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와 가난의 신비

2008. 12. 6. 오후 10:19:53

글자

 '바오로의 해' 기획특집, 서울주보 2008. 12. 07.

   <바오로 사도와 가난의 신비>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가 대부분 평범한 어부 출신이었던데 비하여 타르수스 출신의 도시인이었고, 유대교의 정통 교리와 신학을 배운 바리사이파 지도자로서 높은 교양을 지닌 문화인이자 로마 시민이었다(사도 22,3-26).
   하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2코린 10,11). 무엇보다도 늘 병고를 짊어지고 살았다(2코린 12,7; 갈라 6,17). 특별히 사도로서 겪은 혹독한 환난과 시련과 박해는 우리의 마음을 절절하게 한다(사도27,1-44; 2코린 11,23-33).
  이런 극한 상황 안에서도 그를 지탱해 주는 불굴의 생명력과 끈질긴 인내와 희망을 보며 우리는 경탄하게 된다.
   이 사도의 이율배반적인 실존을 '가난'의 신비라고 지칭한다면, 이는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1. 바오로 사도의 회심(回心)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사도 9,8).
   바오로 사도의 개종에 대한 여러 교부들의 해설이 이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특별히 중세의 신비가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이렇게 해설한다(설교집 71): 내가 보기에 이 짧은 한 마디 Nihil(無: 아무 것도 없다)은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그가 눈을 떠서 본 것이 무(無)였으니 이 無는 하느님이셨다. 왜냐하면 그가 하느님을 보면서 그분을 무(無)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하느님을 볼 때에 그 나머지 모든 것을 무(無)로 여겼다.
   사실, 같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전하는 사도 22,17은 "나는 무아경에 빠져 그분을 뵈었다"고 하고, 사도 26,16-18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시종으로 삼고 네가 나를 본 사실과 또 앞으로도 내가 네게 나타나게 될 사실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것이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해설도 이와 비슷하다. "바오로 사도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을 때에, 비로소 그는 하느님을 보게 되었다"(설교집 279 n.1).
   바오로 사도의 '가난'이란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처럼 하느님만이 전부(全部, Todo)이며 그 나머지는 전무(全無, Nada)라는 그의 실존적인 신앙, 그의 근본적이고 전인적인 태도와 결단을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

   일본의 여류작가 소노 아야꼬 여사와 시리에다 마사유끼 신부 사이의 서간집 '헤어지는 날까지'의 내용이 떠오른다. 한국의 나환자촌 '나자로 마을'을 많이 후원해오기도 한 이 소설가는 1980년대 일본의 성서 전문가들과 함께 '바오로 사도의 세계'를 직접 답사하고 취재하는 연구 조사단의 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명(失明)의 위기 앞에서 큰 수술을 앞두고 바오로 사도처럼 3일간 모든 감각을 상실한 '광기(狂氣)'의 세계를 방황한다. 이런 위기 안에서 '삶과 절망과 영혼의 대화'가 이어진다. 두 분이 나눈 서신 가운데 "소노 여사는 모든 것을 상실했을 때 하느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절망'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아직도 나의 심금을 울린다.
 

 

  2. 자기비허(kenosis, 自己卑虛)의 하느님의 아들

   회심(回心) 후 바오로 사도의 모든 사유는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그분께로 돌아간다(1코린 15,20-28; 에페 4,6; 콜로 3,11).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
하느님이 전부(Todo)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우리는 하느님의 초월성이라고 부른다. 이는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하느님의 사랑(로마 8,31-39; 에페 3,17-19),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지혜(로마 11,33-36; 1코린1,18-25)를 말한다. 이 하느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로 드러난다(로마 10,5-21; 11,11-24; 에페 1,3-4. 15-23).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는 분이다(갈라2,6; 에페 2,14-19; 에페 4,4-6).
   이 하느님의 심오한 구세 경륜 안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 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6-28).
   실제로 바오로 사도가 세운 교회들 중에 가장 큰 교회가 코린토 교회인데, 특히 하층 주민들, 날품팔이들과 노예들로 이루어졌다. 복음에 사로잡혔음을 느낀 사람들 다수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하느님의 선택은 더 깊이 볼 때에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가난에서 비롯된다 :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3. 바오로 사도와 가난한 사람들

   사도란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결합(koinonia)된 사람이다(로마 9,1; 2코린 2,14; 필리 1,13).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는 사람(in persona christi)이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또한 이 사람 안에서 약동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과 권능이 사도의 가난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코린토 2서의 갈피갈피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2코린 1,3-11; 4,7-5,10; 6,1-13; 11,16-33). 그것은 사도로서 교회 공동체원들과의 깊은 일체감이며 자신의 허약함 가운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전능이다. 
   "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5.9-10).
   이 사도의 가난은 어떠한 처지 안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 12-13).

   바오로 사도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강조하며 이를 소홀히 하는 교우들을 엄하게 질책하셨다. 코린토 교회 안에서 성찬례(Eucharistia) 중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통하여 부유한 신자들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예들과 형제의 친교를 배워야 했다(1코린 11,17-22).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가 물질적인 궁핍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방인 지역 교회들이 조직적인 모금 운동을 통하여 도와주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로마 15,31; 2코린 8-9장). 자신도 직접 모금액을 갖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가 권고했던 모금, 헌금, 자선의 신앙적인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가난이었다 :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마무리하며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를 만나 친교(koinonia)의 표시로 서로 악수를 나눈 뒤 합의한 내용은 이렇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왔습니다"(갈라 2,10).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이는 누구인가? 예루살렘 교회 전체를 말하는가? 아니면 그 교회의 빈자들만을 가리키는가? 아니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예루살렘 교인들을 특징짓던 일종의 명칭이 아닐까?(J. 그닐카)
   바오로 사도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볼 때 가난은 신비의 영역 안에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가난은 하느님의 본성에 속하며 또한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은 결코 악이 아니라 축복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구요비신부님 나눔글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