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과부의 헌금

2009. 11. 8. 오후 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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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08. 서울주보 생명의말씀

 

          가난한 과부의 헌금

                                                                                                    구요비 욥 신부│프라도회 한국책임

 

   오늘 복음을 읽으며 러시아의 한 민화가 떠오릅니다.

   옛날에 아주 인색한 노파가 살고 있었어요. 살아 생전에 한 번도 선행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서, 죽은 후에 지옥에 던져졌어요. 이 노파의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릴 무슨 좋은 일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가까스로 한 가지를 찾아서, “저 노파는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하느님은 “그럼 네가 그 파를 가져다가 불바다 속에 있는 노파에게 내밀어 그걸 붙잡고 나오도록 해라” 하고 대답하셨어요. 그래서 천사는 노파한테 달려가서 파를 내려주면서, “할머니, 이 파를 붙잡고 올라와요” 라고 말하고, 조심스럽게 그 파를 끌어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거의 다 끌어올렸을 무렵,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자기네들도 노파와 함께 나가려고 모두가 그 파뿌리에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그 노파는 다른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나를 끌어올려 주는 거지 너희들이 아니야. 이건 내 파야” 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파는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결국 노파는 다시 불바다 속에 빠져서 지금까지도 계속 있고, 천사는 구슬피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는 거예요(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중에서).

   이 우화는 제게 늘 가슴 떨리는 감동을 주곤 합니다. 그것은 이 천사가 어쩌면 예수님의 모습이고, 하느님은 예수님의 아버지(聖父)의 마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지에게 성의 없이 건네준 아주 인색한 노파의 파 한 뿌리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보증수표와 같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동전 두 닢에 대한 축복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43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주님의 경제학(Economy)은 우리의 경제 논리와 크게 다름을 보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실용주의(實用主義)의 입장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실용주의란 돈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유용성(有用性)과 효용성(效用性)을 가치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이 이론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를 부정하고, 언제나 인간의 그때 그때의 생활과 관계되는 경험적이고 상대적인 가치만을 표방합니다. 그 결과로, 진리와 도덕도 개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규정된 유용성의 결과로 환원시키는 것이 실용주의의 결정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믿는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 그 자체로서 참(眞)되고 선(善)하며 아름답다(美)고 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만물이 그 분 (하느님에게서 나와 그 분을 통하여 그 분을 향하여 나아가며(로마11,36), 그 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에페4,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경제 논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합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헌금의 가치는 봉헌한 돈의 액수보다 그 봉헌 후에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돈이 얼마인지까지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44절). 이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소유 재산이기에 나름대로 헌금하는 자유의지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헌금으로 표현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그 행위를 가치 있게 합니다’(요아킴 그닐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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