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 고해성사 - >
우리는 고해성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힘든 겁니다. 고해성사에 대한 감각을 회복해야 됩니다. 지금은 편안하게 상담을 하려고 합니다. 푹신한 안락 의자에 앉아서 그냥 다리 꼬고 앉아서 이랬어요. 저랬어요. 이런 식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편안한 안락의자에서 그냥 심리상담처럼 고해성사는 심리학이 아닙니다. 상담이 되기는 하지만, 다른 차원입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 되게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됩니다.
또한 제가 방금 봉독했듯이 십계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십계명을 율법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와 ‘율법’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복음 5장 17절에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그러셨습니다. 없애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그것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입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의 첫 자리에 하느님을 두라는것입니다. 내 삶의 첫 자리에. 한가지 예를 들까요? 고등학생만 되면 레지오 단장님 아들이건 사목회장님 아들이건 고등학생만 되면 성당 잘 않나옵니다. 왜? 좋은 대학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때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을 가서 그 때 성당을 나오면 되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는줄 아십니까? 절대로 않됩니다. 마귀가 바보입니까? 가만 놔두게요. 굴러들어온 먹이감을 한번 물면 잘 않놓습니다. 이미 세속화 되버리면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회복하기까지가요. 첫 자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아직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그 눈이 않뜨였기 때문에 하느님이 첫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자리가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입니다. 내 삶의 첫 자리가 하느님이시란 것입니다.
사람은 시련이 와봐야 그 사람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평상시에 아무리 미사를 많이 나오고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도 그것은 신앙? 모르는 일입니다. 시련이 와봐야 그 신앙이 진짜냐 아니냐는 그때에 드러납니다. 평상시에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평상시에 드러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기 때문에 착각 속에 빠지고 교만해지는것입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시련 안에서만 그 신앙은 드러납니다.
과연 내 삶의 첫 자리가 하느님이시냐 아니냐는 그 때 드러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겁니다. 사업에 실패해도 기뻐할 수가 있고, 큰 사고와 사건과 실패 안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내 삶의 첫 자리 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첫 자리이면 돈 없으면 자살하거나 절망합니다. 사람이 인간적인 애정이 첫 자리이면 그 애정을 빼앗기면 우울증이 걸립니다. 그 사람이 첫 자리이면, 자식이 첫 자리이어도 그렇습니다. 자식이 첫 자리이다가 자식이 첫 자리에 있습니까? 결혼하면 부모 생각합니까? 자기 자식 생각과 아내만 생각합니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우울증이 걸리는 것입니다. 첫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잃어 버리는 사람은 그런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일계명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라고 요구합니다.
두 번째 계명은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입니다. 불경죄를 짓지 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레위기에서 나옵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 나옵니다. 지금은 가장 불경이 심한 시대입니다. 사람에 대한 거룩함 사제에 대한 거룩함, 물론 사제도 거룩하게 살아야지요. 천사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 사제의 약점을 보고나서는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줘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사제가 아무리 약점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 약점에 대한 부추김의 말이 나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사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대 앞에 와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복이 됩니다.
장소에 대한 경건함이 있어야 됩니다. 성당. 이 집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세속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성당 안에서는 음식도 먹지 말아야 됩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물건에 대한 거룩함. 이것들은 제구 들입니다. 촛대 함부로 다뤄서는 않될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의 목적이 아니면 함부로 불러서도 않됩니다. 옛날에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습니까? 우리 어르신들은 그런 감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모님 존함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 ㉧자, ㉧자이십니다.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하십니까? 자식을 야단칠때도 하느님을 걸고 야단칩니다. 술집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건배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술주 자 = 주님주 자 하면서 농담합니다. 술자리에서 그것이 농담이 됩니다. 주님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안됩니다. 물론 다른 의미도 있을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 번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헤치우는 것입니다. 빨리 갔다가 산에 가던가 어디 가야하기 때문에 미사에 그냥 바삐 쫓겨서 보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것의 첫째 이유는 주님과 나의 계약입니다. 옛날에 계약은 이스라엘에서 계약은 지금은 싸인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새를 잡아다가 반으로 잘랐습니다. 정면으로 잘라서 날갯죽지 양쪽으로 놓고 그 사이를 길에다 놓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계약이 성립한것입니다. 어기면 이처럼 절단이 날줄 알아라 이런 것입니다. 계약이 이처럼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맺은 이 계약은 인격적인 계약이었습니다. 전부를 서로 내어 주는 그런 계약입니다. 주일을 통해서 나는 하느님것 하느님은 내것 주일을 지키는 것은 계약의 조건입니다. 이 주일을 통하여 우리는 일주일을 살아갈 영적인 양식을 얻게 됩니다. 가족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직장 동료를 위해서 살아야할 힘, 희생할 힘 이것을 얻습니다. 영적인 양식을 얻습니다.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어야 힘이 나듯이 우리는 주일 안에서 영적인 양식을 취합니다. 세 번째는 힘입니다. ‘힘’쉬어야지만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노는것과 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노는것도 피곤합니다. 쉼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의 쉼은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왜? 주일날 내가 못 쉬느냐? 멀어져서 이기 때문이 첫째 이유이고 주님께 내 시간을 나를 내어 드리지 않는다. 세상 적인것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쉬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월요일에 월요병이 생기고, 심장병의 확률이 월요일이 제일 많답니다.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