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神人)신앙은 가톨릭 종교생활의 힘

2005. 8. 10. 오후 4: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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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神人)신앙은 가톨릭 종교생활의 힘

가톨릭 종교 생활에 대한 오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을 영적 생활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어느 프로테스탄트 논자(論者)가 초대 그리스도교도의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인격적 신뢰였던 것을 가톨릭 교회가 법적 관계로 타락시켰다고 쓴 것을 보고 나는 아연 실색하였다. 도대체 이러한 논자(論者)는 가톨릭 종교 생활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항상 이 인격적 감화 대신에 성서의 문자를 가지고 논하는 어리석음과 잘못을 주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 성범’의 역자(譯者) 나카야마 씨는 그 서문 중에 "일반 독자는 제4권 ’존엄한 성체 성사에 대하여’는 도저히 인내를 가지고 다 읽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처럼 일면만 보는 그리스도관에 사로잡힌 현대인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것은 적절한 평이다. 위에 말한 논자(論者)같은 경우는 정확히 나카야마 씨가 지적한 일반 독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평소 개신교의 쟁쟁한 어느 명사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원문 번역을 가지고 와서 "이 책 중 제4권은 가장 중요하며 이것을 도외시하고는 ’준주 성범’의 진가를 알 수 없다. 요컨대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식으로 읽어서는 알 수 없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된다." 라고 말하여 나에게 크게 용기를 주었다. 개신교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람의 입에서 이러한 말을 듣고 또한 그러한 사람에 의하여 번역되어 이와나미 서점에서 출간된다고 하니 사뭇 "천국은 가까워졌다."는 감을 금치 못한다.

 

 신인(神人) 신앙은 종교 생활의 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본체적 일치 결합에 대한 신앙은 모든 종교 생활의 이상인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결합의 살아 있는 전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이상을 향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모든 진정한 종교적 요구가 지향하는 것은 사람의 영()과 하느님의 영()의 융합 일치 바로 그것이다. 본체적으로 하느님과 결합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복한 하느님의 직관과 지상 생활 중에 나타난 수난과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한 희생적 사랑을 통하여 얼마쯤이라도 우리 마음에서 원하는 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현세에만 한정된 인간의 생애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된다. 그러나 이 두 가닥의 실은 서로 엉켜 있어도 고통은 즐거움이 아니며 서로 배제하여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도리가 없다.

 

 종교 생활은 이 참기 어려운 제한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즐겁게 하여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고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요한 14, 27)고 덧붙이셨다. 가장 괴로운 희생 생활을 하며 견디기 힘든 고통속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라는 자각에 의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마음 속에서 우러난다. 고통의 눈물이 변하여 감사의 눈물이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지복한 생활과 인간의 인내와 생애와의 융화는 그 제자인 우리도 모방할 수 있는 것이다.

 

 죄로 더럽혀진 인간 중에 우리의 모든 번민을 완전히 이겨 낸 순결한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인성과 신성이 일치되어 뗄 수 없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인류 모두는 그 얼마나 영광이며 자랑이겠는가. 절대 완전한 하느님은 사람을 통하여 만드신 세계와 접촉하시며 인성을 통하여 모든 것을 구원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마 8, 19).

 

 모든 사람이 하나같기를 바라는 마음, 아버지가 자신을 꼭 닮은 자식을 보려고 하는 마음, 어머니가 아름다운 딸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심정,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순진한 마음, 나아가서 걸출한 자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관습은 형제 중 장형(長兄)인 그리스도에게 끌어당기는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종교 생활의 이상은 단지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있는 같은 무리 중 한 사람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고 이는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겠는가.

 

 그리스도 출현 이전에도 고상한 이상이나 교훈은 결코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의 단순한 희구나 추상적 명사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친 사람들조차 애석하게도 이상을 실현하기가 어려움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힘이 그 외 모든 인조(人造) 종교를 능가하는 근본 이유는 그 가르치는 이상이 살아 있는 현실로서 주어지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은 자칫하면 그 도덕은 취하나 도그마(dogma) -교리- 는 필요없다든가 그 종교적 천재는 인정하나 교회적 신앙은 아무래도 좋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마음대로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대는 헛되게 껍질을 안고 그 안의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좋은 예이다. 그 외의 복음서는 역사적 인물을 종교적 상상이 색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색칠로 하여 복음서를 만든 사람들이 주인공 그리스도 이상의 인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과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헐뜯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는 이 외 바꿀 수 있는 다른 위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어디까지 가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위대함은 어디서 왔는가. 마태오, 루가, 마르코, 요한 혹은 이들의 이름에 의하여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 내지는 초대 교회의 신도 전체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신앙은 왜 세계적 가치 전도운동을 일으킬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 나는 이 의문에 대한 철저한 회답을 앞서 말한 것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듣고 싶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사실이다. 누구도 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그 근원에 신인(神人)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면 모든 것은 쉽게 설명되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알 수 없게 된다. 이 점에 관하여 옛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고 있다.

 

 "만일 그 근원에 기적이 없이 그리스도교가 성립한 것이라면 그리스도교가 성립하였다는 것 자체가 모든 기적 이상의 대기적이다."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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