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경건하고 독실한 개신교 형제들 중에 가톨릭의 혼인 미사나 장례 미사에 참여하였다가, ‘신자 아닌 분들은 영성체를 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말을 들으며 깊은 슬픔을 느낀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한 개신교 신학자께서는 ‘성체성사는 칼과 총탄보다도 강합니다’라고 하였다.
미사 예식 중에 집전자인 사제만이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들이 있다. 예물 준비 때에 사제는 포도주에 물을 한방울 섞으며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우리도 우리의 비천한 인성(人性)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참여케 하소서!’ 하고 속으로 기원한다. 사실 내게는 이 순간이 미사 중에 가장 행복한 때이다! 하찮은 물질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를 이룬다는 신앙고백은 이렇게 우리 인간성(人性)이 하느님의 신성(神性)으로 변용(變容)될 수 있다는 희망 뿐 아니라 온 세상과 우주 자체의 진보와 변모로 우리의 시야를 열어준다.
신토불이(身土不異)가 말해주듯 어쩌면 인간의 몸과 정신도 그가 태어난 땅의 소출을 섭생할 때에 최상에 이를 수 있다. 이렇듯 하느님의 모습으로 태어난 인간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살 때에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나날이 성장해간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천사의 양식(Panis Angelicus), 신령한 음식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가 그 분의 몸과 피로 실체적으로 변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말하자면 일종의 ‘핵분열’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의 원리가 창조 안에 도입된다. 이 변화는 온존재의 핵심에 파고 들어 실재를 변화시키는 과정,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기까지(1코린 15,28) 온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시작한다(사랑의 성사 p.32).
그래서 우리가 단지 영성체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수동성에 머물러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봉헌물은 이 세상의 성장 우주만물의 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성장 뿐이다(떼이야르 드 샤르댕).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익명의 사람이 제공하는 큰 이층 방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한다(15절). 예수님은 이 집주인에게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14절)’ 하고 물으신다. 이 부유한 주인은 기꺼이 자신의 제일 큰 방을 내어 드린다. 이 주인은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신을 개방하고 주님과 제자들을 영접하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상통한다. 예수님의 자기 증여, 즉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심을 닮고 있다. 이 자기증여의 텅 빈 공간 안에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