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두 아들의 비유 (마태 21, 28-3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끝내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어 그를 믿지 않았다.
[해설] 두 아들의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앎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는 내용을 주요 메시지로 삼고 있다.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당신의 말씀을 단순히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산상설교를 마치면서도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어느 교부의 말씀처럼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있고, 교회 밖에 있으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있다.’ 비록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로 교회 안에 등록되어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요, 교적에 오른 적이 없거나 교회에 나오지는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이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격의 그리스도인이겠다.
앎과 실천, 언행일치, 믿음과 행실의 일치를 강조하는 이 일차적 메시지 말고도 비유 안에는 다른 차원의 메시지들이 발견된다. 논쟁의 차원과 그리스도론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둘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우선적인 대상으로 삼으셨던 청중은 큰아들로 대표되는 세리와 창녀들보다는 작은 아들로 대표되는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루가복음 제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자들에 관한 비유들이, 기쁜 소식을 반대하는 예수의 비판자들을 겨냥한 것과 마찬가지다. 유다 종교지도자들은 처음에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호의를 보였으나, 나중에 그분을 비판하며 배척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들에 대한 논쟁의 무기로 이 비유를 이용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논쟁의 차원은 곧바로 그리스도론적 차원으로 이어진다.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옛 질서와 전통에 집착하여,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 안에 새롭게 구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완고한 종교 지도자들 보다는, 처음에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했다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회개의 길에 들어선 죄인들이 훨씬 낫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시는 동시에,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강력히 요구하신다. 두 아들의 비유는 종교/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개인적으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