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포도원 일꾼과 품삯 (마태 20, 1-15)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비슷하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서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 나가서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고용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에 고용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선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해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의 기준에 대해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더 많은 시간을 일을 한 사람이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공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다시 인간의 판단기준이 뒤집히고 있다. 평범한 정의의 기준으로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3장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면서 하느님은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으신다고 지적한다. 의로움과 성화는 은총의 선물이지 사회적 지위나 개인의 공로와는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마당에 하느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공로를 세움으로서가 아니라 초대에 응함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 비유에서, 은총은 더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는 주인의 불가사의한 필요성으로 표상되고 있으며, 그가 두어 시간 간격으로 나가서 더 많은 일꾼을 구해 들인다는 사실이 필요의 절박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초대에 응한 이들은 포도원에 들어갔고 하루가 끝날 때에 모두가 똑같이 보상을 받았다. 은총이란 우리의 요구에 응답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필요성이다. 하느님의 내적 본질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명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은 장터에서 노름하고 술마시고 남의 험담이나 하고 꾸벅꾸벅 조는 등 빈둥거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계신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은총의 초대는 몇 번이고 계속 이어진다. 어느 누구도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지는 않는다. 초대가 범위를 넓혀가는 것은 선하시고 아낌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본성 때문이다.
이 가르침의 기본 노선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들의 정의와 평등 기준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태의 인간조건에 응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계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조건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는 자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와 그 결과에 무한한 관심을 쏟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영적 순례는 우리가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흠없는 선물을 한결 더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는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구원의 노력과 성화사업들이 의문의 여지가 많은 이유,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키워 나가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성은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 착한 행동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 그 자체다. 충실하고 고결한 삶이 지니는 문제점은 그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러는 중에 초대를 놓치고 만다는 데 있다. 외로움을 인정받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낌없는 베풂 덕북이다. 선한 행실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한 의지를 드러내 보인다는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만을 지켜보고 우리에게 후광을 씌어주기 위해 대기하고 계시지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죄지은 자들을 기다려 용서하시고 한없는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어린아이들처럼 품에 안아주고자 기다리신다.
이 비유는 인간의 판단기준이 하느님 나라에서 차지할 공간이 전혀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새로운 기준은 자비를 보이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필요성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