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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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틸리오(Rutilius)
축일 8월 2일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박해를 회피하는 일에 관하여”
(De Fuga in Persecutione)라는 저서에 의하면
데키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 성 루틸리우스
(또는 루틸리오)는 자신의 고향인 아프리카를
탈출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피신처를 찾았다.
그는 심지어 돈을 주고 이교도의 신상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외받기도 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용맹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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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모(Maximus)
축일 8월 2일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는
성 프로스도키무스(Prosdocimus, 11월 7일)를 계승해서
이탈리아 파도바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유해가 1053년에 발견되어 교황 성 레오 9세
(Leo IX)에 의해 안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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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파노 1세(Stephen I)
축일 8월 2일
로마(Rom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스테파누스
(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로마의 주교가 된 후,
교황 성 루키우스(Lucius, 3월 4일)를 계승하여
254년 5월 1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이단자들이 집전한
세례를 무효하기에 가톨릭 교회로 돌아올 경우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도 그 유효성은 성사의 제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인하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여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교황이었다.
그는 순교하였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실제로는
순교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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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세비오(Eusebius)
축일 8월 2일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 태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선출되어 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우스파(Arianism)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렀는데,
355년 밀라노(Milano)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5월 2일)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또
그 다음에는 이집트의 테베(Thebes, 오늘날의
룩소르 Luxor 근방)로 유배를 갔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 후 그는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라고 한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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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아리우스 이단이 없었더라면
많은 초기 성인들의 일생을 서술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에우세비오는 교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교회를 옹호한 사람이다.
사르데냐 섬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성직자가
되었으며, 사르데냐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피에몬테에 있는 베르첼리 주교로 임명되었다.
교구 신자를 성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체 안에 살면서 엄격한 미덕을 쌓아가는
성직자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기의 원칙에 따라 교구 성직자 공동체를 만들고,
성직자와 수도자의 생활을 일치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리베리오 교황은 가톨릭과 아리우스
이단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회의를 소집하고자,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다.
에우세비오는 비록 가톨릭 신자가 수적으로는
많지만 아리우스 이단이 우세한 것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밀라노를 방문했다.
그는 아타나시오의 유죄 판결에 반대하고
니체아 신경 선포를 무기한 연기했으며,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모든 이가 그것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에게 압력을 가했지만, 에우세비오는
여전히 아타나시오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정치 권력이 교회 결정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황제에게 상기시켰다.
처음에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던 황제는
그를 팔레스티나로 추방했다.
그곳에서 아리우스 이단자들은 그를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4일을 굶긴 후 놓아 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다시 박해를 계속했고 그의 유배 생활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로 계속 이어졌다.
새로운 황제의 명령으로 마침내 베르첼리
주교좌로 되돌아오게된 그는 아타나시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 참석했으며 마음이
흔들렸던 주교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또한 프와티에의 성힐라리오와 함께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했다.
그는 92세에 자기 교구에서 평화로이 선종했다.
설명 ; 미국 가톨릭 교회는 때때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 특히 가톨릭계 학교의 분리
원칙에 대한 부당한 해석으로 궁지에 몰렸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다행스럽게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서 하나의 교회로
공인된 이래 교회에 가해지던 엄청난 압력
으로부터 자유롭다. 적어도 오늘의 우리는
다행히도 황제를 교회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청하는 교황이나 동로마와 협상하도록
황제에게 파견된 교황 요한 1세, 또는
교황 선거에 미치는 왕의 압력에서
벗어나 있다. 교회가 어떤 특정인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용 ; "사목 활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히 같은 본당에서 일하는
사제들의 공동 생활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로써 사도적 활동을 촉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도들에게 사랑과 일치의 모범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30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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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텔드리타(Etheldritha)
축일 8월 2일
성녀 에텔드리타는 머시아(Mercia)의 왕 오파(Offa)와
왕비 퀸드레다(Quindreda)의 딸로 이스트앵글리아
(East Anglia)의 왕 에텔베르트(Ethelbert)와
약혼하였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배신으로 약혼자가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을 섬기는데
헌신하고자 793년경 왕궁을 떠나 링컨셔(Lincolnshire)의
한적한 습지에 있는 크로일랜드 섬에 작은 방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성녀 에텔드리타는 은수자로서 40여년을
근면한 기도로 자신을 봉헌하고 그리스도교의
덕목들을 실천하며 살았다. 몇몇 기적들이 그녀의
거룩함에서 나왔음이 증명되었으나 그녀는 예언의
은사로 더 잘 알려졌다.
그녀는 사후 성 구틀락(Guthlac, 4월 11일)의
무덤 옆에 매장되었으나, 그녀의 유해는 덴마크
사람들의 침략 기간 중인 870년 그들이 크로일랜드
수녀원을 파괴했을 때 분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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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테오도타(Theodota)
축일 8월 2일
신뢰할 수 없는 행전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는
니케아(터키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의 옛 이름)에 사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성 에보디우스(Evodius),
성 헤르모게네(Hermogenes), 성 칼리스타(Callista)라는
세 아들을 둔 과부였다.
그녀의 세 아들들은 다른 축일과 순교 장소와 함께
로마 순교록에 세 번 언급되는데, 칼리스타 목록에서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로 나타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는 그 지방의 집정관
레우카티우스(Leucatius)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앙심을 품은 그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발당했다.
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였기 때문에 성녀와 그녀의 세 아들들은 바로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총독 니케티우스(Nicetius)에게 끌려갔고,
그 후 그들은 모두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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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헤일즈(Thomas Hales)
축일 8월 2일
1295년 8월 2일 일단의 프랑스 해적이 바다를 통하여
영국 잉글랜드(England) 남동부 도버에 상륙하여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을 공격했는데,
이때 모든 수도자들은 몸을 피했으나 시에스타(낮잠)를
즐기고 있던 성 토마스는 그만 해적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그에게 수도원의 보물이 숨겨진 곳을
가르쳐달라고 윽박질렀지만 그는 끝까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영국 왕 리처드 2세가 교황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
에게 이 순교자의 시성을 촉구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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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플레그문도(Plegmund)
축일 8월 2일
영국의 머시아(Mercia) 태생인
성 플레그문두스(Plegmundus, 또는 플레그문도)는
체스터(Chester)와 인접한 섬에서 은수자로 살았으나
그의 성덕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그는 앨프레드(Alfred) 대왕의 궁중으로
불려가 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왕의 요청에 의해 890년에 교황으로부터 대주교로
승품되어 캔터베리에서 사목하였다.
오늘의 성인(8월2일)
2014. 8. 1. 오전 6: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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