러한 경우에 사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29-32절 참조).


      이러한 텍스트와 함께 이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서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몇가지 점들을 제시해 보려 한다.

      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내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선함 혹은 악함을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다.  이 양심은 그 행위가 연약하든지 혹은 강하든지와는 관계가 없으며, 다만 구체적으로 내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것을 항상 나에게 명령하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지식과 자유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 둘의 조화이다.  그러나 이 양심은 그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지식과 자유는 애덕에로 향해야만 하며, 따라서 애덕에 따라서 실천되어야만 한다.

      3) 그러나 애덕으로서의 양심은 새로운 존재의 전 심연을 애덕에로 향하게 하면서, 사도 바울로가 양심에 대해서 촛점을 맞춘, 교회와 성령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4) 또한 신자들의 양심으로부터 나타나는 유익은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인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곧 유익이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드러나고 선포된 구원을 의미한다.


1.2.3.2. 로마서 14장


      우상숭배자들에 관한 문제는 로마서 14장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 텍스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1고린의 내용과 아주 비슷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면서 약한 자들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내용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신앙에 촛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의 소신에 시비를 걸지 말고 형제처럼 받아들이라는 요구와 함께 14장을 시작한다 (1절).  “어떤 이는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는가 하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이도 먹는 이를 심판하지 마시오” (2-3절).  그리고 어떤 날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느니 하고 구분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꼭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5절).

      그러나 각자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판단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5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현실에 다가 오시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시다(5-9절).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며,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자신에 대해서 낱낱이 하느님께 보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조심하시오”(13절).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서 부정한 것은 없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혹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가 부정하다”(14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대의 형제가 음식물 때문에 슬퍼하게 되면 그대는 이미 사랑을 따라 거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그런 이유 때문에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15-16절).

      게다가 하느님의 나라는 “실상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17절).  여기에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하느님께도 마음에 드는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봉사가 성립되는 것이다”(18절).  평화와, 서로를 위한 건설, 즉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진리와 자유를 부여하여야 한다(19-21절).

      14장의 결론 부분은 결국 고린토 전서와는 달리 신앙에 촛점을 두고 있다: “그대는 그대가 지니고 있는 믿음을 하느님 앞에서 그대 나름대로 견지하시오.  복되도다, 자기 생각대로 하면서도 자신을 단죄할 것이 없는 이여!  그러나 먹으면서도 망설이는 이는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믿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입니다” (22-23절).


      이 텍스트에 대한 Schlier의 해석은 매우 영감적이다: “확실한 생각 없이 먹으면서도 망설이는 사람, 즉 자신의 신앙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먹는 사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에게는 고기를 먹는 것도 금지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ουκ εκ πιστεωs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를 드러내는 하나의 행위가 되는데, πιστιs는 분명히 1고린 8,10-12에서의 syneidesis와 공통적인 점을 지닌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믿음은 양심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지만, 반면에 양심은 항상 믿음의 질문이 될 수는 없다.  신앙 안에서 완성되지 않고, 그리고 신앙에 대한 복종에로 이어지지 않는 행위는 양심을 거스리는 행위이며 따라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 안에 특별히 확신과 여러가지 종류의 행위를 내포한다.  예를 들면, 연약한 사람들의 행위와 강한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것은 분명 주님(κυριοs: 14,6-8))으로 고백되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분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믿음 안에서는 그 믿음과 함께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이 가능하게 되며, 그 믿음으로써 모든 행동이 결정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과 행위의 이러한 연결이 끊어지고 판단과 행위가 더 이상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자기 충족이 되며(로마 15,1 참조), 따라서 죄가 된다.  자기 충족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경멸하면서, 그리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해 함으로써 어떤 강한 것을 지향케 하는 일종의 위협이며, 따라서 이는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애덕에 반대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죄는 연약함 때문에도 생겨나는 일종의 위협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드러나는 강인함도 요구되기 때문이다”6).


      고린토 전서 8-10장에서 양심에 관해서 간단하게 요약했던 것처럼, 로마서 14장 역시 다음의 두가지 전망 하에서 양심의 개념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 믿음과 양심과의 관계에서 볼 때,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인간 존재의 심연을 책임지기 때문에 양심은 곧 바울로적 pistis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고 생기를 주는 살아있는 실재인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양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2) 양심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이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결코 손상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무척 중요하다.  양심에 대한 이런한 존중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양심과 믿음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왜냐하면 판단한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동익 신부님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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