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 권 제 십 삼 장
어릴 때 배우던 희랍말이 왜 그리 싫었는지, 지금도 그 까닭을 밝히지 못한 채로 있습니다. (역주: 희랍어문의 실력이 없었다는 뜻이 아님. 다만 뛰어난 헬레니스트가 아닐 뿐, 그는 원문을 읽어서 이해할 줄도, 옮길 줄도 알았고, 남이 오역한 것을 바로잡을 줄도 알았다.) 라띤말은 퍽 재미가 있었으나 초등교사들이 가르치는 것말고 문법학자의 이름있는 이들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읽기, 쓰기, 셈하기를 배우는 초등학과는 희랍어 전과목에 못지 않게 짐스럽고 따분하였습니다. 이 분명 “살이요, 가고 아니 돌아오는 바람”(시편 77,39), 이런 나의 좌악 들뜬 생활에서가 아니고 무엇이더이까.
정말 초등교육은 나로 하여금 예나 지금이나 글월을 읽고, 내 의사를 적을 수 있게 해준만큼 훨씬 잇속있고 건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것들은 에네아스인지 무엇인지(역주: 그토록 심취되었던 ‘에네아스’를 모를 리 없었으나, 여기선 얕잡아 쓴 것.)하는 따위의 표랑을 내 방랑을 젖혀둔 채 외우게 씌였고, 연애로 자살한 디도(역주: 로마의 최대 시인 뷔르질리우스가 남긴 ‘에네아스’에 나오는 인물. 엘리사라고도 불리우는 띠로의 이 왕녀는 망부 시케오에 대한 절개를 굽힐 수 없어 아프리까왕 자르바스와의 재혼을 거절하고, 단도로 자살했다는 것이 희랍의 전설이다. 뷔르질리우스는 이와는 달리 각색했다. 즉 뜨로야 전쟁 후 에네아스가 까르타고에서 돛을 내리자, 그곳의 여왕 디도의 환대를 받았다. 디도는 에네아스를 두고 연연해했으나 영웅이 까르타고를 떠나게 되자, 디도는 실망 끝에 타오르는 섶에 몸을 던져 죽어버렸고, 영웅은 시칠리아로 가는 뱃길에서 그 불길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를 울어주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러노라 내 생명이신 천주여, 당신을 떠나서 죽어가는 내 자신에 대해선 가엾게도 한 방울 눈물 없이 지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가엾은 놈이 저 자신을 가엾어할 줄 모르고, 에네아스의 사랑으로 해 죽는 디도는 울면서 당신을 아닌 사랑함으로 죽는 제 죽음은 울 줄 모르는 것보다 더 가엾은 일이 또 있사오리까? 하느님 내 마음의 빛이시여, 내 영혼의 속입 빵이여, 내 정신과 그윽한 상념을 짝지어주시는 힘이시여!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고 당신을 멀리 사음했었고, 사음하는 나를 보고 온 사방에선 “좋다 좋다”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세속과의 사귐이 곧 당신을 떠나 사음함이오니 “좋다 좋다”소리는 되려 이러지 않는 사람더러 부끄러워하라는 것이옵나이다. 나는 이런 일을 슬퍼할 줄 모르고, “급기야 칼로 자결해버린”디도를 슬퍼하였습니다. 당신을 버리는 대신, 당신이 지으신 미물을 좇아 흙으로 흙덩이가 들어가면서.
그때 만일 이런 것을 읽지 말하 했던들 슬픈 것을 못 읽는 것을 슬퍼했을 것이옵니다.
내가 읽고 쓰기를 배운 그 학과들보다도 이런 어리석은 것들이 더 훌륭하고 잇속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하느님이여, 내 영혼 안에서 소리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내게 말씀하소서.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라고. “처음의 학문이 아주 훨씬 나은 것이라”고. 이제야말로 차라리 쓰기, 읽기를 잊지 말고 에네아스의 표랑이니 그런 따위를 다 잊어버리기로 작정하고 있으옵니다. 지금도 문법학원의 출입문에 휘장을 드리우고 있습니다만 (역주: 학원의 정문은 문이 아닌 휘장으로 거리와 구분되어 있었다. 별다른 뜻이 없이 다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구실뿐이었으나, 아구스띤은 여기 풍자의 뜻을 붙이는 것이다.) 그것은 영예의 비밀보다 그릇됨의 덮개를 의미하는 것이옵니다. (역주: 그의 설교에 “휘장은 비밀의 영예를 창조한다”고 한 말의 메아리일는지?)
내 하느님이여, 내 영혼이 여쭙고 싶은 말씀을 드린다 하여 나를 거슬러 외쳐도 쓸데없습니다. 이미 나는 그들이 무섭지 않사옵니다. 도리어 나는 사사스럽던 내 길을 나무람에 순응하오니 착한 길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거슬러 문법을 팔고 사는 이들이 외치지 말라소서. 내 만일 그들에게 한때 에네아스가 까르타고에 왔었더라는 시인의 말이 옳으냐고 질문을 내놓는다면 무식한 자들은 모르겠노라 대답할 것이요, 식자들은 사실임을 부정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또 에네아스의 이름을 무슨 글자로 쓰느냐고 물으면 이것을 배운 이는 누구나가 인간 자기네끼리 약정해서 만든기호를 가지고 옳은 대답을 해줄 것입니다.
다시 묻기를, 읽고 쓰기와 이런 시로 된 얘기 중에 잊어서 우리 생활에 더 해로울 것이 어느 쪽이냐고 할 때, 제정신 잃지 않은 사람이면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지 누가 이를 모르겠사오리까.
그러므로 나는 어려서 저 쓸데없는 것들을 쓸모있는 이것들보다 더 좋아하고, 아니 그보다는 이것을 미워하고 저것은 사랑하노라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에다 하나는 둘, 둘에다 둘은 넷”이 일찍부터 내게는 진절머리나는 노래이었고 (역주: 수학이 진절머리났다는 말.), 무장군이 가득 찬 목마와 “뜨로야”의 불, 그리고 저 “끄레우사의 그림자”(역주:‘에네아스’제 2 권 772 항의 인용. 에네아스가 불타를 뜨로야를 버려둔 채 아비와 자식을 데리고 ‘이다’산을 향하여 그 아내 끄레우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아내는 보이지 아니했다. 오던 길을 다시 걸어 아내를 찾았으나 보이느니 불꽃과 잿더미가 된 뜨로야뿐이었다. 문득 그 속에서 끄레우사의 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신들의 뜻이 그대와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띠벨 강가에서 길한 일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나 죽은 것을 그리 설워 말라는 것이었다.) 같은 허황된 광경이 흥미진진한 것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