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7월29일)

2014. 7. 28. 오전 11:22:35

글자

♡7월 29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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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칠라(Lucilla)

성녀 플로라(Flora),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23명의 그리스도인들

축일 7월 29일 

성녀 루칠라, 성녀 플로라(Flora),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성 테오도루스(Theodorus)를 포함한 23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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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포(Lupus)

축일 7월 29일 

프랑스의 툴(Toul) 태생인 성 루푸스(또는 루포)는
아를(Arles)의 성 힐라리우스(Hilarius)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6년을 살았으나,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을 이길 길이 없어서 서로 합의하여
헤어졌다. 루푸스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레랭 수도원으로 가서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의 지도를 받았다.

426년에 그는 트루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주교직을 수행하면서도 겸손, 고행, 청빈 등 수도자의
기본적인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극히 검소한 의복 외에는 입지 않았으며,
나무판자 위에서 잠을 잤고, 개인 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많았으며, 거의 매일 단식하였다.

429년에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가
펠라기우스 이단과 싸우기 위하여 영국으로 갈 때
그도 성인과 동행하였다.
두 주교는 기도와 설교 그리고 기적 등을 통하여
오류를 바로잡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이러한 공로 때문에 성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Sidonius Apollinaris)는 그를 이렇게 칭송하였다.
“사제들 중의 사제요, 주교들 중의 주교요,
프랑스 지방의 최고 성직자이며, 윤리의 기준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하느님의 친구이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대리자이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채찍’
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 후 그는 산중에서 은수자로
생활하였고, 관상생활만 하다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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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르타(Martha)

성녀 마리아(Maria)

축일 7월 29일 

성녀 마르타는 성녀 마리아(Maria)와
성 라자루스(Lazarus, 12월 17일)의 누이이고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에서 살았으며 집안일을
맡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주님은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신 듯하다.
성녀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루가 10장 38-42절의 사건은 그녀의 성격을
잘 묘사하는 내용이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이런 기사 때문에
그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성녀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처럼 공경을 받는다.
성 라자루스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했던 이는
성녀 마르타이고, 성녀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요한 11,20).
어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루스는
예수님의 사후에 프랑스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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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빠 라자로는
분명히 예수의가까운 친구들이었다. 예수께서는
한 죄인(자캐오)의 개종을 축하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의심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받은
예의 없는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환영받는 손님으로서 그들 가정에 오셨다.
그 당시 유대로 돌아온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마르타는 자기 오빠의
죽음에 서슴지 않고 예수를 청한다.
마르타는 적극적인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녀는 에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면서, 모든 이들이 저녁 식사
준비를 도와야 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요한 맥켄지 사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녀를
'보잘것없는 활동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복음 사가들은 주님께서 정신적인 것의
중요성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혼자 배불리지 말아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축복받을 것이다."

마르타의 뛰어난 점은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녀가 예수께 했던 소박하고 강한 신앙 고백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마르타는 "네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설명 ; 성서 주해자들은 예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을 설명하면서 성요한의 말을 지적한다.
성요한은, 라자로가 살아나기 전에 마리아에게
한 마르타의 말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종해야만
하는 하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라고 한다.
즉 이 말은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활에로
부르고 계신다는 뜻이다. 지금은 세례의
신앙 고백으로써, 그리고 후에는 죽음을
이긴 그분의 승리에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부활에 초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통하여 이들
세 사람들과 같이 주님의 특별한 우정으로
초대된 것이다.
인용 ;
현재의 생활에서도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모세가 주님께로 향했을 때, 그의 얼굴은
하느님의 반사로 빛났다. 신앙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깊이 생각할 때, 그는 그분과 똑같은
밝은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우리를 빛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눈부신 힘은 성령
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더웰, '부활'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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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파우스티누스(Faustinus)

성녀 베아트릭스(Beatrice)

축일 7월 29일 

성 심플리키우스(Simplicius)와
파우스티누스(Faustinus)는 형제지간으로 이방신에게
희생 바칠 것을 거부함으로써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참수되었는데, 시신을
티베르 강에 던져버렸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들의 여동생인 성녀 베아트릭스(Beatrix,
또는 베아트리체)가 오빠들의 유해를 건져
포르토(Porto)로 가는 길에 있는 제네로사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베아트릭스는 루시나라는 부인과 함께 살다가
이웃 사람의 고발에 의하여 체포되어 집정관 앞으로
끌려가서 이방 신전에 희생을 드리도록 강요받았다.
이때 그녀는 완강히 버티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리하여 그녀 역시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오빠 곁에
묻혔다. 이들의 유해는 7세기의 성 레오 2세(Leo II)
교황의 주선으로 산타 비비아나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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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빌리암(William)

축일 7월 29일 

성 빌리암의 덕행과 기적들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려진 듯하다.
그는 생브리외의 주교 요셀리누스(Josselinus)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후 그의 후계자가 되어 주교로
축성되었다. 가난이 그의 재산이었고,
자신의 소유물뿐만 아니라 구제를 위해서는
곡물이나 다른 필수품을 빌리기까지 하였다.
그의 행동 원칙은 화해와 기도의 정신이
그 밑바탕을 이루었다.

그는 교회의 권익을 가로채려는 브르타뉴(Bretagne)의
공작 베드로 모클레르로에게 끝까지 항거하다가
2년 동안 유배를 가야했다.
이때 그는 푸아티에(Poitiers)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극도의 회개생활을 하였다.
1230년 그가 생브리외로 돌아와서 4년 동안
활동하가다 선종했는데, 1248년에 그의 유해를
대성당에 안장할 때까지 성인의 유해가 조금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247년 또는 1253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
(Innocentius IV)에 의해 시성되었다.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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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세라피나(Seraphina)

축일 7월 29일 

성녀 세라피나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아르메니아의 성녀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에스파냐 또는 이탈리아의
성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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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사비나(Sabina)

성녀 세라피아(Serapia)

축일 7월 29일 

성녀 사비나(Sabina)는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출신의 부유한 과부였는데, 시리아 출신인
그녀의 여종 성녀 세라피아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우고 개종하였다.
성녀 세라피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고, 성녀 사비나 역시
그 다음 달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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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올라보(Olave)

축일 7월 29일 

노르웨이의 귀족 하랄드 그렌스케(Harald Grenske)의
아들인 성 올라부스(Olavus, 또는 올라보)는
흔히 ‘팻트’란 별명으로 불렸다.
한때 그는 해적질을 했다는 말도 있다.
그는 1013년에 세례를 받았고, 덴마크를 공격하는
잉글랜드(England)의 에텔레드(Ethelred) 왕을
도우려고 영국으로 간적도 있으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제국을 통일하는 방편으로 그리스도교를
적극 권장하였으나 1029년에는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잠시 멈칫한 사실이 있다.
그 후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싸우다가
스티클레스탓(Stiklestad)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노르웨이의 가장 위대한 영웅중의 한 명이고,
노르웨이를 그리스도교화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1164년 노르웨이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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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우르바노 2세(Urban II)

축일 7월 29일 

프랑스의 귀족 가문의 후손인 외드 드 샤티용쉬르마른
(Eudes de Chatillon-sur-Marne)은 1035년경
샹파뉴(Champagne) 지역 샤티용쉬르마른에서 태어나
랭스(Reims)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성 브루노
(Bruno)로부터 신학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1055년경부터 대부제로 일하였다.
1070년경 클뤼니(Cluny) 수도원에 입회하여
성 후고(Hugo)의 지도하에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의
요청으로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의 교회 개혁 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078년 오스티아(Ostia)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수석 보좌관이
되었다. 또한 1082-1085년에는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1088년 3월 12일 빅토르 3세(Victor III)
교황을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또는 우르바노)로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그는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의
등장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1089년 가을 70명의 주교들이 멜피(Melfi)에 모여
시노드(Synod)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성직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반대하는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1090년 마침내 로마의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1095년 이탈리아 피아첸차(Piacenza)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내린 파문이
정당함을 확인해주었다.
교황은 그해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Clemont)의
노트르담 두 포르(Notre-Dame du Port) 성당에서
개최된 시노드에서 1089년의 칙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신의 휴전’(Treuga Dei)을 처음 선언하였다.
또한 본처를 두고 재혼한 프랑스의 필리프 1세를
간통죄로 파문하였다.
그는 클레르몽에서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호소하고 격려함으로써 십자군 규합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그 사이 다시 클레멘스 3세가 차지하고
있었던 로마(Rome)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이리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권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결국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1098년 10월 그는 바리(Bari)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화해를 모색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교황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2주일 전인 1099년 7월 29일 피에르레오네
(Pierleone)에 있는 자신의 후견인의 저택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고,
그의 재임기간은 세속의 통치자인 하인리히 4세와
필리프 1세와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교황의 시복식은 사후 800여 년이 지난 1878년
7월 14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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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칼리니코(Callinicus)

축일 7월 29일 

성 칼리니쿠스(또는 칼리니코)는 특별히
동방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소아시아 지방 파플라고니아 태생으로 신앙을
지키다가 화형을 당했다.
메타프라스테스(Metaphrastes)는 그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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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우스티노(Faustinus)

축일 7월 29일 

성 파우스티누스(또는 파우스티노)는 이탈리아
스폴레토(Spoleto) 부근 스펠로의 주교인
성 펠릭스(Felix, 5월 18일)의 제자로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그를 수행하였다.
그는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토디(Todi)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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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릭스 2세(Felix II)

축일 7월 29일 

성 펠릭스 2세 대립교황의 행적은 혼란과 불확실 및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355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를 밀라노(Milano)에
잡아놓았다가 트라스로 추방하였다.
이유는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의 정의를
찬성하였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단죄하라는 명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때 펠릭스는 로마(Rome)의 부제로서 3명의 아리우스파
(Arianism) 주교들로부터 축성을 받고 교황궁으로
들어갔다. 펠릭스는 이 직을 수락하였으나 로마의
극소수 성직자와 신도들 그리고 궁중의 몇몇 관리들만
인정하는 교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리베리우스 교황의 사면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357년에 리베리우스 교황이 귀향하자
시민들의 환영은 열렬하였다.
펠릭스는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고 힘쓰다가
피신하였으며, 포르토(Porto) 교외에서 운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위대한 성인의 개인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로마 순교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로마의 아우렐리아 가도에는 거룩한 교황 펠릭스 2세가
묻혀 있는데 그는 교황으로서 순교하였다.
그는 아리우스파 황제인 콘스탄티우스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보전하려다가 축출되었으며, 비밀리에 보낸
자객에 의하여 토스카나(Toscana)의 체라에서
살해당하였다. 그의 유해는 성직자들이 몰래 거두어
장례 지냈고, 그 후 성 코스마(Cosmas)와
다미아누스(Damianus)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로마 순교록의 펠릭스는
리베리우스 교황의 생애와 뒤바뀐 듯도 하다.
1947년 이후 교황청 연감은 펠릭스 2세를
대립교황으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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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로스페르(Prosper)

축일 7월 29일 

프랑스 오를레앙의 주교인 성 프로스페르는
종종 같은 이름을 가진 아키텐(Aquitaine)의
성 프로스페르(6월 25일)나 레기오(Reggio)의
주교인 성 프로스페르(6월 25일)와 혼동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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