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부자 청년; 낙타와 바늘귀 (마태 19, 16-26)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들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실행해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해설] 이 비유에서 그분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이 같은 선언을 들은 청중은 부에 대한 최후의 희망마저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절망에 찬 비명을 지르며 서로 수근거렸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께서 하신 답변,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는 말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간다는 당신의 선언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의 영적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그 점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을 지 모른다. 각 사람의 공로를 두고 왈가왈부 할 필요 없이 우리가 곧바로 마주치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이 사후에 처하는 전혀 다른 처지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역전되고, 거대한 구렁텅이가 둘을 갈라 놓는다. 부자가 이승에서 쌓아 놓았던 장벽들이 명확히 저승까지 그의 뒤를 따라붙고 있는 것이다. 비유의 핵심은 그가 누린 환락의 대문이 언급되면서 수정처럼 투명해진다. 부자에게 있어 이 대문은 약탈자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일종의 방벽이었다. 부자들의 문제는 재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더 완벽한 보호장치가 필요해진다는 데 있다. 대문은 방벽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이 중에서 후자가 하느님 나라의 비결이다. 부자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원인은 그의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를 잘못 관리한 데 있다. 그는 그 풍성한 선물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 부는 반드시 나누어야 했던 것이다.
창세기(4장)에서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풍성한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올바른 것이 되는 지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풍성한 부는 공동체를 위해 부여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과의 친교 속에 자리한다. 모든 대인관계는 궁극적인 신비로, 궁극적인 인간 가치관으로 통하는 통로다. 그렇다면 대문이 표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들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은총의 상징인 대문은 우리에게 개인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온 인류 가족과 친교를 이룰 수 있게 한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부자들이 단죄받는 것은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라자로를 품에 안고있는 아브라함도 대단히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온갖 약속의 실현을 표상하는 상징이 되고있다.
따라서 부자에게 파멸을 초래한 것은 그의 부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부자는 자기의 재산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예배보다 친교가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먼저 화해의 대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위선이요, 신심을 가장한 사기행각이다. 그러기에 복음에서는 서로 용서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심으로써 이 같은 규범을 뒷받침하고 계신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공동체가 최고의 가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실로 중요하다. 우리가 대문을 나서서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진정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올바로 동화할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인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는 그대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투영한다. 이기심, 자기 중심주의는 대문을 닫아 건다. 거기에는 하느님도 들어가실 수 없다. 친교, 즉 인간관계를 향해 영구히 열려있는 대문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