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예루살렘 입성 (마태 21,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가갈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에 있는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함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바로 보내 줄 것이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 곳에서 사고 팔고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 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그 때에 성전에서 눈먼 이들과 절름거리는 이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또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불쾌해 하며, 예수님께 “저 아이들이 무어라고 하는지 듣고 있소?”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당신께서는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성을 나와 베다니아로 가시어 그 곳에서 밤을 지내셨다.
[해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동안 유일하게 누린 현세적 승리였다. 군중은 라자로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려내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분을 따라오고 있었다. 베다니아 출신 라자로와 누이들은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했다. 군중이 크게 불어나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이같은 환호성에 순순히 몸을 맡기도록 당부하고 계신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사람을 먼저 보내 길 나르는 짐승을 구해오게 하셨다. 우리가 아는 한 그분이 나귀를 타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덕분에 그분의 위치는 군중보다 약간 높아져 누구나 그분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그분이 가는 길에다 깔기 시작했다. 군중의 열광은 금방 전염되었다. 그리하여 온 도시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군중은 올리브 가지를 흔들고 노래하며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이자 메시아의 선조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한다. 노랫말들이 하느님께서 방문차 내려오셨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이 “당신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라. 저들이 지금 당신을 하느님과 동일시 하고 있지 않느냐?” 하고 요구하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자 그분은 답변하셨다. “만약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삼라만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그분의 삶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경이로운 예루살렘 입성은 무수한 군중들의 우뢰같은 환성과 갈채가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군중의 환호는 그분이 올리브산 기슭에 당도하자 끝이 났고, 거기서 그분은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우셨다. 그분이 우신 까닭은 이 도성이 좋은 기회를 감지하지 못하고 놓칠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권력자들이 당신의 죽음을 모의하고 있고, 이제 환호가 곧 저주로 바뀌리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다. 군중의 피상적인 열정은 알맹이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왕이나 신으로 떠받들려 하는 마당에 그가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면 그 이상으로 여론에 나쁜 영향을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앞날의 처절한 비극 때문에 우셨다. 그분은 흐느끼며 신음하듯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네가 재난당할 때를 알았다면 좋았으련만 이제는 너무 늦었구나.” 그분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도성은 철저하게 파괴당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이 도성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신적 권능을 스스로 벗어 던지셨고, 더없이 연약한 상태로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셨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몸이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덕분에 우리 역시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에 투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인간조건과 거기에서 파생된 온갖 것들을 친히 알고 체험하신다. 말씀은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를 살고 계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세상에 이룩하신 새로운 창조와 합체되어 있다. 이로써 죄와 죽음과 인간 불행과 결속하는 아담의 죄와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지신 아빠요 고통과 기쁨 모두를 초월하고 또 고통과 기쁨 양쪽에서 똑같이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의식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