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4) 계속.

2005. 9. 20. 오후 2:40:24

글자

<김연준프란치스코 신부님 초청 강론중 - 고해성사 >

 

사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진짜로 모고백합니다. 한 80%정도는 모고백을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굉장히 오래해도 진보가 않됩니다. 발전이 없게 되고, 우리가 며칠전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저녁 미사때 감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 부활의 체험은 사그라집니다. 전설의 고향이됩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지. 지금 나의 체험이 되질 않습니다. 온전한 정화작업이 않되었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내가 피정을 하고 성령기도모임도 합니다. 하지만 왜 이것이 지속이 되질 않느냐? 분명합니다. 정화부터 해야 됩니다. 정화 작업이 되어야 그 위에 성체 성사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게임은 끝나는 겁니다. 모든 것은 다 끝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려버려서 그런것입니다. 제가 신자 여러분께 이렇게 말합니다. 물어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 사랑하십니까?”하고 물어보면, “예! 사랑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려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함정에 걸려 들었습니다. 저한테요. 그럼 저는, ”진짜로 예수님 사랑하십니까?”하고 물으면 더 자신있게 진짜로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십계명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말하면 아무 말도 않합니다. 요한I서 2장 3절에 보면,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 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쟁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계명을 잘 지키지도 않고 계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이 시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사랑만 강조하지 계명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지금은 지옥이 없는 종교를 원합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니까 쩨쩨하게 이정도가지고는 뭐하고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대자 대비하신 하느님. 이렇게 나의 죄를 다 합리화 시킵니다. 예레미야서 3장 5절이 바로 이 시대의 사람들을 그대로 정확히 말을 해줍니다. ‘이마가 뻔뻔스러운 창녀처럼 너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지금도 나를 아비라고 부르기도 하고 젊은날에 애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아무렴 끝없이 화를 내시지는 않을 거야, 언제까지나 진노하시지는 않을 거야, 이런 말을 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깨끗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 합리화 시켜버립니다. 합리화의 명수가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 다 합리화 시켜버립니다. 사랑만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왜곡하는것입니다. 

돌아가신 교황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의 문턱을 너머’라는 책을 보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십니다. “죄, 죄, 이야기를 하면 하느님을 엄하신 분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죄를 부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엄한 분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식해야 거기서 용서가 나온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인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왜곡하는 겁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단어는 죄를 없앤다는 단어입니다. 미사 때에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애는 것입니다.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방법도 말씀드립니다. “그럼, 신부님 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약도 가져왔습니다. 이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합리화 시켜 버리고 적당히 적당히 살아갑니다. 적당한 선에서 그리고 복음은 그대로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접어버렸습니다. 이미 포기한것입니다. 입맛에 맞는 단맛만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되라고 하셨지만, 설탕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입맛에 맞는 내 이해 수준으로 맞는 그런 신앙 생활. 

고해 성사도 잘 못합니다. 어른과 아이들의 고해 성사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린이들은 솔직합니다. 뭐 잘못했어요. 인정합니다. 아빠말 않들었어요. 엄마말 않들었어요. 분명히 자기를 인정합니다. 엄마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어쩔수 없이 제가 어마한테 대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질 않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고해성사 볼때 절대로 이렇게 않합니다. 남편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미워했습니다. 자식이 어떻게 해서 제가 자식을 미워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유가 있습니다. 고해성사에 절대로 내탓이 아니고 일단 남의탓이 있고 그래서 내가 어쩔수 없이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입니다. 이게 무슨 고해성사 입니까? 변명하러 온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더 짓습니다. 나의 죄를 고백한다는 핑계로 남편의 죄 고백하지요. 자식의 죄 고백하지요. 단체의 간부죄 고백하지요. 신부님 죄 고백하지요. 그 죄는 그 사람이 고백하게 하고 나의 죄만 고백해야 되는데 핑계로 일관하고 또 진짜 죄는 고백하지 않고 그러니 고해성사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씻겨 지겠습니까? 않 씻겨 지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 진복팔단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개끗해야 됩니다. 먼저 씻겨져야지 만이 정화되어져야 만이 조명이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일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자매님이 고해를 하러 오셨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웠습니다. 자매님의 사정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알콜중독, 직업도 이것 저것으로 옮겨서 하고, 돈도 벌어오지 못하고, 놀음도 잘 하고, 자매님이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님의 어려움은 인정을 하는데 고해실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 고해실은 내 신세를 한탄하는 곳이 아니라 그런 것은 면담으로 하시고, 고해실은 내 죄를 고백하는 곳이다. 왜 남편 죄를 고백하느냐? 자매님의 어려움은 인정을 하겠지만 여기는 고해실 이다. 내 죄를 겸손되이 인정하고 죄를 용서받으러 온 것이다. 왜? 여기서 죄를 짓는냐고 나가시라고 했습니다. 저가 그 자매님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물론 제가 기도를 합니다. 의사는 때론 단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비명을 질러도 수술 해야 될 부분은 수술을 해야 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보냈습니다. 자매님께서 나중에 이야기 하는데 굉장히 서운하셨답니다. 신부님이 저럴수 있냐? 했답니다. 힘들어서 왔는데 어떻게 사제가 이럴수 있느냐? 하셨답니다. 하지만, 한달 후에 다시 왔습니다. 진심으로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아니었으면 저는 영원히 남편 탓만 하면서 제 탓은 모르고 남편 때문에 원망속에서 죽어갔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그때 그렇게 말해 주셔서 깜짝 놀라서 일주일 동안 서운했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니까 저의 탓도 보였습니다. 제 탓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실 남편이 그렇게 된 것은 제 탓이 더 컸습니다. 하면서 울면서 성사를 보셨습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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