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나가는 길 (환자 체험기)

2006. 7. 20. 오후 11:26:30

글자

생명으로 나가는 길 (교44회 구향자 모니카)

 

일몰 시간도 아닌데 희끄무레한 눈발이 창가로 달려들어 내 마음처럼 시야를 어둡게 한다. 이십여 일이 지나도록 열이 떨어지지 않는 남편의 잠든 모습, 그 초췌하고 앙상한 몰골에 가슴이 저민다. 아이들을 미처 챙길 여유도 없이 올 한 해는 거의 병원에서 떠돌이처럼 살았다.

 성당 감실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본다.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에 놓아 드린다. 짓눌린 어깨를 펴니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 머리 둘 곳은 오로지 이곳뿐이다. 하루하루 가슴이 죄여오는 절박함, 주님만이 희망이다. 어젯밤에는 절망의 끝자락을 잡고 엉엉 울어댔다.

 "주님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 한 번 기회를 주세요…." 주님의 침묵은 더 처절하게 나를 울부짖게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비몽사몽 풀어진 내 앞에서 피땀으로 범벅이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기도하고 계셨다. 분명 꿈도 아니고 또 깨어 있는 시간도 아닌데…. 그 충격적 의미를 바로 인식했다.

 "예수님! 저도 당신 뜻에 맡깁니다. 다만 남편이 당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 자비 손길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절규하는 내 얼굴에서 고인 물 퍼내듯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의 열이 올라간 원인은 방사선으로 약해진 식도 상처로 음식물이 기도를 통해 흘러들어갔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당분간 '금식'이라고 간호사가 전했다.

 남편은 7개월 전 심한 목감기 증세로 검사를 받았다. 식도암 말기라는 진단 결과에 우린 순식간에 모든 게 무너져내려 덮친 듯했다. 혼비백산 헤매다 정신을 차려 남편을 입원시켰다. 항암 주사와 방사선 치료를 번갈아 받으며 병실 생활이 시작됐다. 남편은 이슬람학을 연구하기 위해 동경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적을 두고 논문을 쓰고자 일년에 두어차례 일본을 내왕하며 지쳐있었다. 발병도 바로 그때쯤이었고, 증세가 악화 된 것도 막무가내 옹고집으로 흉부외과 교수 만류에도 10여일 이상 일본을 다녀온 뒤 현저하게 체력이 떨어지면서부터였다. 그의 완고한 성격은 나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국 그를 겸손한 아들로 부르시고, 새 생명을 약속하셨던 것을 그 이후에야 알게 됐다. 그의 마지막 부탁을 주님께서 모두 들어주신 것을 확신한다.

 남편은 꿈에 십자가 예수님이 걸어오셔서 그를 안아주며 "나를 믿으라"고 해서, "그렇게 한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병문안을 오신 막내딸 친구 부모에게 들려 드리고 신부님을 모셔와 세례를 주시도록 부탁을 드렸다.(난 이슬람학에 심취해 있는 그를 개종하도록 권하지 못했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준 자비의 손길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신부님께서 병실로 찾아오셨고 남편은 최선을 다해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정갈한 정장으로 차려입고 세례 준비를 했다. 그날 그는 '바오로'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바오로처럼, 남편은 온전한 하느님 아들로 태어났다. 기쁨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내 마음 속에 가득 찼다. 그리고 10일 뒤 남편은 평화 가운데 임종했다. 이제 난 더 이상 울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이미 주님께서는 남편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고, 그는 믿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그의 몫까지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그를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 그것은 주님의 선물인 것을 두고두고 감지했다.

 나는 약해진 몸을 추스르는 50여일 동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다. 전에 친구의 부티끄 대리점 운영을 몇 년간 도와준 일이 있었으나, 이제는 주님 안에서 새 직업을 찾아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도했는데 "고통 있는 곳으로 가라"는 응답 말씀이 '병원'임을 알아차렸을 때, 주보에 실린 '빈첸시오 간병인 모집'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담당 수녀님을 찾아뵙고 소정의 절차와 자격인증교육에 참가했다. 1개월 뒤 간병인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새로운 삶에 희망을 걸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환자를 만나고 친절한 마음으로 아픔을 위로하고 최선을 다해서 간병을 했다. 남편 고통을 지켜보던 연민으로, 때로는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오로지 시선을 환자에게만 고정했다. 그동안 남편은 충분한 하드 트레이닝을 시켜준 것이다. 지극 정성으로 간병 일을 잘 해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에, 엄마가 돌봐줄 수 없어 심적 타격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방황하는 아이들로 힘겹게 지탱하던 힘이 싹 빠지고 심한 갈등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좀더 쉬운 직업을 찾아야 할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잠재우고 자정 넘어 성당 감실 앞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했다.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 들어갔다…"(탈출 14,22 참조). 그날 밤 들려주신 말씀이다. 내 처지를 아시는 하느님 섭리임을 깨닫고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신바람으로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파라오 군대 같이 달려드는 생활 여건들, 아이들 등록금에 생활비 걱정, 적막함, 우울증 등을 따돌리고 앞만 바라보고 현실의 위협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버텼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그 바다 한 가운데서 탈출했다.

 성모병원 촉탁 간호조무사로 채용돼 중환자실에서 일하게 됐다. 모든 상황이 극심한 가운데에서 주님은 나의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한 단계씩 훈련을 통해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인도해주신 것이다. 3교대로 매일 출퇴근을 하게 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다. 그동안 아이들 극기와 인내는 자신들을 성실하게 관리할 수 있는 성장의 밑거름이 돼주었다.

 매일같이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긴장의 연속인 중환자실 근무를 하면서 곳곳에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치유하시는 사랑을 느낀다. 환자들을 향해 건네지는 그 모든 손길, 의사를 통해, 간호사들의 여린 손 끝에서 그 하나 하나 생명을 중심으로 하느님 에너지가 이분들의 손길에서 흘러 들어간다. 밖에서 환자 가족들의 슬픔과 원망과 한이 차올 때 누구도 볼 수 없는 여릿여릿한 시간 속에서 확실하게 생명의 신비가 전류처럼 흐르고 의료진들의 일사불란하고 숙련된 손길에 치유는 일어난다. 얼마나 보람되고 멋진 일인가, 하느님과 충실하게 함께하는 생명의 재생작업이 얼마나 위대한가, 딸과 같은 간호사와 일하며 행복했고, 열정을 갖고 일하며 기쁨에 떨었다. 좌충우돌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간호사들의 따뜻한 배려를 통해 중환자실에서의 6년간은 육십을 훨씬 넘긴 나의 삶에서 큰 광맥을 품고 그것을 찾아낸 시간과도 같다. 또 신앙 안에서 거듭나기 위한 광야의 시간이었고, 3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중환자실은 모든 불순물을 걸러 재생하는 용광로의 끌어 오르는 열기를 느끼는 위대한 삶의 자리였다.

  
내과 중환자실에서 만난 불꽃같은 찰나를 각인시켜준 아름다운 영혼의 메시지가 내 삶을 또 변화시켰다. 긴박한 상황으로 달려온 의사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간호사들의 손놀림은 바쁘다. 이십대 후반 젊은 여성의 어머니는 혼절 직전이어서 위로 겸 "수녀님께 기도 부탁할까요"하고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잡는다. "저애가 병이 나으면 성당 다닌다고 했어요…." 그리고 잠시 뒤 환자 상태가 호전됐다. 재빨리 수녀님께 세례를 부탁하고  20여분 지났을까 검사실 일을 마치고 병실로 들어서는데 수녀님께서 "마리아라고 대세했어요"하고 귀띔하신다. 좀 전 상황과 아주 달라졌고, 평화가 흐른다. 잠시 후 모니터가 꺼지고 환자는 마리아로, 천상의 딸로 다시 태어났다. 하느님은 한 영혼도 찾으신다! 그것은 새로운 도전으로 내게 밀려왔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한 생명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 어떤 영혼도 제외시키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스런 소명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일꾼으로 부르고 계심을 깨닫는다. 불가능을 믿음으로 도약했다, 62살에…. 이어 가톨릭교리신학원에 입학해 지금은 영적 간병사인 선교사로 일하게 됐다. 주변에 중환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위해 방문교리와 기도봉사를 한다.

 남편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남이 아닌 새로운 삶의 생명의 터전을 마련해줬다. 척박한 인고의 길에서 오로지 나의 선택은 기도할 수 있는 은총으로 세상의 길에서 조금씩 회개하며 하느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이끌어줬음을 깨닫는다. 생명과 사랑의 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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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의료협회와 평화방송ㆍ평화신문 공모 제1회 환자체험수기 최우수상 '생명으로 나가는 길' (구향자 모니카) 요약입니다.

댓글 3

  • 2006년 7월 21일 오후 5:44

    남편의 병으로 오히려 세례를 시켜 하느님의아들이 되어 하늘나라로 보내고 간호사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교리 신학원까지 다니게 된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 입니다.

  • 2006년 7월 21일 오후 5:45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요약해 써 주신 안드레아 님 감사드립니다.

  • 2006년 7월 21일 오후 9:06

    감동적인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